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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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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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자 [anadasi] 쪽지 캡슐

2002-05-02 ㅣ No.6239

   < 수녀 언니 >

 

                         -- 이해인 수녀 --

 

*** 언니라는 말에선 하얀 찔레꽃과 치자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것 같은 상큼한 향기가 난다. 언니라는 말은 엄마 다음으로 가장 아름답고 포근하고 다정한 호칭이 아닐까? 큰언니, 작은언니, 올케언니, 새언니, 선배언니,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언니!’하고 부르면 웬지 마음에 따뜻한 그리움이 밀려오며 모차르트의 시냇물 같은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내가 여학교 시절. 어느 길모퉁이에서 만나 불쑥 "얘, 너 내 동생하지 않을래?" 하고 말을 건네던 상급생 언니. 문예반 시절의 그 꿈과 낭만이 가득했던 예비 시인 언니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서로 헤어져 살던 시절 어느 해 방학날, 난 동생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그가 집에 올 때쯤 일부러 다른 방에 숨어 있었는데, 집에 들어온 동생은 가방을 놓자마자 "엄마, 언니 왔지?" 하다가 "응, 온다더니 아직 안 왔어" 라고 대답하니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그리움과 서러움에 목메어 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난 동생으로부터 사랑받는 작은언니로서의 몫에 감격하며 눈물을 닦다가 참으로 반가운 해후를 했던 일을 고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멀리 해외에 나가 있는 동생이 어쩌다 내가 있는 수녀원에 전화를 걸어 언니야, 별일 없지? 꿈에 언니를 보았거든" 한다든지 ’보고 싶은 작은언니’로 시작하는 긴 글을 보내오면, 그 옛날 싸움도 더러 했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며 정을 나누었던 아우가 더욱 그리워진다. 나보다 네 살 아래지만 두 아이의 엄마로 늘 부지런하게 살림을 꾸려 가며 마음도 넓고 아름다워 로사라는 세례명이 잘 어울리는 동생은 "적어도 세상일에 있어서만은 애가 더 언니인 것 같다"며 웃곤 했다.

 나에겐 늘 현명한 스승 같기도 하고, 어진 친구 같기도 한 13년 연상의 수녀 언니가 계시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한 번 만나고 나서 그 모습이 꼭 성모 마리아님과 보살님을 합해 놓은 것 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고 표현하셨던 언니. 나에겐 하나밖에 없는 인숙 언니는 내 동생이 일곱 살, 내가 열한 살 때 가장 엄격한 봉쇄 수도원인 가르멜수녀원에 들어가 40년을 살았으니 나이가 예순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순진무구한 소녀 같은 모습이다. 워낙 조용하고 차분하며 수줍은 성격의 언니는 오랜 세월의 수도생활을 통해서 좀더 활발하고 명랑해지신 것 같다.

 "수녀님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어머니의 희생과 가르멜수녀원에 계신 언니의 깊은 기도 때문인 거야" 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듣듯이 언니가 내게 주는 끊임없는 사랑의 관심과 격려와 기도는 참으로 각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주변엔 눈에 보이지 않은 기도 외에도 언니를 생각나게 하는 소박한 선물들이 많이 있다.

 내가 수도생활을 시작할 무렵, 늘 좋은 생각만 하며 살라고 여러 좋은 말들을 골라 친필로 적어 준 수첩, 세심한 배려와 충고가 담긴 편지들, 민들레의 노란빛과 잎사귀빛을 배합하여 ’민들레 이불’이란 이름을 붙여 손수 뜨게질해 주신 침대보 등등.

 해마다 가을이면 향기를 맡으며 시심을 떠올리라고 탱자와 모과를 상자에 가득 담아 보내 주는 언니. 가끔은 ’취급주의’라고 쓴 조그만 플라스틱통에 고운 꽃씨나 민들레솜털을 담아 보내기도 하는 언니의 그 정성이 어느 땐 성가신 생각마저 들어 그만두라 해도 소용이 없다.

 "얘, 좋게 말하면 곰살갑고, 무엇이나 주기 좋아하는 성격, 너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니? 어젠 고치려고 해도 잘 안되는구나" 하는 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얼마 전 첫월급을 탄 기념으로 아기자기한 선물 보따리를 보낸 조카 진이가 ’고모님들께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저희가 드린 선물들을 훗날 다시 저희에게 선물하시는 실수를 하지 마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라고 메모한 것이 생각난다.

 "난 참 이상하지? 내일 아침에 외출한다고 하면 오늘밤부터 신발도 돌려 놓고, 가방도 열어 놓고 해. 걱정이 돼서..." 하기도 하고, "육십 넘은 나더러 글쎄 우리 젊은 원장수녀가 귀엽다고 하는구나" 하며 활짝 웃는 언니를 만나고 오는 날은 내 마음도 밝고 맑아진다. 나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어쩌다 언니에게 좋은 평가를 들려주면 너무 기뻐서 가뜩이나 빠른 말씨가 더 빨라지며 흥분해서 전화를 걸어 오는 언니. 여러 차례의 큰 수술을 받을 만큼 병치레도 잦고 몸이 약하지만, 깊은 믿음과 사랑 안에 누구보다 기쁘게 수도생활을 하고 계시니 나도 기쁘고 행복하다.

 오랫동안 세상과 격리되어 있어서인가. 가르멜수녀원의 수녀님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 또한 다양하다. ’기차표’ 신발가게에 들어가서 "저, 서울 가는 기차표 한 장만 주세요" 했다든가, 샴푸를 선물받고 얼굴에 바르는 것인 줄 알았다든가 하는 것 등등. 언니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날 병원에 진찰받으러 갔을 때 간호 수녀님이 건네준 브라보콘 아이스크림 먹는 방향을 몰라 뾰족한 끝부터 먹기 시작했더니 그게 아니더라고 해서 웃은 일도 있다. "내가 사용법을 몰라 보내니 네가 쓰렴" 하고 가끔 내게 보내는 볼펜도 실은 간단히 누르면 되거나 돌리면 되는 단순한 것들인데도 새것을 보면 지레 겁부터 나시는가 보다.

 남들이 두 개 갖고 있는 콩팥도한 개 밖에 없고, 이런저런 합병증에 요즘은 갈수록 귀도 어두워진다는 언니의 얘길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언니의 지나간 자상함에 나는 종종 짜증까지 내며 거부하는 얄미운 동생이지만, 누구에게나 푸른 산처럼  어질고 덕스러운 언니가 계시기에 늘 든든하다. 수도자로서 부족한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할 법한 이들에게 난 미리 언니 자랑부터 하고, 마침 같은 부산에 살고 계신 언니를 만나게 해준다. 나의 든든하고 소중한 ’빽’인 언니가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언니의 어진 모습을 그려 본다.

 "고모, 큰고모는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 사람 같질 않아요." 하고 우리 조카들이 어린 마음에도 그 고움과 맑음을 일컬어 표현하는 나의 수녀 언니. 언니처럼 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좀더 푸근하고 온유해지길 원하지만 모든 이의 어진 언니가 되기엔 늘 폭이 좁고 인상도 마음도 차가운 편이어서 아쉬움을 느낀다.

 그 옛날, 어린 동생을 둘이나 떼어놓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은 결코 현명하고 인간미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고 어느 날 내가 불쑥 시비를 걸어도 그 큰 눈을 껌벅이며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며 오히려 통쾌하게 웃던 인숙 언니. 언니는 지금쯤 어떤 기도를 바치실까? 깊은 봉쇄의 담 안에 숨어 살면서도 마음은 동생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과 기도로 활짝 열려 있을 언니의 초록빛 창을 향해 나는 "언니!" 하고 가만히 불러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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