2025년 10월 17일 (금)
(홍)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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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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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5-10-15 ㅣ No.185574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집 안에 현명한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이 번창한다.” 그렇습니다. 현명한 며느리는 남편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내조하고, 아이들이 바르게 클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본당 건축위원회에 인원이 한 명 충원되었습니다. 예전에 성전 건축위원회 위원이었습니다. 직장을 옮기면서 동부로 이사 갔다가 다시 달라스로 왔습니다. 형제님이 건축위원회에 합류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기존의 위원들이 땅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같았다면 형제님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와 같았습니다. 형제님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10년 후에 어떤 상황이 될지를 판단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0년 전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10년 전에는 두 개의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자리에 성전을 신축하자는 의견과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는 지역으로 옮겨서 신축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의견은 지금의 성전 부지에 성당을 신축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는 지역에도 성전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10년이 지났고, 아직도 예전에 가졌던 비전이 변하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지난 5년간 신자들의 증감에 대한 통계자료를 보았습니다. 앞으로 10년간 매년 100여 명의 신자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었습니다. 달라스 지역에 성당이 하나밖에 없기도 하고, 달라스 지역으로 인구의 유입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10년 후를 내다보면 친교실의 확장도 필요하지만, 기존의 주일학교 교실도 늘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교우들의 전입이 많으니 10년 전에 예측했던 대로 제2의 성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도 말하였습니다. 건축가이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확고한 분이 새로이 건축위원으로 합류하였으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조직과 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조직과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입니다. 비전도 없고, 나태한 사람이 조직과 제도를 운용하면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자주 하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고, 우리도 단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안식일에는 쉬어야 하는 데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줍니까?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인데 밀 이삭을 따서 먹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은 단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가 끝나면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당신들도 안식일에 소나 양에게 물을 먹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왜라는 질문을 받으면 답변이 궁색해진 적이 많았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들이 있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 라는 질문을 받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싶으면서도 반항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저도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을 드러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왜 동생 아벨을 죽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나중에는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벌하시지 않겠는지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 10명을 보아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왜라는 차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라는 행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슬퍼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습니까? 율법 학자는 대답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사제와 레위인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자비를 베풀어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배반하였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왜라는 말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라는 말은 공동체를 갈라놓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살면서 왜라는 질문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떻게'라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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