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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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한없이 부족한 저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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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 [74.115.139.*]

2006-12-16 ㅣ No.4664

들려주신 말씀에는 우선 저와 한 마당인 '공감대'가 있습니다.

실로 어떤 거룩한 것, 신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있으면서도,

실제로 찾아 나서기가 막연하고

그렇다고 남들을 따라 해보는 것도,  마음 내키지 않는 일임을 잘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같은 긴 글이 써지고 있습니다.  두서 없이..)

 

실제로 유럽, 북미에는 훌륭한 신앙인들이 많으면서도 한편

신자라는 이름만 걸어놓고 하느님과의 진정 만남의 장이 없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종교가 진심 하느님께 향한 회두 (conversion)로서  체험적으로 조명을 받은

어떤 확신 (conviction) 이 아니라,  인습 (convention)에 의하여 얻어진

소속감을 지닌 명함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카톨릭 신앙의 전통과 성인이 가장 많은 이탈리아인들 중에는

일생에 세번 성당에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태어나서 부모님이 영세를 시킬 때, 결혼할 때, 죽어서 하관 전 장례미사 때... 

 

이런 사람들에게 종교란 혈연적 '소속'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니까

이들의 구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큰 부류의 사람들이 일년에 한 번 성당에 갑니다.

성탄 때 가는 이들을 그들의 단어로 나딸리니 Natalini (Christmas 신자)라 하고,

부활절에 가는 이들을 빠스꽐리니 Pasgualini (부활절 신자) 라고  별명이 붙었답니다.

그 외에 다른 교회의 신자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도...

 

이러한 인습적 종교인들을 보면 영감이 사라집니다. 맥도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속에 물들다 보면 나도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자책감에 사로 잡히기도 합니다.

 

이렇게 흔한 '종교 경험'은 지금 율님 (율리아나님)이나 저나 한 마당에 있습니다.

저 외에도 지금 독자 분들 중에도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것은 흔해 빠진 영화나 3류 소설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만 보고 지내도 한 평생이 모자랍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짧은 시간적 삶 안의 '선택'이자 '찾음' '두드림' 입니다. 

그러므로 율님이 지금 가지신 그 '순수성'으로 하고 싶은 신앙 생활,

아니 동경하면서 만나고 싶은 하느님, 하느님 체험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불씨'임을 확인드리고 싶습니다.

저에게도 이 '불씨'가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또 공감.

 

하느님 체험은 종교 이전의 것입니다.

종교는 하느님 체험의 2차적 산물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하느님 체험이 교신되고 모아지고 종합되고 체계화되어 

알려지고 전파되어 하느님과의 만남의 공동장소가 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렇게, 율님도 아시는 것이겠지만, 종교는 지성의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보통 생활에서 하는 경험들, - 친구의 죽음, 시한부 인생, 고통, 고뇌, 죽음... -  

이런 인간이 넘지 못할 '한계 상황'에 부딪치면 무슨 논리가 작용합니까? 

'절규'로 끝납니까?

무언가 '초월자'를 찾게되고 그리로 마음을 향하게 되고, 소망, 동경, 믿음이 자연스레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의 주인, 생명의 주재자로서 어떤 초월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게 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귀천', '감천'....)

니체 처럼 기막힌 지적 논리로 체험의 소리를 거스리는 어거지 논증을 해대기 전에는...   "신은 죽었다'고....

 

그러나 이렇게 찾게 되는 신은 어디까지나 '철학의 신'입니다. 

'나'와 '너'의 만남 속의 '대화자, '인격의 신', 신앙의 신이 아닙니다

 

'신앙의 하느님'도 그렇듯 우리 체험에 바탕을 둡니다.

 

아브라함과 하느님이 나누신 이야기, 지시,

야곱과 씨름하신 하느님, 불타는 가시 덤불에서 모세와 말씀하신 하느님,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느님...  

이렇게 하느님 편에서 먼저 인간에게 말을 건네오고 만남을 주시고,

만남의  현실체험으로 알게되는  하느님은

'계시의 하느님'이시자 인격신인 '신앙의 하느님'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옛 이야기 (구약) 속의 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물 '예수'라는 인간 체험에서 시작됩니다.

 

그분의 가르침, 감화, 기적의 힘... 보통 평범한 사람이 감화를 거부할 수 없는 거룩한 인간성 체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그의 죽음, 그러나 상상 밖의 부활... 

 

이러한 한 인물에 대한 체험은 또 한편의 다른 체험으로 연결이 되고 완성됩니다.

그 분의 가르침,  정체와 죽음의 의미와 부활... 인류의 시원과 완성의 종말... 의 자초지종을

깨닫게 해주는 영감을 불어넣는 신의 '체험' - 성령의 체험- ,

이러한 신의 체험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파된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이렇게 체험으로 얻어지고 이해하게된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체험들은 모두 '계시'하시는 하느님 편에서 솔선해서 주신 '만남'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 곧 '은혜'일 뿐입니다.

 

이 은혜는 많이 전달되었고 흔히 들을 수 있으니까 성당에 나가는 사람이면

저절로 자동적으로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백화점의 사은 경품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의 신앙은  공공연한 현상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이 일일이 대문을 두드리고 열어준 사람과 속삭임 한 마디라도

면접을 거친 사람에게만 내려진 은혜입니다.

인격의 신이 개인적으로 만나주시는 밀애의 경험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하느님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으면서도  아무나 만나보고 알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닌 비밀입니다.

아무리 찾아헤매도 그 분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못 보는 얼굴의 소유자입니다.

아무리 풀려고 노력해도 우리 노력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암호입니다.

해박한 철학자가 평생 파고든 사유로 암호해독에 실패하고 무신론에 이르는가 하면

문맹의 할망구가 단번에 해독을 하고 기막힌 지혜의 말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선택하시는 사람, 주선하시는 만남의 장소, 시간, 방법, 안내인...  은

모든 사람에게 유일하게 각각 건네지는 하느님의 비밀 (신비)일 뿐입니다. 

어떤이는 돌다리 건너, 어떤이는 여러 사람 통한 징검다리 건너,

어떤이는 숲속의 고요한 오솔길에서, 어떤이는 사람 북적대는 시장 한 가운데에서.... 

 

우리 마음 안 만남의 장소는 가장 그윽하고 은밀한 '비밀'의 방입니다.  

그 안에는 내가 가장 귀중히 여기는 보화가 든 창고가 있고,

깊숙히 감춰둔 검은 문서, 싸고 싸고 묻어 둔 부끄러운 뚱치들도 있는 비밀방입니다.

남이 넘겨볼 수도, 참견 할 수도 없는, 단 둘의 비밀 장소....

 

하느님을 만남은 참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한 눈에 반해서 따라 나서다 거울 처럼 마주 보는 미소를 받은 이가 있는가 하면,

오랜 짝사랑 끝에 응답을 받은 이, 중매로 만난 이, 차츰 사랑이 깊어진 이...

 

공통점은 '찾아야', 최소한,  만남의 염원이 있어야  만나진다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틴은 보통 속인으로 창녀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두었던 사람이지만

진리에 목말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의 응답으로 깊은 진리와 함께

신앙의 은혜가 내렸습니다. 교회의 대 학자요 목자로 큰 성인이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아빌라라는 곳에 데레사 수녀가 있었습니다. 수녀원 안에서 규칙과 전통 속에

평범한 인습의 수녀 생활을 해오던 그녀는 어느날 회심하여

대담한 신뢰심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느님  만남에 자신을 내던집니다. 

그분은 황홀경까지 들어가 하느님을 만났고 그 찾음의 길을 글로 써서 남겼습니다.  -영혼의 성 -

 

인습의 종교, 종교인에 거부감, 또는 아마도 환멸까지도 느끼시는 율님... 

 

인습에 젖어 살던 사람이 '초기화'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저도 종종 '초기화'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리고는 나 자신의 나약에 따른 습관화, 기계화..

그 속에서 마비되는 취각...   향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취각의 마비...  이런 것들을 '관용'하면서

남도 이해하고 종교인들도, 종교도 이해로 품고 살아갑니다.

 

요는 그 찾음, 그 동경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불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불씨는 천지창조, 태초로 부터 있었던 성령의 불꽃이 우리 영혼 안에 꺼지지 않고

자연스레 살아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찾음, 두드림에 사랑의 응답이 있기들 기원합니다. 

 

신앙은 '은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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