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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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사랑 하나 -서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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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덕 [ITSJESUS] 쪽지 캡슐

2000-09-01 ㅣ No.1685

* 아름다운 사랑 하나 -서순남 *

 

몇 년 전 나는 보육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공식적인 표시명이 보육원이고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고아원이다. 4살부터 18살까지의 아이들이 90명쯤 수용되어 있던 곳이었다. 부모가 안계신 아이를 ’고아’라 여겨왔던 내 통념이 깨진 건 그곳에서 였다.

 

아이들의 환경조사를 하던 나는 80%이상의 아이들이 양부모중 한분이 생존해 있고 양부모 모두 건재해 있는 경우도 많은 걸 알고 놀랐다. 7살짜리 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정신이상으로 가출한 뒤 어머니는 어느 날 현이를 재워놓고 혼자 집을 나간 것이다.

 

처음 수용되어 왔을 때 현이는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도 잘했고 조금만 있으면 엄마가 데리러 오실 거라고 묻지도 않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성격도 밝았고 똑똑한 남자아이였다. 그런데 녀석이 조금씩 기가 죽기 시작한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하루에 몇번씩 나에게 달려와서 "선생님 우리 엄마 안 왔어요?" 하고 묻던 그 또랑또랑하던 음성이 힘이 없는가 싶더니 어느날부터인가 녀석은 아주 말을 잃어버렸다. 묻는 말에 대답을 안하기 시작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싫어했다.

 

지켜보던 내가 당황해서 타이르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모두가 허사였고 그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선생님들의 말조차 안들었다. 종일 어느 구석에 앉아 밥도 먹지않을 때도 있고 놀이공부 시간에도 조금의 흥미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자연히 또래들에게서 고집쟁이로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할 일이 너무 많은 보육사 선생님들에게는 골치아픈 아이로 여겨지게 되었다. 나도 접근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밥도 저 안먹고 싶을 때는 아무리 먹이려 해도 거부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 한마디 않고 그네에만 앉아 있는 날도 있었다.

 

차츰 얼굴도 핼쓱해지고 자주 아프기 시작했다. 스물 아홉 살의 예쁜아가씨 후원자를 만난건 그즈음이었다. 친구소개로 왔다며 한 아동과의 결연을 원했을 때 나는 현이 얘기를 자세히 해 주었고 그녀는 기꺼이 현이의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매달 후원금을 보내주었고 일주일에 두 번쯤을 들러서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갔는데 특별히 현이에게 얘기를 많이 했다. 땅바닥에 앉아서 말 한마디 않고 낙서만 하는 현이의 곁에 장난을 걸기도 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는 꼭 현이를 안고가서 현이의 얼굴이랑 손발을 씻기고 정성스럽게 자기가 사온 크림을 발라주고 볼에 살짝 뽀뽀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녀석의 무반응과는 상관없이 올 때마다 웃는 얼굴로 그 일들을 계속했다.

 

곧 지치리라 걱정했던 나는 그녀의 끈질김에 감탄했고 라면 몇박스 사다주고 지방신문에 이름내던 어떤 어른들은 그만 두고라도 일년치 후원금 한꺼번에 다 내고 아이에 대해 전혀 궁금해 하지 않던 후원자들에게 실망한 내게 신선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거기다 나중에 알고봤더니 그녀는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동생 둘을 돌보는 그리 넉넉지 못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힘들지 않느냐는 내 얘기에 "저 나이에 엄마사랑이 얼마나 받고 싶을까요. 너무 가엾어서 아주 조금만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하며 환하게 웃었다. 현이가 그녀에게 대답을 하고 웃기 시작한 건 결연이 되고도 시간이 많이 지난 뒤였다.

 

조금씩 조금씩 아이답게 떠들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과 장난을 치기도 하고 그림을 아주 잘 그려 우리를 놀라게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오면 가장 먼저 뛰어가서 안기고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그들이 느끼고 알 수 있는 사랑의 표현과 관심이란 걸 다시 깨달았다.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고 얼굴을 씻겨주고 하는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따뜻한 사랑이 전해질 때 한 아이를 변화시킬 만큼의 큰 힘으로 나타난 걸 나는 본 것이다.

 

얼마후 크리스마스 전야의 행사에서 현이는 사람들을 한번 더 놀라게 했다. 그녀와 함께 열심히 연습한 율동을, 그녀가 정성스레 챙겨 입혀준 산타복장으로 나와서 깜찍하게 해 낸 뒤 자기는 다음에 커서 산타할아버지가 되어 선물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씩씩하게 말했을 때 장내가 온통 환성과 박수로 넘쳤고 참석한 다른 후원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말았다.

 

현이의 부시도록 밝은 얼굴빛과 생기있는 말소리는 보육사 선생님들을 눈물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그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내가 그곳을 그만두고 세월이 지난 지금, 곳곳에서 연말에 사랑이 메말라 가고 있다고 외칠 때마다 나는 버릇처럼 스물아홉이었던 그녀를 기억한다.

 

현이가 장가 갈 때까지는 지켜보고 싶다던 그녀는 지금도 현이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스웨터를 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다 한다.

 

사랑은 내려다 보며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등함으로 나누어 주는 것임을 생각하며 지금 어느 곳에서도 아름다운 향기나는 사랑을 나누는 이가 있을 것을 오늘같은 날 또 새롭게 믿어본다.

 

-http://sstory.com, 꿈꾸는 요셉, <낮은울타리, 1992년 3월호> 서순남/이랜드 주최 ’감동의 크리스마스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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