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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제3주간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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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생명의 탄생은 38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나타난 생명은 죽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생명이 단성생식, 다시 말하면 자기복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환경이 변화면서 단성생식으로는 적응할 수 없었던 생명은 유성 생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성 생식을 하면서 생명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성 생식을 통해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성 생식은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진 부모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수많은 다양한 생명 형태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유성 생식에서는 같은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쌍둥이도 서로 다른 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식물종이라도 유성 생식을 통해 다양한 꽃의 색깔과 형태가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한 생명체의 다양성을 넘어,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더 강력한 생태계를 만들고, 각 생명체가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다양성은 우연의 산물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는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조화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와 고향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말, 라합, 룻, 바세바와 같은 이방인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제외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가 구원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에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권위와 힘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나무를 손질하던 목수의 아들”로 여겼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제한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그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편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강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편견을 버리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편견과 시기심은 우리가 서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기회를 통해 서로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모두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이방인 여인들의 이야기는 환영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구원의 계획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