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3일 (목)
(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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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꽃 피우신 분들을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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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형 [largo7a] 쪽지 캡슐

2001-06-29 ㅣ No.3965

백합꽃을 피운 분들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도움을 베풀기보다는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더 많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이며, 언젠가는 어떤 형태의 모습으로든 되돌려 주어야 할 부채이다.  

 

나에게는 내 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잊지 못 할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딸애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셨던 이동숙 선생님이시다.

그 분은 내 딸에게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정신력을 심어주셨고, 사랑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내 딸은 이 동 숙 선생님으로부터  "자신감"이라는 큰 선물을 받았다.

그분에게는 국제상사에 근무하였던 남편과 재준, 재연이라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두 남매를 두셨다. 그리고 딸애가 6학년이 되었을 때, 이 동숙 선생님은 학교를 사직하시고, 남편의 임지인 미국으로 두 남매를 데리고 떠나셨다. 그 이후 우리는 그분과 인연이 깊었던지, 나 또한  1982년 7월경 당시 재직하였던 회사로부터 뉴욕지점장으로 근무하도록 인사명령을 받았다.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동 숙 선생님의  남편은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는 "올스 모빌" 세단 차에 우리의 큰 가방 두 개를 트렁크에 실은 후, 케네디 공항의 램프를 빠져 나와 "벨트 파크 웨이"라는 넓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밤길을 한참 달리다 보니 큰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다리는 뉴욕주와 뉴저지주 사이를 가르며 흐르고 있는 "하드선"강 위의 "죠지 워싱턴 브릿지" 이었다.   

우리 가족은 이 동숙 선생님의 반가운 영접을 받으며, 그날 밤 선생님의 아파트에서 하루 저녁을 묵었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잠결에 들렸다.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너무나 밝고 고왔다. 미국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람쥐 한 마리가 창가에 드리운 나무 가지에 앉아 동그란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지금은  이미 성인으로 성장하여 있을

재준, 재연 어린 두 남매의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얼굴과 행동들이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내 기억에 오롯이  살아 있다.

그 당시 한국과 일본에서 파견된 대부분의 상사주재원들은 "포트 리"라는 풍광이 아름다운 타운에 살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가을 하늘 보다 맑게 느껴지는 높은 하늘, 유유히 흐르는 하드선 강물,  관상용 과일이 농익어 가는 숲, 그리고 온 몸을 상쾌하게 해 주는  맑은 대기,  정말 머물고 싶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파트 월세가 부담스러운 고급주택가 "포트 리"에서 이 동숙 선생님의 이웃으로 살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임시로 거처하던 아파트를 떠나 전철 소리 요란한 뉴욕의 퀸스 보로의 우드사이드에 아주 저렴한 아파트를 빌려 이사를 하였다.

내 아내의 사돈이신 뉴욕의 "맨하탄" 한인 성당의 장 훈 신부님이 우리 아이들이 "우드사이드"의 가톨릭 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해 주셨으나, 당시의 우리 형편으론  높은 수업료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료의 공립학교를 선택했다.

우리가 뉴욕으로 옮겨온 이후, 오직 나만이 이 동숙 선생님 남편의 사무실을 찾아가 그를 수차례 만났으나, 우리 가족은 선생님과 애들을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들지는 못했다. 아무리 타국살이에 경황이 없었지만, 나 자신 정말 무성의하였다. 내 딸에게 하면 된다는 "신념"과 "자신감"을 심어주신, 그 고마운 선생님은 지금 서울의 하늘아래 어딘가에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내 딸애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담임을 맡으셨던 "프레이그(Mrs. Flaig)"선생님을 또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쉰 살이셨던 그 분은 이중언어교육을 실시하는 "우드사이드" 공립초등학교의 6학년 담임선생님이셨다.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다 미국에 간 딸애는 알파벳 하나 몰랐고,  영어에 관한 한 문맹이었다. 귀머거리요, 벙어리인  딸애를 1년 동안 가르친 "프레이그" 선생님의 인내와 사랑과 배려에 머리 숙여 감사할 뿐이다.

"프레이그" 선생님도 이 동숙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내 딸에게 하면 된다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하여, 딸애가 그린 그림을 교실 벽 작은 공간에까지 전시해 주셨다. 아마 이러한 "프레이그" 선생님의 애정 어린 배려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내 딸애는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6학년 2학기가 시작된 9월 초순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

온 나에게 율리안나가 "백합"이라는 시를 보여 주었다, 영어로 쓴 시(詩)였다. "백합"이라고 쓴 시제(詩題)아래에는 "율리안나 리"라고 딸애의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나는 놀라웠다, 딸애가 영어로 시를 썼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 딸애의 담임 선생님이셨던 "프레이그(Mrs. Flaig)" 부인은 내게 전화로 딸애의 시를 자랑하며 "기적"이라고 극찬하셨다. 미러클(Miracle)을 무려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그리고 "프레이그" 선생님은 우리를 당신의 집으

로 초청하셨고, 그날 저녁 율리안나는 응접실에 있는 피아노로 "엘리제를 위하여"를 선생님을 위하여 들려 드렸다. 나는 가끔 누렇게 퇴색한 노트 장 위에 내 딸애가 또박또박 예쁜 글씨체로 쓴 "백합(Lily)"이라는 시를 읽어 볼 때마다 "프레이그" 선생님의 안경 낀 얼굴이 떠오른다.  

그 이후 율리안나는 "데일리 뉴스"가 주최하는 미술대회에도 입상하였고,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는 그날의 최고의 영예인 뉴욕의 교육감 상을 수상하였다. 졸업식 날 "프레이그"선생님은 나를 포옹으로 축하해 주셨다.

나는 작년 어느 날, 딸애가 이 동숙 선생님 그리고 벽안의 "프레이그"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도움을 조금이라도 되돌려 드리는 길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려 우리 본당의 아이들을 위하여 영어회화를 가르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신부님은 미사 후, 이 사실을 알리셨고, 그리고 성당주보에도 공지하시기도 하셨다. 시작할 때에는 방학동안에만 가르칠 예정이었다. 아주 작은 수의 학생이었지만,  7개월 이상을 함께 공부하였다.  내가 왜 성당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신부님에게 자원하였는지,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번 하기 방학이 시작되면 다시 영어회화반을 열어달라고 신부님께 간청드리려 한다.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

지식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선생님에 머물지 않고 제자의 마음까지도 돌보셨던 참된 스승이신 이 동숙 선생님 그리고 "프레이그" 선생님의 가정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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