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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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유다 이스가리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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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송 [hsson] 쪽지 캡슐

2002-03-29 ㅣ No.31509

   성 금요일,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주님의 수난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바로 우리 자신, 내 자신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배반한 가리옷 사람도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의 하나였지요. 그런데 유다는 왜 자신의 스승을 배반했을까요? 요한 복음에서 유다는 돈주머니를 맡아 관리하는 제자로서(요한 13,29) 돈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소개됩니다(요한 12,6). 여기에 근거를 두고서 유다가 돈 때문에 스승을 배반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런 추측이 그리 정확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합니다. 유다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찾아가서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고 자신이 받았던 은전 삼십 냥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니,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하자 유다는 그 돈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습니다(마태 27,4-5). 이런 점을 볼 때 유다가 단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 같지는 않고 보다 큰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다 역시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현세적 메시아로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언젠가는 식민통치 하에서 신음하는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서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절처럼 강대한 나라로 만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예수님과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이런 기대는 어긋났지요. 유다의 기대오아는 달리 그분은 원수에 대한 증오와 투쟁 대신 사랑을, 죄인의 처벌이 아니라 용서를 가르치시고 실천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말 자신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고, 심지어 그분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열 두 제자를 대표해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요한 6,68-69). 그러나 유다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그래도 그분을 믿고 따릅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내 현세적 메시아관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께서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메시아로 행동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예수께로부터 자신이 바라는 행동을 이끌어 낼 기회를 만들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를 적대자에게 넘겨주어 그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도록 해서 강력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은 사랑, 자비, 용서를 설교하지만, 막상 자신이 죽을 위험에 닥치면 죽은 라자로를 살렸던 그 큰 능력을 발휘해서 우리를 이 압제에서 구해줄꺼야!’ 이렇게 볼 때 유다는 스승에 대한 고정관념과 자신의 주관적 기대에 철저히 잡혀 있었던 사람이고, 그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서 결국 스승을 그분의 적대자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이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예수께서 너무도 무력하게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는 스승이 그렇게 비참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뭔가 화끈한 행동을 원했을 뿐입니다. 절망에 찬 유다는 예수를 넘겨준 대가로 받은 돈을 성소에 내던지고 떠나가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에 대한 죄책감과 절망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유다가 겪은 죄책감과 절망이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컸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자신을 위해서 좋았을 것"(마태 26,24)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유다는 예수님보다는 자신의 기대와 상상을 더 추종하였고, 그 결과로 스승을 배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도 상대방에게 갖고 있던 기대와 상상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냉정하고 무자비하게 대한다면 유다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상상과 기대를 강요하는 것이 다툼의 불씨가 됩니다. 갓 결혼한 신혼 부부들일수록 상대방에게 내 생각과 기대를 강요하기에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지요. 부모 자식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식이 원하는 학교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학교를 강요하고 다그쳐서 자식과 심각한 갈등을 빚습니다. 자식과 배우자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은 내 상상과 기대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다른 이에게 기대를 걸더라도 그 사람 고유의 생각과 영역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기대와 상상에 집착할 땐 상대편에 실망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심한 경우에는 그를 버리거나 배척하기까지 합니다.

 

  교회에 대한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라고 해서 실망, 낙담,절망해서 비판과 비난을 거듭하는 것은 아닐까요?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적으로 묘사되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미 하느님을 속여서 벌을 받은 아나니아아 삽피라가 있었습니다(사도 5,1-11). 교회 지도층도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예로 베드로는 자신의 비겁한 행동 때문에 바오로의 야단을 맞아야 했습니다(갈라 2,11-14). 물론 교회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측면은 고쳐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겠지요. 평신도, 성직자가 힘을 합쳐서 말입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천명한대로 교회는 항상 정화(루터는 항상 개혁되어야 할 교회라고 했지만, 공의회는 개혁이란 말을 정화란 말로 바꾸었지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완벽한 교회가 아니라 죄와 약점이 많은 교회를 위해 돌아가셨고, 바로 그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따른 이들이 많답니다. 마치 십자가 아래 서 있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런 이들이 있는 한 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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