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6일 (토)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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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선악(善惡)의 공존과 평화 “심판은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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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08:54 ㅣ No.183705

2025.7.26.토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탈출24,3-8 마태13,24-30

 

 

선악(善惡)의 공존과 평화

“심판은 하느님께”

-기도, 회개, 겸손, 자비, 지혜, 인내-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3)

 

오늘 복음 묵상중 떠오른 짧은 잠언성 자작시와 더불어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꽃과 시>라는 글입니다.

 

“사람은 

 꽃이자 시이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시같은 하루 시같이 살자

 사람은

 꽃이자 시이다”<2025.7.24.>

 

또 하나 <선과악은 하나, 공존의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자>라는 글입니다.

 

“선성있어 악성이고

 악성있어 선성이다

 둘은 분리할 수 없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선성에 찬탄하지 말고

 악성에 분노하지 말라

 유혹이다

 둘다 인욕과 자비심으로 받아들여

 함께 은총으로 성화시킬 일이다”<2025.7.25.>

 

옛 현자 다산의 지혜입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을 변하게 만드는 유일한 기회가 있다. 바로 후회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도 잘못이 없을 수 없다. 성인과 광인의 구별은 오직 뉘우침에 있다.”

 

진정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산의 지혜입니다. 성서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 했지 결코 “악을 제거하라” 하지 않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했지 교정하거나 시정해주라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럴수 있지, 그게 현실이지.”되뇌이며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연민의 시선으로 그윽히 바라보며 기다림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어느 사제가 전해준 “참종교인은 ‘신앙’이 있고 사이비 이단 종교인은 ‘확신’이 있다”라는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확신에 찬 강론 역시 때로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새삼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습니다. 정말 대책없는 것은 확신범입니다. 콘클라베 영화에서 로델리 추기경은 즉석 설교에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죄는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밀이고 너는 가라지다”라는 이런 흑백논리에 기인한 확신은 위태하기 짝이 없습니다. 

 

탄핵소추단의 일원이었던 모 변호사의 말입니다. “그의 확신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관용과 자제라는 규범을 파괴한 것이다. ‘가장 큰 죄’였던 것이 아닐까?” 이런 확신에서 자행된 중세시대의 마녀 사냥입니다. 참으로 부단한 참된 회개와 겸손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발본색원, 악의 뿌리를 뽑겠다는 무모한 확신과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무수한 피의 혁명과 전쟁이 입증합니다. 이래서 보복의 악순환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오늘 현대 신자들에게 결여된 옛 성인성녀들의 기도와 신앙, 인내와 지혜가 필요한 시절입니다. 잠시 오늘 기념일의 유래에 대해 나눕니다. 성경은 마리아의 가족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확정되기전 초기교회 신자들은 이 가족 이야기를 2세기 <야고보의 원복음서>에서 읽었습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모두 마리아의 부모이자 예수님의 진정한 외조부모로 여겨집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은 나자렛의 부유하고 독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사회적 낙인으로 여겨지던 고대사회에서 아이를 갖고자 요아킴은 기도하기 위해 사막으로 갔고, 안나는 집에 남아 하느님께 헌신할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 마리아를 낳습니다. 

 

동방교회에서 안나에 대한 신심은 4세기부터 시작되었고, 서방교회에서는 8세기 시작되어 13세기 비로소 7월26일 축일로 지내게 됩니다. 성 요아킴에 대한 신심은 15세기 시작되어 1913년에 9월16일 축일로 지정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두 축일은 오늘 7월26일로 통합되어 지금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신심’과 ‘신앙’입니다. 신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교회 정통 신앙에 의해 부단히 정화되어야할 신심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없는 외골수적 확신의 신심을 지닌 이들이 극우나 극좌의 맹신이나 광신에 빠지는 경우, 비일비재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인 가라지의 비유가 참 깊고 신비롭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현실, 바로 삶은 영적전쟁임을 알려주는 참 적절한 비유입니다. 초대교회의 내적현실을 반영하지만 인류가 계속되는 한 밀과 가라지의 현실도 계속될 것입니다. 참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가라지를 뽑자’는 일꾼의 경솔천박함을 꾸짖는 주인의 말은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이요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 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입니까? 밀인듯 보이다가 가라지로 보이고, 가라지인듯 보이다가 밀로도 보이지 않습니까? 가라지인줄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인류역사상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라지들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갔습니까? 사람은 정도의 차이이뿐 밀과 가라지의 성향 다 지니고 있습니다. 이래서 사형제도의 폐지는 백번 옳습니다.

 

사실 내 눈에 가라지일수 있어도 하느님 눈엔 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능성은 끝까지 남겨두고 일체의 판단은 보류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끝없는 기다림의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최종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가라지의 밀과 현실을 인정하고 공존의 평화와 지혜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의 자비와 지혜, 기다림의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가라지없는 밀만의 세상은 환상입니다. 밀만의 세상이라면 영적전쟁도, 영적성장도, 삶의 깊이도 없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천박한 일상이겠습니다. 세상을, 내 마음밭을 보세요. 온통 가라지밭들 같습니다. 수도원 밭들만 해도 잡초우거져 채소는 힘을 못씁니다. 이래서 밭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 합니다. 어찌보면 가라지로 상징되는 악은 영적성장을 위한 하느님 섭리의 도구일수도 있습니다.

 

적당한 가라지는 필요합니다. 가라지와 밀의, 선과 악의 조화와 균형이 중요합니다. 가라지에 제초제를 쓰거나 뽑아버림은 정말 삼가야 합니다. 대신 밀들을 튼튼히 키움으로 가라지 세력들을 약화시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래서 좋은 덕목의 선택과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평생 영적전쟁에서 영적승리를 거두는 비결입니다.

 

동방의학과 서방의학의 비교도, 체스와 바둑 놀이의 비교도 가라지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병의 원인을 제거차 잘라내기 보다는 심신을 보완하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동방의학이 복음적입니다. 더 나아가 서방의학과 동방의학의 균형과 조화가 참된 복음적 처방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서구의 체스놀이는 상대방을 하나하나 잡아냄으로 승리를 꾀하지만, 동양의 바둑은 균형과 조화의 결과 승패가 갈림으로 좀 더 복음적인 놀이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래서 확신은 옳든 그르든 위험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개방적 신앙이, 자비와 지혜, 인내가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인 가라지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에 타협하지 않으면서 관용과 인내, 연민과 이해가 정말 필요함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우리는 탈출기의 모세가 행하는 예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하느님과의 언약적 희생의 예시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24,8)

 

새삼 모세가 행하는 예식은 우리 성찬례의 모태가 됨을 깨닫습니다. 새 언약의 피는 예수님 자신의 피요, 제단은 십자가이고, 제사장과 제물은 모두 예수님입니다. 사실 우리는 성찬례를 죄와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우리의 언약 약속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면서 참 신앙의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참으로 매일의 이 거룩한 성찬례 미사은총의 ‘신앙’이 가라지 악의 세력과 영전전쟁의 승리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5).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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