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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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을 녹이는 말 한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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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덕 [itsjesus] 쪽지 캡슐

2000-12-24 ㅣ No.2265

상사 (商社) 한국 주재원인 테리 돕슨이 기차에 몸을 싣고 광주 교외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돕슨이 타고 있던 객실 안은 평일이어서 그런지 비교적 한산했다.

아이가 딸린 주부 서넛과 창에 기대어 졸고 있는 몇몇의 노인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느 역에서 기차가 정거하고 객차의 문이 열리자 젊은 사람 하나가 올라왔다.

누추한 차림에 손이 큰 그 사나이는 낮부터 술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면서 휘청거리며 걷다가 아기를 안고 있는 한 부인과 부딪쳤다.

 

아이가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겁에 질린 늙은 부부가 후다닥 일어나더니 객차의 반대쪽 끝으로 허겁지겁 피해 갔다.

그러자 술 취한 사나이는 달아나는 노파를 향해 냅다 발길질을 하면서 욕을 퍼부었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할망구야, 오래 살기 싫어? 엉?"

 

기차는 계속 덜컹거리며 가고 있었고, 승객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때 테리 돕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돕슨은 태권도로 단련된 건장한 사람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돕슨은 아직 한번도 진짜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태권도를 배우는 수련생들은 싸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권도는 화합의 기예(技藝)이다. 싸우려는 마음을 가진 자는 이미 우주와의 결합을 깨뜨린 것이다. 만약 타인을 힘으로 억누르려 한다면 우리는 이미 패배한 셈이다. 우리는 갈등을 빚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돕슨은 스승의 이런 가르침에 따라 교훈을 실천하려고 애써 왔었다.

심지어 기차역 주변에 흔한 오락실을 들락거리는 조무래기 깡패들과도 맞부딪치지 않도록 주의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인내심은 돕슨을 오히려 우쭐하게 만들었고, 나쁜 사람을 때려눕히고 착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가 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돕슨이 일어서는 것을 본 주정뱅이는 시비를 걸 사람이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코쟁이! 너, 한국식 예절 좀 배워야겠어!"

 

돕슨은 그에게 경멸에 찬 냉담한 시선을 던졌다.

이미 그 얼간이를 때려눕힐 작정을 했지만 그가 먼저 달려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돕슨은 그 사나이의 화를 돋우려고 모욕적으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좋아! 너, 오늘 맛 좀 봐라."

 

마침내 주정뱅이가 돕슨을 향해 돌진할 참이었다.

그때였다.

귀를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돕슨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주정뱅이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자그마한 몸집의 노인이 있었다.

칠순이 넘어 보이는 그 작은 노신사는 마치 주정뱅이한테 들려줄 아주 중요하고 반가운 얘기가 있기라도 한 듯이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이리 오게. 이리 와서 나하고 이야기라도 하세나."

 

노인이 주정뱅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자 그는 비틀거리며 노인 앞으로 도전적으로 다가가더니 덜컹대는 기차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뭐라고? 내가 미쳤어, 영감하고 이야기를 하게?"

 

노인은 계속 그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자네 무슨 술을 마셨는가?"

노인은 흥미롭게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막걸리 좀 마셨수다. 하지만 영감이 무슨 상관이요?"

 

주정뱅이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노인에게 침이 튀었다.

 

"막걸리라구? 좋지, 좋고 말고. 술이라면 나도 무척 즐기는 편이네. 우리 집사람은 지금 일흔 여섯인데 매일 저녁때마다 나하고 술 한 병을 들고 마당으로 나가지. 오래 된 나무의자에 앉아 술을 따라 마시면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본다네. 그리고 우리 집 감나무가 잘 자라는가 살펴보기도 하지.

 

내 증조부가 심으신 나무인데 지난 겨울에 그 혹심한 폭풍을 겪고 다시 회복할지 매우 염려가 된다네. 그래도 생각보다 좋은 상태야. 토질이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더욱 기특하지. 뜰에 나가 감나무를 보면서 술을 마시며 저녁 한때를 즐기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라네. 비가 올 때도 말이야."

 

노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어느새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주정뱅이의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불끈 쥐고 있던 주먹도 스르르 풀렸다.

 

"자네에게는 착한 아내도 있을 듯 싶으이."

"아닙니다. 처는 죽었어요. 전 아내도, 집도, 일자리도 없는 놈입니다. 전 정말로 부끄럽습니다."

 

기차의 움직임에 몸을 흔들거리던 덩치 큰 그 사나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물이 두 뺨을 타고 내리더니 절망적인 흐느낌이 몸 전체로 번져갔다.

돕슨이 내릴 역에 도착했을 때 노인의 동정어린 코멘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쯧쯧. 정말로 어려운 처지로구만. 자, 여기 앉아서 그 이야기나 더 들려주게나."

 

사내는 노인의 무릎에 머리를 묻은 채 엎드려 있었는데 노인이 헝클어진 그 사내의 더러운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 http://www.yehwa.org 채수덕

<테리 돕슨, 낮해밤달, 9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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