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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일기85/ 김강정 시몬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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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관 일기 85
오늘은 세례를 받은지 햇수로 꼭 17년째 되는 날입니다. 보통은 축일에 의미를 두고 살지만, 저는 세례일과 서품일에 더 의미를 둡니다. 이 두 기념일은 제 인생 최대의 날이며, 제게는 진짜 축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하루는 마음다짐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 꼽아보니, 햇수만도 이십여 년이 다 되어온 신앙살이....... 인생살이에 비하면 내세울 것도 없는 햇수지만, 제게는 소중한 세월이었고, 은총의 나날이었습니다.
한 여자애를 흠모하다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된 성당.... 그 아이의 환심을 얻기 위해 철모르고 받았던 세례..... 그러나, 그 아이는 시집을 가고, 저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웃음을 자아내는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웃지도 울지도 못할 아픔이요, 기쁨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아이에게 가졌던 호감, 그 첫 붙들림이 훗날 제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그 아이를 짝으로 삼으려다, 도리어 이 어른의 신부(新婦)가 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 세상은 우연을 믿는다고들 하지만, 저는 필연을 더 믿고 있습니다. 우연으로 여기는 일조차 실은 필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연으로 만난 여자 아이.... 우연으로 발을 들여놓은 성당.... 우연으로 받았던 세례...... 이 모두가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필연의 일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여자아이를 통해 저를 부르셨고, 결국 당신의 사제로 이끄셨다고 굳이 믿고 싶습니다. ........... 한번씩은 그 여자아이 생각도 나곤 합니다. 잘 살고는 있을까... 지금쯤 아이는 몇이나 뒀을까...라고. 괜한 죄 거리가 될까 싶어 서둘러 생각을 지워버리지만, 바로 그 첫사랑이 제 삶을 엮어준 은인이었음을 생각하니, 그이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 세례를 기념하는 이 조촐한 밤....... 죄가 아니라 하시면, 꼭 한번만 더 그 아이생각을 하겠습니다. 예쁘고, 상냥하고, 마음고운 아이.... 사랑한단 고백 한번 못해보고 남남이 되어버린 마음 속의 첫사랑. 마지막 만남에서, "왜 붙들지 않느냐" 던 그 한마디를 내내 마음 속에 붙들고 살았는데, 이제는 마음으로 그 아이를 마저 보내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세상 가장 순수한 영혼의 만남으로 접어 넣겠습니다. ........ "신부님, 첫사랑 얘기 좀 해주세요" 라며 팔을 붙들던 아이들에게, 첫 사랑이 없다고만 숨겨왔던 이 마음의 죄를 오늘에야 고백합니다. 혹여 제 첫사랑을 놀린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사랑은 참 아름다운 거라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더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자고도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저 역시, 더 많이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더이상 평범한 사랑은 못해줘도, 그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 숨겨온 비밀마저 다 털어놓고 나니, 제 삶이 더욱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 맑은 마음처럼, 내일에는 더 맑은 사랑을 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날이 첫사랑의 마음으로, 모든 이에게 첫 마음을 나눠드리겠습니다. ........... 언젠가, 당신의 세례기념일에도, 마음 속 첫사랑 얘기를 해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제 마음속을 행복으로 채워주실 당신의 이야기가 참 많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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