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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8일, 평양교구설정 80주년 기념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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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문화홍보국 [commu] 쪽지 캡슐

2007-03-14 ㅣ No.187

오는 18일, 평양교구설정 80주년 기념미사

20일까지 '자, 일어나 가자' 기념사진전도 열려



천주교 평양교구(平壤敎區)가 오는 3월17일(토) 교구 설정 80돌을 맞는다. 평양교구장 서리 정진석 추기경은 3월18일(일) 낮 12시 명동성당에서 교구설정 8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미사에는 함흥교구장 서리 장익 주교(춘천교구장,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평양교구장서리 대리 황인국 몬시뇰(평양교구 설정 80주년 준비위원회 위원장), 평양교구장서리 고문 함제도 신부(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와 사제단, 평양교구 서울·부산 신우회 신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교구 설정 80주년 준비위는 특히 이날 기념 미사에 80년 전 교구설정을 전후해 평안도 복음화에 기여한 파리외방전교회와 메리놀외방전교회, 메리놀 수녀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등 5개 선교 수도회를 초청해 기념패를 증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미국에서는 존 C. 시벌란(메리놀외방전교회 총장) 신부와 수잔 무어(메리놀수녀회 총장) 수녀가 방한해 미사에 참석한다.

오는 21일까지 명동 평화화랑(가톨릭회관 1층)에서 '자, 일어나 가자'를 주제로 기념사진전도 연다. 사진전에서는 6.25 이전까지 활발했던 평양교구민들의 신앙생활상과 현재 북한신자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기념 자료집 '천주교 평양교구'도 발간됐다. 평양교구 약사와 교구 본당 분포도, 역대 교구장, 교구 발자취, 교구 출신 성직자 등을 담았다.

정 추기경은 기념 자료집의 인사말을 통해

"평양·북한이라고 하면 일부 관련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평안도가 고향인 분들 중에도 혹독했던 공산치하에 몸서리치며 기억조차 하기 싫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를 재건하고 고통중에 있는 형제자매를 도와야 한다는 의식이 점차 흐려지고 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또한 "이번 80주년을 맞아 평양교구 신자들의 열성을 본받고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준비위는 교구 복음화에 크게 이바지한 메리놀회방전교회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평양교구 선교 감사비'를 제작, 미국 뉴욕주 어씨닝 메리놀회 본원에 설치키로 하고 빗돌 제작에 들어갔다.


평안남북도를 관할하는 평양교구는 1927년 3월17일 서울대목구(代牧區)에서 분리되어 평양지목구(知牧區)로 출발했다. 이후 1939년 7월 11일에 대목구로 승격,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면서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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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목구(代牧區) :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지역의 교구로서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 정식 명칭은 교황대리감목구(敎皇代理監牧區)이지만 일반적으로 대목구라고 하며, 이 교구의 장(長)을 대목(代牧) 또는 대목구장(代牧區長, 정식 명칭은 敎皇代理監牧區長)이라고 한다.

2) 지목구(知牧區) : 포교지 교구 또는 준교구의 하나로서 대목구보다는 규모가 작다. 지목구의 교세가 발전하면 대목구(代牧區)가 되며, 그 교세가 더 늘어나면 정식교구로 승격된다.

 


초대 지목구장(知牧區長)에는 메리놀외방전교회 번(Patrick J. Byrne, 한국명 方溢恩) 신부가 임명되어 1929년까지 사목했고 제 2대 평양 지목구장 목요안(John Edward Morris, 한국명 睦怡世, 메리놀외방전교회) 몬시뇰은 1932년 평양에 한국의 첫 방인(邦人)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창립해 선교사업에 동참하게 했다.

1942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주교(主敎)로 서품된 노기남 주교가 제 10대 서울 대목구장에 착좌(着座)하고 평양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교구 기초를 닦았던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1942년 태평양전쟁으로 강제추방됐다가 해방 이후 돌아왔으나 북녘 땅 공산화와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평양교구 두번째 한국인 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메리놀회 선교사, 한국인 사제단은 공산 정권에 납치 행방불명됐거나 월남했다.

평양교구는 1945년 해방 당시 관후리(館後里) 성당을 비롯한 본당 19곳, 공소(公所,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 106곳, 교육기관 22개, 복지기관 17곳을 운영했으며, 당시 신자수는 1만6400여 명이었다.

평양을 떠나 월남한 신자들은 1949년 11월 평양교구 신우회를 발족해 현재까지 서울과 부산에서 매월 정기 모임을 갖고 통일과 평양교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평양교구장 서리 정진석 추기경은 2004년 6월 평양교구 사제회의에서 황인국 몬시뇰을 평양교구장 대리로 임명했다. 정식으로 교구의 틀을 갖추고 동시에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북녘 교회의 재건을 준비하려는 의도였다.

윤공희 대주교(전 광주대교구장), 지학순 주교(전 원주교구장, 1993년 선종善終), 박정일 주교(전 마산교구장), 이기헌 주교(군종교구장), 황인국 몬시뇰(평양교구장서리 대리), 정의채 몬시뇰(서강대 석좌교수), 최창화 몬시뇰(특수사목담당 교구장대리) 등은 평양교구에서 남하했거나 남한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사제가 된 평양교구 출신 사제들이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 마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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