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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신자들이 내 행실은 본받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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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관 [gabie] 쪽지 캡슐

2002-11-03 ㅣ No.42522

年中 第 31 主日

(2002. 11. 3.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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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본당 성당에서 토요일(11월2일) 저녁 토요특전미사 후에 작은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그 음악회 관계로 토요특전미사에 저의 이번주일 미사강론 원고를 가지고 강론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번 주일미사의 복음성서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저에게는 저 자신에 대한 뼈아픈 말씀으로 가슴에 콕콕 박히는 말씀이기에 당혹스럽고, 그래서 이 복음 말씀으로는 제가 강론할 자신이 없어서 회설수설 변명처럼 강론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변명이 아래와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심정을 아래와 같이 어설프게나마 여기에 적어봅니다.

 

이러한 변명을 여기에 적어보는 심정은 이즈음 자유게시판에서 논쟁의 관건이 되고 있는 사태와 맞닫는 심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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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노릇하며 갖는 자괴감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심한 당혹감에 빠집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다인들의 지도자였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지목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그 말씀이 어쩌면 이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이나 저 같은 사제에게도 해당되는 말씀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이 말씀을 이 시대에 맞춰서 "그들"이라는 지칭만 "사제들"이라는 지칭으로 바꾸어 옮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옮겨서 오늘의 그 성서 구절을 읽어봅니다. "사제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사제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사제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육성으로가 아니라 신자들의 음성으로 그와 비슷한 말을 가끔 듣습니다. "우리가 사제들을 보고 성당 다니나 뭐? 하느님 보고 다니지! 사제들이 하는 말이야 들어야지…! 허지만 사제들은 말만하지, 우리가 뭐 본받을 게 있어야지!"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신자들을 저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그런 말을 다른 신부님을 두고 하는 게 아니라 저를 직접 지목해서 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제인 저에게서 실망을 느끼고 하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신자들이 내 행실은 본받지 않네!" 하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제가 그런 말을 듣게 된 까닭은 대개 저의 성격 노출 때문이었습니다. 화를 잘 내는 성격 때문에 그런 말을 여러 번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화를 내는 경우란 무슨 말을 반복해서 해야할 때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알아들을 만큼 설명하였는데도 계속적으로 이해를 못하고 엉뚱한 이유로써 반복적으로 같은 설명을 하게 하는 신자 분들에게 저 자신의 성격을 제어하지 못하여 저의 말소리가 커지게 됩니다. 그러면 신자 분이 하는 말씀이 "신부님은 예수님 말씀으로 사랑 사랑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화를 내세요? 그런 식으로 화내시면 무서워서 어찌 성당 다니겠소? 허긴 신부님 보고 성당 다니는 게 아니고 하느님 보고 다니는 거니까…!" 하면서 돌아서 버립니다. 그런 신자 분의 말을 듣고 나서 저 혼자 며칠 간이고 마음 괴로웠던 적이 많습니다.

"신부 보고 성당 다니는 게 아니고 하느님 보고 성당 다니는 것이지…!" 하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란 사제로서 쥐구멍이 없어서 숨을 데가 없는 심정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저를 대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란다."(마태 23, 4∼7에서 발췌) 이 말씀은 제가 사제로서 신자들에게 봉사를 요청하기만 하고 제가 스스로 땀 흘리는 일은 없으면서 대우받기만 하는 모습을 지적하신 말씀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서로 형제들일 뿐임을 명심해서 스승 또는 아버지나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마라고 하십니다(마태 23, 8∼10 참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저 같은 사제는 신자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서기만 하고 실제로 ’아버지’라는 뜻의 ’신부(Father)’라고 불리면서 지도자 행세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저 같은 사제의 가슴을 콕콕 찌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이 예수님 말씀은 당시 유다교의 구조적 모순과 그 지도자들의 위선적 명분주의를 그리스도 신자들이 본받지 말라는 취지의 말씀입니다만, 오늘날에도 교회 제도의 경직성이나 성직자들의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경종을 울리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저 자신을 두고 지적하였듯이 사제인 저에게서 마음 상한 신자 분들이 느끼는 거부감이 혹여 제가 권위주의자로 비쳐진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사안에 대한 저의 설명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 분에게 제가 끝까지 참아야 할 일인데도 그러하지 못한 것이 탓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신자 분은 자기 개인 사정을 들어서 교회 공동체의 공식적인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분의 처지에서는 자신의 개인 사정을 교회가 이해하여 주지 못한다는 원망을 지니기도 합니다.

지난 금요일(11월1일)의 일입니다. 제가 저녁밥을 지어 혼자 먹고 있는 시간이었는데 공소회장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날인 ’위령의 날(어제 11월2일)’ 낮에 어느 분(근자에 돌아가신 분)의 개인 묘소에 와서 미사를 봉헌해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난주일(10월27일) 미사 후에 제가 위령의 날 묘지에 가서 기도하고 미사 봉헌을 하는 우리 교회의 관습에 따라 신자 가정의 선산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싶은 분이 계시면 본당의 아침 6시 미사 외에 낮 시간대의 묘지 미사를 봉헌해드릴 수 있다고 말씀드리면서 그런 미사를 원하시는 가정 없으시냐고 공개 질문을 하였지요. 그러나 원하시는 분이 아무도 계시지 않았지요. 그래서 오전 11시에 묘지 미사 대신 본당에서 또 한번의 미사를 모든 연령 위한 지향으로 봉헌하자고 말씀 드렸습니다. 헌데 공소회장님께서는 미리(지난 주일에) 신청하진 않았어도 지금 그 가족들이 원하므로 낮에 묘지 미사 봉헌을 하도록 하자고 계속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오전 11시의 본당 미사를 공적으로 약속한 것은 어찌하라는 말씀이냐고 제가 반문했지만, 회장님께서는 그 가족이 묘지에서 미사 후 점심 식사를 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 하려면 지난 주일에 제가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을 때 말씀을 하셨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저에게 회장님께서는 그래도 다른 시간에라도 묘지 미사를 하자는 주장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저는 11월2일의 본당 행사(음악회 등)를 위한 일정 때문에 그리 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설명을 드리는데, 그러한 설명을 일일이 늘어놓기가 참으로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리 하다 보니 전화 상으로 음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결국 공소회장님의 마음이 언짢아지셨고 저는 저대로 그 개인 묘소의 미사를 갑자기 신청한 분의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하나의 예입니다만, 제가 사제 생활을 하면서 그와 비슷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은 제가 수행해야 할 공적 행위와 신자 개인적 요구가 상충되는 경우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피치 못하게도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섭섭한 얼굴로 돌아서는 신자 분은 그 나름으로 속이 상하게 되고 저는 저대로 곤혹스런 마음으로 괴로워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런 마음 아픔 가운데 저 자신을 탓하기도 합니다. 내가 현명치 못하구나 하는 이율배반적 자책인 것입니다. 공인으로서의 처신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자문으로 혼자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신자 개인적 요구에 다 부응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지 못한 후회인 것이지요.

그러한 자책과 후회는 사실상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사제의 삶이란 늘 봉사의 소임이라고 자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자신의 위치가 공적인 것임을 인식하게 될 때는 교회 제도나 공동체의 구조 때문에 신자 한 분 한 분에 대한 봉사적 자세를 취하기엔 너무나 큰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 한계선 안에 안주하고 공인으로서의 처신에만 익숙하다 보면 결국 경직된 권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권위주의로만 사람을 대하는 사제로 비쳐질 때 신자들께서는 실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보고 신앙 생활하지, 뭐 신부 보고 신앙생활하나…!" 하는 신자들의 실망 어린 자조의 말을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혹 제가 사제로서 그렇게 당혹스런 말을 듣게 될 때마다 그런 말을 하는 신자 분께 사실은 저의 한계를 이해하여 달라는 간청을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저도 몸이 하나 뿐이지 않습니까? 몸을 칼로 쪼개서 양쪽에 쓰지 않고서야 어떻게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사람이지 않습니까? 같은 말로 계속 반복해서 대답해야 한다면 어찌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극단적 표현을 써서 말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저 자신도 오래도록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마음이 아픈 그 사실이 이율배반적입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축성하는 기도가 그 이율배반적인 저의 처지를 가슴 저미며 반성하라고 강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그 메시지란 "빵을 쪼개어" 건네주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저의 입으로 발설하라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쪼개어 내어주는 처지가 아니고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가 저 자신 아닌가 하는 반성인 것입니다. 그런 반성이라면 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개인 사정만 주장하는 신자들을 원망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지난 금요일 저녁에 저에게 전화를 거셨던 공소회장님께서 언성 높아진 저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이 못내 저의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게 많은 저희들을 신부님이 가르쳐주셔야지요!" 이렇게 말씀하시고 전화를 끊으신 공소회장님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복음서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 10∼40)

그렇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아 아는 게 낮은 신자들에게 내가 지식이 높다고 나서야 할 지도자가 아니라, 그 아는 게 낮은 신자들의 모르는 처지까지 나를 낮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반성하면서 그야말로 신자들의 눈높이로 내려가는 사제이도록 부단히 저 자신을 깎아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봉사’ 개념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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