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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처럼 부처처럼 / 성바오로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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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참 좋다, 아껴가며 읽는다. 남은 페이지가 아까워 얼마나 천천히 읽었던가. 이런 책을 만나니 참으로 기쁘다. 비유의 바다를 헤엄쳐 다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붉은 산호초 앞에 넋을 잃는다. 흥미진진함에 흥분하다가 가슴 깊숙이 송곳처럼 푹 찔러오는 날카로움에 다시 깨어나 여기, 지금을 살게 한다.
이 책은 예수회 신부인 저자가 불교 철학을 공부한 후 ‘그리스도교와 불교와의 만남’을 성경과 선승 무문혜개의 해설집인 『무문관』 안에서 그 접점을 찾아내어 풀어내 합일점을 찾고자 노력하였다는 데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 <무문관>은 중국 송대의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9) 선사가 1700여 칙(則)의 공안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48개의 공안을 가려 화두 참구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작가의 “『무문관』에 펼쳐진 침묵의 지혜가 성경 말씀에 한 줄기 신선한 빛을, 성경에 표현된 사랑의 말씀이 『무문관』의 48가지 공안(公案)에 생명의 물을 조금이나마 제공할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서로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종교체험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책 내용의 깊이를 가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꼭지 끝머리마다 자리한 작가의 짤막한 시는 묵상의 감칠맛을 내면서 다시 글 전체를 되새김질하고 음미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다음의 작가의 들어가는 글에서 이 책 전체의 구조와 내용을 살짝 맛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문법은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삶의 기술’(ars vitae)에 대해서는 겹치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겹친다고 해서 동일한 가르침이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고유의 주어와 술어로, 불교는 불교 특유의 목적어와 보어로 삶의 내용과 형식을 풀어나가니까요.
책 속 한 구절
예수와 부처가 전한 ‘삶의 기술’의 핵심은 마음입니다. 물론 헛된 망심(妄心)이 아니라 진실한 진심(眞心)입니다. 허나 헛된 마음속에 진실한 마음이 애초부터 머물고 있으니 그냥 마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떠날 때, 우리가 가지고 갈 것도 또 버리고 갈 것도 없습니다. 다만 무엇인가를 남기고 갈 뿐입니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순간, 그 사람이 남기고 간 것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은 다툼과 상처와 갈등을 자양분 삼아 인내와 화해, 그리고 용서와 받아들임 속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개념은 실재를 온전히 드러내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한계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언어에 길들여진 우리는 상징이 상징임을 망각한 채 절대적 실체로 착각하면서 절대화합니다. 말과 개념에 얽매여 실재를 놓쳐 버리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게다가 상징을 절대화하게 되면서 정작 상징을 만든 사람이 상징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건 아름다움이 본래 정해진 곳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받아들인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성지가 자리 잡은 산과 강에서 불어오는 평온한 바람과 맑은 기운이 성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자의 숭고한 삶으로 인해 거룩함이 그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신(神)은 언제나 우리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어라 이름 지어 부르던 상관없이 진리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진리를 잊어버리고 버릴 뿐입니다.
기도는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도를 바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기도가 우리를 누군가에게 바칩니다.
세상은 자신을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고 듣기는커녕 언제나 마음이 지어낸 생각의 그림, 곧 관념을 통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깨달음이란 진리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졌기에 진리를 자기 밖에서 대상으로 고찰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살아 생동하는 자기 안에서 진리와 하나 되어 춤추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면 더 이상 하느님을 자기 밖에서 대상으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차립니다. 나의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서로에게 깊이 현존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기에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물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과 함께 머물게 됩니다.
향기를 머금은 꽃들은 소리치지 않습니다. 향기를 소유하지 않고 아낌없이 나눌 뿐입니다. 자유 그 자체입니다. 나비와 벌들은 그 향기에 취해 먼저 다가옵니다. 향기로운 삶이 설교이고 복음입니다.
기도와 명상은 마음 운동입니다. 육체적인 근육을 키우기 위해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듯이, 마음속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하는 운동이 기도와 명상입니다. 마음 운동을 꾸준히 하다 보면 우리 내면에 고요함과 평온함, 그리고 청명함과 같은 정신적 근육이 자라게 됩니다. 이런 근육이 우리 내면에 자리하게 되면 일상의 삶에서 마주하는 웬만한 자극, 곧 오르막과 내리막에서도 평지처럼 쉬이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있는 것에 대한 집착과 없는 것에 대한 집착 역시 똑같은 집착일 뿐입니다.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도 지나치면 집착입니다. 텅 빈 충만의 삶을 소유하겠다는 생각도 집착입니다
우리의 착각 중에 우리가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착각만큼 큰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느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에게 드립니다. 기도는 우리를 텅 빈 충만 자체인 하느님에게 바칩니다. 기도는 우리를 진리 자체인 하느님에게 인도합니다.
들어가며: “좁은 문으로….” “문이 없는데….”
1. “주님을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시나요?” “무無!”
글쓴이 : 이영석 예수회 신부.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성과 영성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