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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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 둔 아랫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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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혜 [sharptjfwl] 쪽지 캡슐

2002-01-10 ㅣ No.5438

비워 둔 아랫목  

김병규 님 / 동화작가  

 

갑자기 비가 후두두 내렸습니다.

혼자 집을 보던 할머니는 빗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다 말린 빨래들을 개키다 말고 그 옷가지들을 밀치고 일어섰습니다. 창 쪽으로 다가서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금세 빗줄기가 주르르 쏟아졌습니다. 할머니는 혼자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이거 원! 아이들이 비 맞겠구나.”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를 데리고 뒷산에 산책을 갔습니다.

걱정이 된 할머니는 발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빼며 대문 쪽을 살폈습니다. 대문 밖에는 한 아이가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손자 또래였습니다. 비에 젖은 옷은 꾀죄죄했고 , 얼굴엔 꼬질꼬질 땟국이 흘렀습니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간 할머니는 기어이 그 아이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먼저 욕실로 들여보내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뒤 손자의 옷을 주어 속옷까지 갈아 입혔습니다. 아이는 한결 멀쑥해졌습니다. 할머니가 그 사이에 데운 따뜻한 우유와 과자, 과일을 내놓았습니다. 아이는 걸신들린 듯 아귀아귀 먹어댔습니다. 다시 내 온 빵까지 말끔히 먹어 치우더니 그 자리에서 꼬박꼬박 졸았습니다.

“얘야, 방에 들어가서 한숨 자고 가거라.”

할머니는 굳이 아이를 손자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쿨룩쿨룩 기침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잠잠했습니다. 한참 지나서, 아이가 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현관으로 가서 벗어 둔 제 신을 찾아 신었습니다. 아이는 물기 젖은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보더니 꾸벅 절했습니다.

“고맙습`…. 쿨룩쿨룩.”

할머니가 앞서 출입문을 열고 뜰로 내려섰습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습니다. 뒤따라 오던 아이도 하늘을 힐끗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습니다.

 

그때 초인종이 ‘딩동!’하고 울렸습니다. 마침 산책 갔던 식구들이 돌아온 모양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대문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에 집 안으로 뛰어들려던 손자와 급히 나가려던 아이가 부딪칠 뻔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앞으로 나서며 식구들을 가로막고, 아이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아이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골목 쪽으로 사라졌습니다.

“할머니, 쟤가 누구죠? 내 점퍼를 입고 간`….”

손자가 다그치듯 묻자, 할머니는 딴청을 부렸습니다.

“이런! 우리 길산이가 비를 맞았구나. 어서 들어가자.”

아들과 며느리도 의아한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집 안에 들어온 할머니는 가족들을 앉혀 놓고 여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할머니, 그 옷은 내가 아끼는 거란 말이에요.”

손자가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습니다.

“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길산이 침대에서 자게 한 것은 너무 했어요.”

며느리도 나무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전쟁 때였어. 그 해 겨울의 추위는 엄청났지. 돌 지난 아기를 안고 피난 온 한 여인이 도시를 헤매고 있었단다. 약속이 어긋나 남편을 만나지 못했던 게지. 하루는 어느 집 담 아래서 잠을 자는데, 웬일인지 아기 몸이 불덩이 같았어. 덜컥 겁이 났지. 여인은 밤중에 그 집 대문을 두드렸어. 아기 좀 살려 달라고. 사정을 들은 주인은 아기의 이마를 짚어 보더니, 군말 없이 아랫목을 내어 주었어. 그 집도 아홉 식구가 단칸방에서 생활하면서 말이야.”

“할머니,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손자가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인은 이 할미고, 그 아기는 저기 저 양반이야.”

할머니는 턱으로 아들을 가리켰습니다. 그 순간 아들의 얼굴엔 경련이 일었습니다.

“겨우 온기가 남아 있는 그 아랫목이 얼마나 따뜻하던지…. 이 참에 내 한 가지 당부하마. 우리집 아랫목은 늘 비워 둔다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다오.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따뜻한 아랫목을 내놓을 줄 모르면, 우리집 사람이 아니야.”

말을 마친 할머니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손자는 여태 방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깍지낀 두 손으로 두 무릎을 감싼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염치가 있더라. 네 침대에 올라가지 않고 너처럼 그렇게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한참 자고 갔다. 속상해 말아라. 비 맞았는데 이러다 감기 들겠다.”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꽁해 있는 것 같아 할머니는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돌아서려던 순간 할머니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게 아니란 말이야. 바보! 잠이 오면 침대에서 잘 것이지, 왜….”

이렇게 중얼거리던 손자가 그만 울먹였습니다. 그러더니 침대의 이불을 슬그머니 끌어당겼습니다. 그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그대로 누웠습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할머니는 손자의 가슴을 손으로 꼭꼭 눌러 주었습니다. 그 손길 탓인지 등에서부터 가슴으로 따뜻함이 전해 왔습니다. 손자는 정말로 ‘그 집의 아랫목’에 누워 있는 것만 같이 아늑했습니다.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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