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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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_< 사랑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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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17 ㅣ No.172484

오늘 복음은 사랑 고백에 관한 요한복음의 아주 유명한 부분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세 차례 물음에 베드로가 응답하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미사 초입의 입당송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라고 문을 열고 있네요. 복음에 나올 베드로의 사랑 고백보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먼저임을 일깨우며 미사를 시작하는 듯합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사랑에 들어가기 전에 제1독서를 먼저 흝어봅니다. 카이사리아의 신임 총독 페스투스의 눈에 비친 사도 바오로 관련 이야기로 그의 말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사도 25,19)

제3자의 눈에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열정의 사도 바오로의 문제가 딱 그 정도입니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고 냉랭하기까지 한 그의 보고에는 온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떤 온기도 물기도 배제된 견해일 뿐이지요. 누구라도 아직 하느님과,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라면 페스투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분명 다르게 이 사안을 보고 또 서술했겠지요.

복음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독서의 그것과 매우 다릅니다. 밤새 헛그물질로 지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음식으로 아침을 막 들고 나서의 대화이니 이미 애정과 충만한 만족감, 감사가 넘치는 중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세 번의 물음이 예수님을 세 차례 부인한 베드로의 과오를 기워갚도록 하신 배려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이 베드로의 미안함과 죄의식을 치유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그리 하시고도 남으실 분입니다. 추궁이나 보속의 부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의도일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단순하고 담백한 질문에 비해 베드로의 대답은 좀 복잡합니다. 그냥, "예, 사랑합니다 주님!" 하면 좋겠는데 자꾸 앞뒤로 부연 내용이 붙습니다. 당신이 이미 아시지 않느냐며 길어지는 대답은 즉각적인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 자칫 말대꾸 같이 느껴질 위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다"라는 동사보다 "알다"라는 동사에 더 강세가 부여되어 힘도 좀 빠집니다. 또 "사랑하느냐"(love)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좋아한다"(like)로만 응답을 합니다. 두번째도 똑같이 응답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강도를 낮추어 "좋아하니"(like)로 물으시어 베드로의 자신없는 사랑고백의 눈높이에 맞추어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왜 그렇게 자신 없어 했는지 영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죄 중에 있을 때, 주님 앞에 서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느낄 때, 죄의식과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를 때, 원죄 이후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 눈을 피해 공간적으로 숨지는 못하지만, 변명과 딴청과 실없는 말로 숨어

버린 경험이 있다면, 즉답을 피해 빙빙 말을 돌려본 적이 있다면 지금 베드로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겁니다. 그래서 더 짜안~ 하고요. 하지만 사랑 여부를 묻는 이들 사이에는 적어도 온도가 있습니다. 관계가 있고 연대가 있지요. 이미 유형 무형으로 맺어진 끈끈한 결속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3자나 관람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이라면 상대의 사랑스런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올 때까지의 몇 초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답답하고 긴장되는 초조한 순간인지를 잘 알 겁니다. 사랑을 묻는 이의 진심에는 기대가 묻어 있고,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구걸에 가까운 바람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으시는 이 순간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사랑을 기대하고 청하고 더 나아가 구걸하기까지 하는 어마어마한 순간입니다. 구약의 역사 내내 당신과의 사랑에서 등을 돌린 이스라엘로 인해 상처받고 분노하다가, 사랑이라는 본성 상 제풀에 꺾여 다시 그들을 품어 주셨던 하느님께서, 백성을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된 당신 아들의 입을 빌어, 특별히 믿고 아꼈지만 당신을 부인했던 수석 제자에게 다시 겸손히 사랑을 물으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따사롭고 감미로운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세 번 "사랑"을 물으시고, 세 번 어징쩡한 "응답"을 들으시고, 세 번 "양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사랑이 당신 양들을 위한 사랑으로 옮아가야 함을,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가 양들과의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랑은 멈춤 없이 고이지 않게 흘러야 하고 번져나가야 하니까요.

"나를 따라라."(요한 21,19)
이처럼 완전의 숫자 3만큼의 횟수로 세 차례씩 질문과 응답과 당부가 오고간 뒤 비로소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베드로에게 부여될 "직무"에서 베드로 "개인"에게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내가 맡기는 내 양들을 잘 돌봐 달라는 부탁, 당부 명령에는 사명과 책임이 깔리기 마련이라,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칫 상대방 인격과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옅어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가서야 "따름"을 언급하신 건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서 그랬을 겁니다. 질문과 응답과 당부를 거친 뒤에 비로소 깨우칠 수 있는 본질이 담겨 있기에 그럴 겁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예수님의 시선은 "양"에서 "베드로"의 인격으로 옮아갑니다. 주님과 그는 "나"와 "너", 즉 "I"와 "You"의 관계로 마주하며, 진정한 관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도직 현장, 사목 현장, 봉사 현장에서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위해 정신없이 헌신하며 주님의 당부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이 중요하고 양들의 안위가 우선이어도 주님 앞에 머무르며 "나"와 "너"의 관계로 마주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양들과 일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는 단계로 그쳐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눈부신 성과와 양들의 칭송이 쏟아져도 여기까지는 아직 미완의 단계일 뿐,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 이상의 차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을 다 내려놓고 사랑으로 주님 앞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전부 바쳐드리는 자기 증여와, 앞서 가신 그분의 운명을 나도 받아들이겠다는 수용과, 나를 비워낸 자리에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분을 담겠다는 자기 비움의 과정입니다. 그분을 따르면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 안에 담고 물들어 갑니다. 결국 그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사랑 질문과, 부족한 응답과, 주님의 당부를 거쳐 따름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따름은 추종과 닮음과 동일화로 이어지는 신비의 길입니다. 일치의 여정이지요. 우리 꼴을 다 아시고도 사랑을 구걸하시고 따름이라는 곁자리를 내주시는 주님께 빙 돌리지 말고 주저없이 사랑을 외쳐 고백하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 사랑이 비록 아가페적인 사랑이 못되고 "당신이 참 좋아요"라는 우정의 고백이어도 상관 없으니까요.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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