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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사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가 / 영혼의 불멸 [연옥 실화/ 막심 퓌상 지음/ 가톨릭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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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실화
서론 – 내세 來世 는 있나 없나 4. 사후 死後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가 어떤 이는 사람이 죽으면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오만한 사람이 아니면 품행이 나쁜 사람이다. 그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기운을 내려고 목이 터져라 소리질러 스스로를 속이는 겁쟁이와 같은 자이다. 유명한 사상가 라 브뤼에르는 말했다. “절제하고 청정하며, 정직하고 자비로웠던 사람이 내세가 없다고 선언한다면 그 주장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귀한 사람은 개벽 이래 아직 볼 수 없었다. 또 세상 마칠 때까지도 볼 수 없으리라고 단언한다.”
5. 영혼의 불멸 (1) 물질은 불멸이다. 사람의 몸은 썩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원소 元素로 돌아갈 뿐이다. 영혼은 육신보다 존귀하고 아름답다. 노예인 육체가 없어지지 않는데, 주인인 영혼이 없어져 버린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는 하느님의 예지 叡智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2) 현세에서는 악인이 번성하고 선인은 박해를 받는다. 장 자크 루소는 말했다. “현세에서 악인이 잘 살고 선인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질서 있게 돌아가는 삼라만상 가운데서 이 명백한 모순을 해결하기에는 내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무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던 볼테르도 말한다. “선과 악이 내세에서 그 응보 應報를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영혼이 없어져 버린다고 하면 이 세상은 무서운 혼란에 빠진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간난신고(艱難辛苦:몹시 힘들고 어려우며 고생스러움) 중에 일생을 마친 자도, 부정과 방탕 속에서 한 평생을 보낸 자와 마찬가지다. 싸움터에서 쓰러진 용사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의 구별이 없어진다. 상식을 갖춘 사람 중에 이것에 승복할 자 있겠는가. 혁명 때, 리용 시의 재판관이 한 신부에게 물었다. “그대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가?” 신부는 “당신들의 행동을 보고 어찌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있겠소. 나는 설령 이때까지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확신한다고 단언하오.” 라고 말했다. 영혼의 불멸을 부인하는 것은 도덕의 모든 토대를 파괴하고 또한 하느님의 공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빅토르 유고는 “학교 하나를 늘리면 형무소 하나를 줄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물질적 문명만을 채용한 사회에서는 정반대이다. 왜?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인간이 만든 도덕은 범죄를 줄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을 제 될 대로 내버려 두신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샤토브리앙은 말했다. “풀 한줌은 양에게 만족을 주고, 몇 잔의 피는 호랑이를 배부르게 한다. 그런데도 인간만은 만족하지 못한다”라고. 모든 사람은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밑 없는 그릇처럼 만족될 때가 없다. 사람은 지식을 구한다. 그러나 이것도 만족이 안 된다. 파스칼은 말했다. “첫째가는 학자는 위대한 무식꾼이다.” 저명한 설교가 보쉬에 주교는 말했다. “우리는 아무리 작은 일에 대해서라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뉴턴은 말한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도 같다. 어떤 때는 반짝거리는 조약돌을 줍고, 어떤 때는 진귀한 조개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럴 동안에 아직 탐험하지 않은 ‘진리의 대해 大海’는 항상 눈앞에 가로놓여 있다.” 천문학자 프랑 마이롱은 말한다. “전세계에 있는 모든 학문은 모두가 한없는 무식을 나타내고 있다. 진실, 정밀, 완전한 것은 하나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한 가지 권리 외에는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것은 곧 ‘겸손’이다. 우리는 ‘무지 無知’에 싸여 있고 또한 그 속에 잠겨 살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즉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만족할 줄 모른다. 솔로몬 왕도 그 영화 끝에는 “아아,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부르짖었다. 여기 부모 자녀가 다 함께 재미있게 살고 있는 한 가족이 있다. 그러나 “즐거움도 멀지 않아 끝난다.”라는 생각만으로도 모든 즐거움을 지워 버리기에 넉넉하다. 복숭아나 사과나, 어떤 과일을 짜서 그 속의 맛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짜내듯 만물 중의 즐거움이나 아름다움을 죄다 짜내어 맛본다 하자. 그래도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즐거움은 숲 속의 꾀꼬리처럼, 가만가만히 발소리를 죽여 붙잡으려고 하지만 언제나 달아나 버린다. 사람의 마음은 세계보다도 더 넓다. 창조된 만물은 이를 만족시킬 수 없다. 온갖 쾌락, 재산, 명예 같은 것은 사람 마음속에 있는 고상한 소망을 채우기에는 나무나 보잘것없다. 죽음의 캄캄한 터널은 인간의 영원한 희망을 방해한다. 사람은 무한의 품속에 들어가서 비로소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터널 저 편의 이 순수하고 무한한 복락을 가르치는 자는 다만 ‘그리스도교’ 뿐이다. (4) 어떤 인종이든지 모두 영혼 불멸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파스칼은 말한다. “영혼의 불멸은 우리와 얼마나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인가. 거기에 대하여 무관심한 자는 참으로 미욱한 자이다. 내세가 있나 없나, 또 영원한 행복을 희망하는가 안 하는가로써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상은 달라진다. 이것을 눈앞에 두지 않는다면 도리와 상식에 맞는 행위는 여간 해서 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를 믿어서 만일 내세가 없다면 그것은 별로 손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내세가 있다면 어떨까. 대단한 이익이 아닌가. 이와 반대로 만일 그때,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더라면 실로 기울 수 없는 큰 손해다.” 성서에도 영혼의 불멸을 가르치고 있는 구절은 퍽 많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 10, 28).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루카 12, 33).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마태 23, 34. 41).
6. 잠깐만 기다리시오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생긴 일이다. 때는 밤 8시경, 어떤 순회 극단의 천막은 만원이었다. 연제 演題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주인공이란 자가 아주 고약한 놈이어서, 보호해야 할 고아를 속여서 부자가 되고, 음모와 부정으로 남의 존경을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제2막 중간쯤에서 한 구경꾼이 참다못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먹을 휘두르며 그 자를 향해 소리쳤다. “이 악한아, 너는 편히 살며 남의 존경을 받고 훈장까지 타고 있지만…. 높은 기둥에 목이 매달릴 가치밖에 없는 나쁜 놈이다!” 배우는 이 난데없는 고함 소리에 놀라 중지하였다. 구경꾼들은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웃고, 어떤 이는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혼잡을 가라앉히기 위해 극단 대표가 무대 위로 나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증 可憎할 나쁜 놈에 대하여 손님 한 분께서 격분하시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감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큰소리로 호통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제3막에서 정의 正義의 보답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일이 있은 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는 무덤에 한 쪽 발을 들이밀고 있는 늙은이다. 내 일생 동안에 악인과 무종교자가 성하는 것을 보고 걸려 넘어질 뻔할 때는, 항상 이 구경 중에 일어났던 일을 상기한다. 현세에서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한때만의 일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선이 승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제3막까지 기다려라. 그때는 각자에게 상응 相應한 갚음을 받을 것이다. 연옥 실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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