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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과 의인을 구분할 방법이 있긴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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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1-07-02 ㅣ No.148014

최근에 병원에서 퇴원 후 수도자분과 신부님을 좀 많이 뵈었습니다. 시간이 있다 보니 신앙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복음 묵상은 그분들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과 죄인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만약 나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해서 죄를 지으면 죄인이고 의롭게 살면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건 어쩌면 추상적인 기준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거의 성인에 가까운 수준이 아니고서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행동이나 행위로 죄를 짓는 경우도 많지만 사실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죄라는 것은 자신이 죄를 지어서만이 죄를 짓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의 힘이나 환경으로 죄를 짓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조금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으로 잘못을 저질러 죄를 지었다면 누구를 원망도 할 수가 없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를 짓게 된다면 말입니다. 이런 예를 들기엔 적절하지 못해서 언급을 할 수가 없군요.

 

최근에 느낀 것입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거짓 자아의 가면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이건 수도자, 성직자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에 만난 수도자, 성직자분들과의 솔직한 대화를 하면서 느낀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수도자, 성직자도 이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수도자, 성직자라고 해서 여기에서 자유롭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제가 지어낸 말도 아니고 사실입니다. 실제 이 말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앙을 하나로 정의할 수가 없지만, 여러 개념 중 하나만을 이야기한다면 신앙은 자신 속에 있는 참 자아와 거짓 자아와의 치열한 싸움이고 전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전쟁에는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의 구분이 없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표현하시니 이해가 조금 되었습니다. 평신도와 차이가 나는 것은 신분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은 만약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에서 죄를 지을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 평신도와는 조금 다른 사정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나는 신부인데, 나는 수도자인데하는 신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좀 더 억제하고 제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혼자 묵상하면서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 더 있는 것입니다. 자연인이라는 신분 외에 신앙인이라는 신분이 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이런 걸 적용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신앙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이 신앙인이라는 신분에 구속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구속력이 강한 사람은 그나마 신앙인이라는 양심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지금 죄인이라고 해서 영원히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의인과 같은 삶을 산다고 해서 영원히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의롭게 사느냐, 죄를 지으며 사느냐에 따라 죄인인가 의인인가로 구분될 수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외면에는 거짓 자아의 가면을 쓰고 사느냐 진실된 자아의 가면을 쓰고 사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가면은 여성분들의 화장과도 같습니다. 화장은 한 번 하면 저녁엔 지워야 합니다. 다음날 또 아침에 화장을 해야 합니다.

 

화장도 기본적인 화장이 아름답지 진한 화장은 오히려 거부감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화장이 가면과 비슷하다면 살면서 화장을 하지 않고 여성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가면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가면을 쓰지 않고도 살려면 어떻게 살면 될지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실제 삶에 적용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최대의 관건은 하느님을 의식하느냐 주변 사람을 의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의식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가면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계를 초월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실수가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가면을 쓰고서 살면서 자신은 정작 쓰고 있는지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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