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8일 (토)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일치 주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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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로움만이 사랑 실천의 근본 /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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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9-06-13 ㅣ No.13036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자비의 기준으로 관계 치유를 진정으로 원하신다. 의로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뜻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고귀한 가치였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율법으로 형식적인 의로움을 추구하던 이들이란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저들의 세속의 의로움을 능가해야만 한단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 의미를 드러내는 의로움이 과연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과 연결될 게다. 사랑의 출발은 자비가 안긴 이 의로움만으로 이어지니까. 사랑이신 주님의 계명의 실천은 의로움에서 이어지리라. 사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처럼 그렇게 사는 것은 하느님 뜻을 실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위의 인정과 좋은 평판만 얻고자 했던 게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그 의로움의 원천인 도덕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마음을 더욱 새롭고 커다란 놀라움과 경외감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 그것이다.” 결국은 온갖 위선과 형식주의에만 빠졌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 게 아닌, 보여 주려는 자신만을 섬긴 거다.

 

그렇다고 그들이 전적으로 의롭지 못하다는 건 아니다. 의롭게는 살았지만 예수님의 그 의로움과는 분명 달랐다. 이웃에 무례하였고, 그들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작은 이 사랑에는 냉담했다. 그들은 늘 긍정보다 부정에 익숙했고 약자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의로움인 정의를 주장했지만, 공감은커녕 오히려 율법에 매달린 이로 마냥 비쳐졌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 의로움을 능가하라 하시는 거다.

 

사람에게는 육체적 나이만 있는 게 아닌 영적인 나이도 있다. 세월의 나이는 해가 지나면 자동으로 한 살 먹지만, 영적 나이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그러기에 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어린이가 쾌나 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 준수만 강조했지 약자에 대한 배려는 전혀 안중에 없었다. 율법에는 정통했으나 그 정신은 약했다. 그래서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은 아직도 어린이였던 셈이다.

 

우리 곁에도 오랜 신앙생활로는 지위는 높으나, 영적으로는 아직도 어린이나 망나니처럼 구는 이들이 의외로 참 많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화해의 구체적 실천을 강조하는 일상에서 소박하게 드러날 삶을 누려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이 의로움은 하늘나라가 겨자씨처럼 세상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는 것과도 같다.

 

하늘나라에 속한 주님 의로움만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것에 조금씩 또 조금씩 물들면서 이웃과 소박하게 사랑 실천을 나누는 이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큰 의로움을 지닌 이일게다. 신앙 공동체로 살려면 증오와 적개심은 반드시 피해야 할 장애물이다. 그것을 정신적인 살인으로 여기시는 주님의 뜻을 되새기며, 어렵더라도 용서와 화해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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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자비,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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