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崔良業.토마스) 신부(神父)의 부친(父親) 최경환(崔京煥.프란치스코)은 하느님의 영광(榮光)이 삶의 목적(目的)이었으며, 이러한 영광은 애덕(愛德)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최경환은 자녀(子女)들의 교육(敎育)과 가정(家庭)을 돌보는 일에도 전력(全力)을 다하였는데, 끊임없이 자선(慈善)의 일을 하면서도 부인(夫人)과 자녀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정해 놓은 시간(時間)에 기도(祈禱)와 영적 독서(靈的讀書)를 공동(共同)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가정 교육(家庭敎育)의 영향(影響)으로 마침내 장남(長男)은 성직자(聖職者)의 길에 도전(挑戰)하게 되었다.
또한 그 아래로 아들 4형제(兄弟)도 열심한 신앙 생활(信仰生活)로 하느님을 증거(證據)하였으며, 특히 막내 아들은 그 어린 연령(年齡)에 옥중(獄中)에서 장렬히 순교(殉敎)하는 결단(決斷)을 내렸으니 과연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덧붙이면 최경환의 5형제중 장남은 사제(司祭)의 길에 도전하고 그이외 4형제도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특히 막내 아들 같은 경우 어린 나이에 결코 쉽지 않은 순교의 결단을 내렸으니 이런 모습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부친(父親)인 최경환의 철저한 신앙교육(信仰敎育)의 구체적인 결실(結實)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최양업 신부가 어떠한 과정(過程)을 거쳐서 신학생(神學生)으로 선발(選拔)되었는지 그 내력(來歷)을 자세히 소개(紹介)한다.
1836(헌종 2)년 1월 15일 조선(朝鮮)에 입국(入國)한 신부가 있었는데 흔히 나 신부로 알려졌던 모방 신부였는데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所屬)의 신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모방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무엇보다도 중점을 두었던 것이 방인 사제(邦人司祭) 양성(養成)을 목표(目標)로 한 신학생 선발이었으니, 이를 통하여 볼 때 당시 모방 신부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던 성직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목표에 입각(立脚)하여 최양업(崔良業.토마스)이 2월 6일, 최방제(崔方濟.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3월 14일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 도착(到着)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도착하여 모방 신부 곁에서 유학(留學)에 필요한 교육(敎育)과 한문(漢文) 및 라틴어를 배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방 신부는 당시 조선에서 교육이 수월치 않다는 판단하에 마카오에 위치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極東代表部)로 신학생들을 파견(派遣)하여 사제로 양성하기로 계획(計劃)을 세웠다.
이 신학생들이 조선 최초(最初)의 신학생들이면서 동시에 유학생(留學生)들이었는데, 당시 조선 천주교(朝鮮天主敎)의 입장(立場)에서 볼 때 참으로 획기적인 순간(瞬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객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