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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의 풍물풍속사(22)/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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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세자요한 신부 [john1004] 쪽지 캡슐

1999-06-09 ㅣ No.118

 

■20세기 한국의 풍물풍속사(22)/말

사바사바 빽 카더라… “우째 이런 말이”

70년대 '복부인'유행…80,90년대 "믿어주세요" "돈세탁"히트

 무수한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혼란에 변하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매일 제 뜻을 실어 펴기 위해 써야 하는 말도 시대의 충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외세의 힘에 휘둘리며 20세기를 열고 반세기 가까이 강압적인 외국어의 지배를 받은 우리는 사회적 격변이 어떻게 말을 파괴하는지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확실한 연구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새로운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개화기 무렵 새로운 말이 홍수를 이뤘다. 우리나라 최 초로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실시한 독립신문(1896년)을 살펴보면, 외국의 문물을 소개하 는 과정에서 유입된 신어들이 수없이 발견된다. 양산 석유 시계 같은 한자어들이나 박테 리아 고릴라 알코올 등은 이전까지 없던 말들. 정치 경제 과학 문화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유입된 한자 신어의 대부분은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되거나 조어된 것들이었다.

 

새로운 말의 유입은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되면서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별안간 일 어가 공용어로 선포되면서 졸지에 이를 모르고는 생활 자체가 거북해지고 만 것이다. 모 든 관공서의 문서는 일어로 제작됐고, 민중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어로 재판을 받아야 했다.

 

50년대 전쟁용어, 60년대 '민생고'널리 퍼져

 

1911년 공포된 조선교육령은 교육목표를 덕성 함양과 함께 '국어의 보급'에 힘써 제국 신민 다운 자질과 품성을 갖추도록 하는데 있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같은 일어보급 정책은 시 간이 갈수록 노골적인 강제사항으로 변했고, 이에 따라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닌 또다른 억압의 수단이 돼버렸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개정된 조선교육령은 고등보통학교의 필수과목이던 조선어를 선 택과목으로 만들어버렸다. 또 2차대전이 막판으로 치닫던 43년에는 대대적인 '국어보급운 동'이 벌어져 관청의 전화는 '국어'가 아니면 일체 받지 않았을 정도. 창씨개명이나 학교에 서 일본어 수업이 강요된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식민지에서 먼저 지배언어를 습득한 사회 상층부는 자연 스럽게 모국어인 피지배언어를 포기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한다. 일제통치 35년의 세월 속에 무식쟁이보다 제법 행세하던 이들이 오히려 우리말을 소홀히 했던 것은 해방 후인 46년2월 한달간 판검사들이 토요일마다 한글공부를 해야 했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군사력에 힘입어 맞은 해방. 그러나 일본어의 잔재를 그대로 쌓아둔 채 이번엔 영 어를 '해방군의 언어'로 맞아들인 터라 순수 우리말의 복원은 쉽지 않았다. 우리 국어를 가르치지 않던 일제 시기에도 영어는 가르쳤고, 또 37년 발간된 '모던조선외래어사전'에 약 1만3000개의 서구 단어 가운데 9할을 영어가 차지했으니 영어가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 었다.

 

그러나 '통역관 정치'란 말이 있었듯이 군정시대 들어 영어의 중요성은 이전보다 한 층 강화됐다. '럭키 서울' '슈샤인 보이' 등 영어와 우리말이 뒤섞인 유행가 가사가 쏟아 져 나온 것도 이같은 사회 분위기의 일단.

 

이 시기 이후 우리말의 변천을 살피는 한 방법으로 시대를 반영하는 당대의 유행어를 더 듬는다면, 첫 페이지는 '소련놈에 속지 말고 미국놈 믿지 마라. 일본놈 일어난다'가 장식 한다. 이 절묘한 운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동족상잔이 일어나자 50년대 초반에는 '불법 남침' '양민학살' '인해전술' 같은 전쟁 관련 유행어가 풍미했다. 또 미군의 주둔이 이뤄지 면서 '양공주'니 '똥갈보'니 하는 새로운 단어도 생겼다.

 

말의 오염은 말도 안되는 세상 탓

 

거리에는 밀수로 한몫잡아 양복에 중절모를 쓴 '마카오 신사'들이 활개를 쳤고 모든 조직 에는 '프락치'가 설쳤다. 가짜 이승만 아들이 '귀하신 몸' 행세를 하며 전국을 휘젓고 대통 령의 방귀소리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지당하십니다'를 떠드는 아첨꾼들이 즐비했으니 '사바사바'와 '와이로' 없이는 일이 될 까닭이 없었다. 사회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죽을 때도 '빽'을 외친다는 그 시절, '억울하 면 출세하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해방 이후, 특히 60년대 이후 우리의 언어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미디어, 특히 전파매체다. 지방마다 독특한 억양을 지닌 사투리가 엷어지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 는 현대 서울말'로 변한 것 역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힘.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된 5·16 쿠데타의 '혁명공약'이 나간 이후 여기에 포함된 '구악 일소' '민생고', 또 박정희대통령이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재건' '조국근대화' 등이 유행 했다. 63년 2월25일 4대 의혹사건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 외유길에 오르면서 남긴 '자의반 타의반'은 곤란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지금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말.

 

'하면 된다' 구호 속에 '공순이' '공돌이'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70년대 경제성장의 과실 을 딴 '복부인' '골부인'들은 '마담뚜'의 역할로 혼벌을 만들며 그들만의 잔치에 탐닉했 다.

 

70년대 가장 많은 말을 만들어낸 사건은 '유신의 심장'이 '난 괜찮아' 한마디를 남기고 떠난 10·26. '한다면 합니다' '버러지 같은 놈' '똑똑한 놈 세놈만 보내' 등 '그때 그사 람'들 사이에서 오간 말들은 한동안 술자리와 대학입시 격려문에 패러디돼 회자됐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사람들은 함부로 입을 열수 없었다. 이름하여 '실어증의 시대'. 막 시 작된 컬러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시간만 되면 '땡전뉴스'를 틀었다. 말이 막힌 시중에 난무 한 것은 '유비통신'과 '카더라방송'. 82년 터진 이철희 장영자 사건으로 '큰손'이란 단어 가 등장한 뒤 TV 드라마를 통해 유행어가 된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는 시대를 꼭 집어낸 말. 이 시기를 산 사람들은 모두 '지구를 떠나'고 싶었다. '프락치'와 '백골단'과 '꽃병'을 들고 일전을 불사하던 학생들은 '닭차'에 실려가기를 반복했다.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발표로 촉발된 거센 국민적 저항 이후, '이 사람 믿어주세 요'를 연발한 '보통 사람'이 당선된 뒤 열린 5공청문회는 실없는 말의 성찬을 뿌렸다. '기 억나지 않는다' '모른다'더니 '내가 입을 열면 여러 사람 다친다'며 협박을 일삼던 '전 직'은 백담사로 떠난 뒤 '손볼 사람 여럿'에 이를 갈았다.

 

이어 '신한국' 창건을 내건 김영삼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은돈' '돈세탁' 같은 단어가 '개혁'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세계화'를 부르짖는 사이, '소통령'의 전횡에 나라가 골병을 앓고 육-해-공에서 두루 대형사고가 계속되자 사람들은 모두 '우째 이런 일이'를 연발했다.

 

세상을 희화화하는 은어와 조어가 방송에 난무하고 외국어의 사용이 빈번하다며 한때 정 권 차원에서 대대적인 '국어순화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실효를 거두 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46년 군정청 문교부가 한글 반포 500돌을 맞아 실시한 '우 리말 도로찾기 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말이 거칠어지고 오염된 것이 어느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말도 안되는' 세상의 반영임을 우리는 잘 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 말을 아끼고 제대로 가꾸는 첫 길은 말 깨나 하는, 그러나 그 말을 '부패의 은폐막'으로 활용할 뿐인 사람들부터 청소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이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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