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이 차의 주인이 될지 모르지만.

스크랩 인쇄

최은혜 [sharptjfwl] 쪽지 캡슐

2002-01-31 ㅣ No.5593

중고차 전 주인이 남기고 간 쪽지

 

"어떤 분이 이 차의 주인이 될지 모르지만"

 

 

 

 

햇볕 따스한 오후에 마실을 다녀왔습니다. 흙먼지 폴폴 나는 바닷길을 털털대는 차를 타고 한 바퀴 휭 돌자니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닙니다. 사방의 창문에서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돌멩이들은 밑바닥을 뚫고 차 안으로 튕겨 들어올 것만 같습니다. 자동차는 군데군데 흠집이 난 상처에 흙먼지가 붙어 앉는 것이 싫은지 몸을 요란하게 흔들어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이 볼품없이 낡아빠진 중고차를 매정하게 팔아버릴 수도, 고철로 던져버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비포장길쯤 비실비실 달리는 그깟 중고차가 뭐가 중요해서 볼썽사납게시리 질질 매달고 다니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푸석푸석한 자동차를 냅다 던져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위가 길었습니다. 별 할 일 없이 지내는 처지인데도 세상 더위는 혼자서 다 칭칭 감고 사는 것처럼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던 중 가족과 함께 대전에 다녀올 일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생각하였지만 갓 태어난 아기도 있었고 여러번 차를 갈아 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좀 무리하더라도 승용차로 다녀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전 시내로 들어섰습니다. 해풍이 간간이 불던 남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웠습니다. 고속도로에서는 에어컨을 두 번 째 칸에 놓아도 제법 땀을 식혀가며 달릴 수 있었는데 복잡한 시내로 들어서자마자 상황은 돌변하였습니다. 바람 한 점 없고 떠밀리는 차량에서 내뿜는 열기가 내 차 안으로만 몽땅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에어컨 세기를 한 칸 더 올렸습니다.

 

대전 한밭대로 ㄹ백화점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때마침 일요일 오후인지라 차량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고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쯤 차 안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시동이 푸르르 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별다른 이상징후가 없었고 기름 잔량을 나타내는 계기도 중간쯤에 있었기에 참말로 황당하였습니다.

 

그 숨막히는 도로 한 차선을 꽉 틀어막고 있는 우리 가족은 어디 땅 속으로 폭 꺼져버리고 싶었습니다. 뒤에 밀린 차량들은 모두 다 차 밖으로 나와 따가운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심하게는 욕설까지 하였습니다. 다른 차선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런 고물차는 뭐하러 여기까지 끌고 나왔냐는 빈정반 동정반의 시선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질 뿐이었습니다.

 

아내는 길을 트고 나는 차를 밀고하여 겨우 3차선으로 차를 옮겼지만 길이 꽉꽉 막히기는 똑같았습니다. 남부끄럽던 시간이 얼마나 길던지요. 누가 신고했는지 몰라도 견인차가 도착하고 가족만을 도로에 남겨둔 채 정비하는 곳으로 차를 옮겨갔습니다.

 

"기름이 떨어졌는데요? 주유소에서 기름 사다가 넣어보시죠?"

"아니, 그럴 리가요? 분명히 절반 정도 남았었는데......"

정비사의 시큰둥한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택시를 타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다가 부어보니 거짓말처럼 다시 시동이 걸렸습니다. 분명히 시동이 꺼지기 전 기름 잔량이 절반 정도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줄줄 흐르는 땀방울은 고사하고 계획에 없었던 견인비를 지불하고 나니 속이 써금써금 소태를 씹는 듯 깔깔하였습니다.

 

ㄹ백화점 앞에서 철퍼덕 주저앉아 있는 식구들에게 괜한 고생을 시켰다는 미안한 마음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였습니다. 식구들을 다시 태우고 가는 길 내내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은 마르지 않고 고물차에 대한 미움 또한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샀던지 한술 더 떠서 맞장구를 쳐댔습니다. ’뭐, 싼게 비지떡이라니’하면서 그때 아버님께서 차를 사주신다고 할 때 적당히 거절하고 새 차를 살 걸 그랬나 후회를 하였습니다. 사실 이 중고차는 지난 1월 ’폐암 투병중인 아버님의 자식사랑’에서 소개된 그 자동차인지라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끔 고향에 내려갈 때면 아버님께서 털고 닦고 하는 자동차 사랑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대전에서 볼일을 보고 또 언제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서 멈추어 서버릴까 하는 불안감에 조마조마하면서 무사히 집에 내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급한 성질에 정비소에다 계기판을 당장 갈아달라고 차를 맡겨버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얼마 뒤에 비포장 산길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차 밖은 말할 것도 없고 차 내부까지 먼지를 뒤집어썼기에 자동차 내부의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곳곳을 털고 닦고 하다가 잘 내리지 않는 햇빛가리개를 내리는데 그 안쪽에 잘 붙여 접어진 종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무엇인가 궁금해 무심코 한 겹 두 겹 펴 보았습니다. 깨알 같이 쓰여진 글들을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갈 때쯤 나는 커다란 감동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중고차 전 주인인 듯한 여자의 따뜻한 쪽지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이 차의 주인이 될지 모르겠지만

항상 사랑과 행운이 넘쳐나길 기도할께요.

결혼과 함께 마련한 이 자동차에 대해서

신랑과 저는 무척이나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함께 시작한 일이

방수처리전문업이라 부득이 이 승용차를 팔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차에 대하여 알려드릴 것이 있어서 간단히 적어놓습니다

운행상의 문제점은 별로 없는데 흠이라면 다른 차에 비해

기름값 부담이 크더군요. 물론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스페어 타이어가 펑크가 나있었는데 깜빡 때워 놓지 못했구요.

비상시 필요한 연장들이 몇 개 빠져 있어서

새로 사서 넣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소화기는 원래 없었는데

기왕 산김에 따로 안쪽에 넣어 놓았으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타이어와 오일은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분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아차!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릴 뻔하였군요.

계기판이 문제가 있는 건지 에어컨이 문제 있는 건지 여름에

까딱 잘못했다간 도로 한 가운데서 멈춰 설 수가 있어요.

에어컨을 이단까지 켤 때는 괜찮은데 삼단까지 올려놓으면

급격히 기름 소모가 빠릅니다. 기름 표시가 중간에 있는데도

어쩔 때는 그냥 시동이 꺼져버립니다. 계기판을 손보긴 했는데도

또 그런 것으로 보아 에어컨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완전한 차를 넘겨주어야 할 텐데 사정이 여의치 않네요.

맨 먼저 이 고장을 손보시고 운행하면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아무튼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

 

2001. 1.10 기흥에서 장OO

 

아! 가느다란 탄성과 함께 가슴이 환하게 맑아져옴을 느꼈습니다. 여태까지 가슴을 콕콕 찍고 있었던 땡볕 더위 속에서 불쾌했던 기억들이 말끔하게 씻겨져 갔습니다. 좀더 빨리 이 쪽지를 발견하였더라면 그런 낭패를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매사에 꼼꼼하지 못한 덜렁덜렁한 성격 때문에 또 한번 사서 고생을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된통 고생하고 나서 찾아오는 이 환한 기쁨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가늠자로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고쳐서 눈속임으로 자동차를 파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 스페어 타이어며 연장, 그리고 없었던 소화기까지 일부러 사서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운전자만이 알 수 있는 자동차의 고장을 새로운 주인이 알아서 대처할 수 있도록 쪽지를 남겨두는 배려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번 내 품을 떠나버리면 나와 상관 없는 자동차인데도 평소에 눈에 담고 만져주던 애착들을 다음 주인에게도 고스란히 넘겨주려는 그 맑은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가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는구나하는 생각에 며칠 동안 그 쪽지의 따뜻한 감동에 젖어 살았습니다.

 

지금껏 운행하고 나서 주차시켜 버리면 그만이었던 자동차를 수시로 어루만지고 창문 밖으로 바라다보는 습관이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그 사람의 맑고 환한 마음이 나에게 전해져 오래도록 이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이 차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팔리는 일이 생긴다면 나 또한 그런 가슴 따뜻한 쪽지 한 장 꼭 남겨둘 생각입니다.  

 



722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