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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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혼을 가슴에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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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일수 [paulk] 쪽지 캡슐

1999-06-12 ㅣ No.416

인터넷 경향신문 5월30일자에서...가톨릭뉴스그룹에서 게재한것을 갈무리하여 다시 올립니다.

 

[MX]‘아름다운 영혼을 가슴에 묻습니다’  

『요한이 내품에  안긴 채 하늘나라로 갔다. 난 울지 않았다. 오늘 서로 이승과 저승에서 부활한

것이라고  믿으니까. 친척 한분이  시신기증이 웬말이냐며 걱정하셨다. 남편의 뜻이었노라고, 그 뜻을따를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24일 51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남편  한규동 요한. 하늘나라로 장기출장을 떠난

것이라고 위로해보지만 가슴이 아리다. 보고 싶을 때 찾아갈무덤조차 없는  처지.

육신은 아직 차가운시신 보관창고에 누워 있다.

  의대생들의 실습용으로 남편의 시신을 기증한 박정순씨(44). 세례명 데레사. 그녀는 지금까지 거의 매일 간절한 사랑의 기도가 담긴 편지를 쓰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그러나 눈물이흘러내려 펜을 멈추기 일쑤.

   한씨는 96년  11월 결혼 25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위암을 선고받았다. 이미  다른  장기로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 남편은 2년여의  투병생활을 정리하던 어느날 불쑥 시신기증 이야기를 꺼냈다.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언젠가 내가 장기기증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가 혼이 났다. 사랑하는 아내의 몸에  손을  댈 수없다고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요한이 시신기증을 이야기한다.  「나는 암에 정복되어 이승을 떠나지만 나를 통해 누군가가 암의 실체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98년 6월)

   평소 건강을 자신하던  요한. 아내  자랑한다고 항상 친구들에게 「팔불출」 소리를 듣던 남편.

박씨는 91년 아들 장우 베드로(27)가 신부의 길을 선택할 때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남편을 두번 죽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힘이 들었다. 그래도  결국 그러라고 했다.  그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돕고 싶다.  베드로와

안나(딸 각경·24)에게 이야기했더니 반대다.  베드로는  자신도그렇게 할 용기가 있으나 아버지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유언처럼 말했다. 「너도  곧 사제가 될 것인데  내 무덤은 너에게

폐가 될 뿐이다. 너는 모든 이의 사제이니 집과 가족에 얽매이지 말아라」.  나와 요한의 시신기증서는

안나에 의해 가톨릭 병원에 신청되었다』(98년 6월)

   두 사람은 71년 한국도로공사 원주지부에  함께 근무하면서 결혼했다. 남편은 모태신앙인이었던

데레사를 따라 80년 천주교에 귀의했다. 요한은 흐트러짐 없는 신앙생활을 해왔다. 저녁이면 성당의

봉사활동을 위해 바쁘게 쫓아다니는  아내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남편은 94년 강릉지사 근무를 끝으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일 잘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며 아직 한창인 나이에 미련없이 사표를  썼다. 퇴직

후에는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80%를 집사람에게 쏟고 20%로 세상을 사랑하려니 세상이 너무 좁다』고주위에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암투병과  함께  주변정리를 시작했다. 그는  사제의 길로 들어선

하나뿐인 아들, 결국  엄마품을 떠날 딸자식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려는  준비. 지난해 4월에는  경기 포천에 묻혀 계신 부모의 시신을 화장했다.

   『장례식이다. 성당문 밖에는 가톨릭병원 차가 대기할 뿐 장지는 없다. 아들 부제(사제 서품을 받기

직전)가 복음을 읽다  목이 멘다. 잠시 후 차는 나와 아들·딸을 남긴 채  요한만을  태우고 떠났다』

   강원 원주시 개운동 데레사의 집은 요한이 살던  때와  달리진게 아무것도  없다. 그가 즐겨입던

옷가지는 물론 사용하던 수첩까지 그대로  두었다.  데레사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고인의 영정 앞에두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린다.

   『육신이 죽어  함께 있지 못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요한이 나에게 남겨주고 간 무언가를 이젠 알

것 같아요.  그는  나에게 짧은 유언만 남기고 갔지만 나는 그 큰 뜻을 이해하니까요』

   요한은 「데레사는 대래사(大來使)의 하늘나라식 표현」이라고 가르쳐줬다. 이 땅의 큰 심부름꾼.

데레사는  이제 하늘의 심부름꾼으로만 살 작정이다. 서두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일 밤 기도로 요한과

나누는  대화는  이 땅에서 어떤 심부름을  했는지를 전해주는 것이다.

   『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몰인정한  걸까. 나는 남편의

죽음으로 다시 태어나고 철이 들었다. 젊은 의학도들이 기다리고 있는 나의 남편 요한. 신학교 가던

10여년전 이미 하느님께 돌려드린 베드로.  아직 학교를 다닌다지만 얼마 안있어 나의 품을 떠날 안나.

하지만 괜찮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야 할 때와,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 하느님과  남편에게감사하고 있으니까』(99년 4월)

   -[취재수첩]납골장례 보급으로 시신기증 늘어-

   우리나라 장례문화는  아직도 매장이 지배적이다. 유교적인 관습 때문에 대부분 시신기증을 꺼린다.

   80년대 말까지 의과대학의 실습용 시신은 행려병자 등을 상대로 대학측이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지금도 많은  대학병원들이 이같은 방법으로 시신을 구한다.

   가톨릭의대 교목실장  정동훈 신부(34)는  『우리는 예부터 망자의 육신에 다시  칼을 대는 것을

용납치 않았기 때문에 해부와 화장이  불가피한 시신기증을 꺼리고 있지만 최근  들어 점차 인식이바뀌면서 시신기증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대학병원중 시신기증이 가장 많은 가톨릭의대의 경우 지난 92년에는 단 2건에 불과했지만

95년 36건, 97년  41건에 이어  지난해에는 81건으로 늘어났다. 이는 90년대 초반  시작된 장기기증

운동으로 장기와  함께 시신기증에 대한 인식도 점차 바뀌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활발해진

납골장례 보급으로 시신기증은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시신기증 신청건수는 월 평균 100여건.

지난달에는  개그맨 김형곤씨가  시신기증을 약속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선진국에 비해서는 턱없이  낮은 수준. 장기기증의  경우에는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한마음한몸운동  본부」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나 시신기증운동 단체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MX]‘아름다운 영혼을 가슴에 묻습니다’  『요한이 내품에  안긴 채 하늘나라로 갔다. 난 울지 않았다. 오늘 서로 이승과 저승에서 부활한

것이라고  믿으니까. 친척 한분이  시신기증이 웬말이냐며 걱정하셨다. 남편의 뜻이었노라고, 그 뜻을따를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24일 51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남편  한규동 요한. 하늘나라로 장기출장을 떠난

것이라고 위로해보지만 가슴이 아리다. 보고 싶을 때 찾아갈무덤조차 없는  처지. 육신은 아직 차가운시신 보관창고에 누워 있다.

    의대생들의 실습용으로 남편의 시신을 기증한 박정순씨(44). 세례명 데레사. 그녀는 지금까지 거의

매일 간절한 사랑의 기도가 담긴 편지를 쓰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그러나 눈물이흘러내려 펜을 멈추기 일쑤.

   한씨는 96년  11월 결혼 25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위암을 선고받았다. 이미  다른  장기로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 남편은 2년여의  투병생활을 정리하던 어느날 불쑥 시신기증 이야기를 꺼냈다.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언젠가 내가 장기기증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가 혼이 났다. 사랑하는 아내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요한이 시신기증을 이야기한다.  「나는 암에 정복되어

이승을 떠나지만 나를 통해 누군가가 암의 실체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98년 6월)

   평소 건강을 자신하던  요한. 아내  자랑한다고 항상 친구들에게 「팔불출」 소리를 듣던 남편.

박씨는 91년 아들 장우 베드로(27)가 신부의 길을 선택할 때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남편을 두번 죽게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힘이 들었다. 그래도  결국 그러라고 했다.  그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돕고 싶다.  베드로와

안나(딸 각경·24)에게 이야기했더니 반대다.  베드로는  자신도그렇게 할 용기가 있으나 아버지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유언처럼 말했다. 「너도  곧 사제가 될 것인데  내 무덤은 너에게

폐가 될 뿐이다. 너는 모든 이의 사제이니 집과 가족에 얽매이지 말아라」.  나와 요한의 시신기증서는

안나에 의해 가톨릭 병원에 신청되었다』(98년 6월)

   두 사람은 71년 한국도로공사 원주지부에  함께 근무하면서 결혼했다. 남편은 모태신앙인이었던

데레사를 따라 80년 천주교에 귀의했다. 요한은 흐트러짐 없는 신앙생활을 해왔다. 저녁이면 성당의

봉사활동을 위해 바쁘게 쫓아다니는  아내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남편은 94년 강릉지사 근무를 끝으로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일 잘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며 아직 한창인 나이에 미련없이 사표를  썼다. 퇴직

후에는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80%를 집사람에게 쏟고 20%로 세상을 사랑하려니 세상이 너무 좁다』고주위에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암투병과  함께  주변정리를 시작했다. 그는  사제의 길로 들어선

하나뿐인 아들, 결국  엄마품을 떠날 딸자식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나려는  준비. 지난해 4월에는  경기 포천에 묻혀 계신 부모의 시신을 화장했다.

   『장례식이다. 성당문 밖에는 가톨릭병원 차가 대기할 뿐 장지는 없다. 아들 부제(사제 서품을 받기

직전)가 복음을 읽다  목이 멘다. 잠시 후 차는 나와 아들·딸을 남긴 채  요한만을  태우고 떠났다』

   강원 원주시 개운동 데레사의 집은 요한이 살던  때와  달리진게 아무것도  없다. 그가 즐겨입던

옷가지는 물론 사용하던 수첩까지 그대로  두었다.  데레사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고인의 영정 앞에두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린다.

   『육신이 죽어  함께 있지 못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요한이 나에게 남겨주고 간 무언가를 이젠 알

것 같아요.  그는  나에게 짧은 유언만 남기고 갔지만 나는 그 큰 뜻을 이해하니까요』

   요한은 「데레사는 대래사(大來使)의 하늘나라식 표현」이라고 가르쳐줬다. 이 땅의 큰 심부름꾼.

데레사는  이제 하늘의 심부름꾼으로만 살 작정이다. 서두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일 밤 기도로 요한과

나누는  대화는  이 땅에서 어떤 심부름을  했는지를 전해주는 것이다.

   『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몰인정한  걸까. 나는 남편의

죽음으로 다시 태어나고 철이 들었다. 젊은 의학도들이 기다리고 있는 나의 남편 요한. 신학교 가던

10여년전 이미 하느님께 돌려드린 베드로.  아직 학교를 다닌다지만 얼마 안있어 나의 품을 떠날 안나.

하지만 괜찮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야 할 때와,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 하느님과  남편에게감사하고 있으니까』(99년 4월)

 

 

 

 

 

 

 

 

 

 

 

 

   -[취재수첩]납골장례 보급으로 시신기증 늘어-

   우리나라 장례문화는  아직도 매장이 지배적이다. 유교적인 관습 때문에 대부분 시신기증을 꺼린다.

   80년대 말까지 의과대학의 실습용 시신은 행려병자 등을 상대로 대학측이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지금도 많은  대학병원들이 이같은 방법으로 시신을 구한다.

   가톨릭의대 교목실장  정동훈 신부(34)는  『우리는 예부터 망자의 육신에 다시  칼을 대는 것을

용납치 않았기 때문에 해부와 화장이  불가피한 시신기증을 꺼리고 있지만 최근  들어 점차 인식이바뀌면서 시신기증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대학병원중 시신기증이 가장 많은 가톨릭의대의 경우 지난 92년에는 단 2건에 불과했지만

95년 36건, 97년  41건에 이어  지난해에는 81건으로 늘어났다. 이는 90년대 초반  시작된 장기기증

운동으로 장기와  함께 시신기증에 대한 인식도 점차 바뀌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활발해진

납골장례 보급으로 시신기증은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시신기증 신청건수는 월 평균 100여건.

지난달에는  개그맨 김형곤씨가  시신기증을 약속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선진국에 비해서는 턱없이  낮은 수준. 장기기증의  경우에는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한마음한몸운동  본부」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나 시신기증운동 단체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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