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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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간목요일 제1독서 (2코린3,15-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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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6-13 ㅣ No.130362

 

 2019. 06. 13.

 

 

 

 

  연중 제10주간목요일 제1독서 (2코린3,15-4,1.3-6)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7-18)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후 데 토 프뉴마 퀴리우, 엘류테리아'(ho de kyrios to pneuma estin, hu de to pneuma kyriu, eleutheria)

'주님은 영이십니다'(ho de kyrios to pneuma estin)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하느님과 본체론적으로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2코린3,6) 라는 주장을 여기서도 일관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계약'과 '새 계약'을 대조하고, 문자와 성령을 대조하며, 새 계약인 복음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코린토 전서 15장 45절에서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고 사도 바오로가 말하면서 창세기 2장 7절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의 기록을 확대 인용한 데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코린토 후서 3장 17절 그리스도께서 죽이는 문자가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 3장 17절에서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살려주는 영의 현존과 임재는 즉시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는 탈출기 34장 30절"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코린토 후서 3장 17절에 언급된 "자유"라는 주제를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대조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곧 '살려주는 영'의 현존과 임재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 바오로 자신도 역시 회심하기 전에는 당시의 유다인들의 교만과 패역무도함을 그대로 답습했던 자였지만, 다마스코스 도상에서 '살려주는 예수의 영'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결국 이러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바오로는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갈라티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라고 바오로는 언급한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코린토 후서 3장 16절에서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치워지는 너울의 자유'란 결국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곧 가장 축복된 영적 자유'를 말한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8)

 

여기서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통해 복음을 깨닫게 되고, 거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분명히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영광을 보는 것은 너울(수건)을 쓴 유다인들이 그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에 비교하면 크나큰 축복이요 놀라운 기쁨이지만,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드러나는 영광(로마8,18)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너울(수건)이 벗겨져 주님의 영광을 비교적 밝게 보게 되지만,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보는 때는 그분의 재림 이후며(1요한3,2), 그때는 우리가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로마8,29.30).

 

한편 주님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이시며(콜리1,15),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1,3)이시다.

따라서 요한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라고 진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요한14,9).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 구절은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뀌어 갑니다'로 번역된 '메타모르푸메타'(metamorphumeta)마태오 복음 17장 2절과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변하였는데'로 번역된 동사로, 원형 '메타모르포오'(metamorphoo)의 현재 수동태이다.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이 사용된 것은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습(형상)으로 변형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메타모르포오' 동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르페'(morphe)에서  변형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외양과는 대조되는 존재의 변화, 본질적 인간의 변화를 말한다(로마2,2).

 

그러나 본질적 인간의 변화라고 해서 인간이 신격화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인 변화가 본질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존재론적 변화라고 하더라도, 신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무한한 존재론적 차이를 허무는 변화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질적 변화는 죄로 인해 타락하여 희미해진 하느님의 모상(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가 도래하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태조에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모상(형상)과 가치들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의화(義化)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화의 과정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힘입은 '이끄심'을 통해 영화(榮化)의 단계까지 실패없이 수행될 것이며, 그것은 '살려주신 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관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5,2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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