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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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신부님_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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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6-09 ㅣ No.173142

 

하느님의 자녀답게

“희망하라, 공부하라, 회개하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참 자주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옛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물음이기도 했고, 이렇게 삶의 길을 찾고자 부단히 읽게 되는 위인들의 평전이나 자서전, 회고록입니다. 이 물음은 1992년 1월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미사때 한 강론 제목이지만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묻는 질문이고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의식주만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찾는 사람이요 희망과 꿈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길없이는, 희망과 꿈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희망과 꿈을 잃어 혼란이요 죄도 병도 많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우리에게는 주님의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삶의 좌표가 되어주는 무수한 성인들이 있고, 무엇보다 날마다 미사를 통해 주님은 친히 당신 말씀을 통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시고 희망과 꿈이 되어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 답을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품위있는 삶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첫째, “희망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말해 주님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희망이 다 희망이 아니라 궁극의 희망, 우리의 영원한 꿈과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희망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곳,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곧장 찾아오는 영육의 병이요 죄의 유혹이요 내적부패와 타락입니다.

 

신망애, 믿음, 희망, 사랑의 순서로 말하지만 맨먼저 와야 할 희망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방향을, 길을 가리키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희망이 있어야 기다림의 인내도 가능합니다. 사랑의 사도, 기쁨의 사도, 감사의 사도인 바오로요 이보다 희망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오늘 제가 제2독서에서 반갑게 찾아낸 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놀랍게 펼쳐지는 내적변화의 현실이 우리에게는 샘솟는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아,우리 현대인의 비극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영적 시각을 잃었습니다. 세속주의, 물질지상중의, 현실지상주의가 만연한 세상이요 이에 중독된 세상입니다. 쉽고 편하고 빠른 것을 찰나적인 것들만 찾는 불나방들 같습니다. 

 

삶의 깊이와 무게가 없어 삶도 날로 천박해 집니다. 얻는 것보다 잃은 것이 너무나 많은 디지털, 인공지능의 문명입니다. 결코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더욱 심각히 묻고 답을 찾자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우리의 희망을 북돋웁니다. 

 

“우리의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삶도 바로 여기 희망의 샘, 주님으로부터 기인됨을 봅니다.

 

둘째, “공부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주님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의 지식공부가 아니라, 평생 주님의 학생이 되어 평생 주님을 배워 닮아가는 공부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이, 역시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가 우리의 주님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공부가 짧아, 무지로 인해 만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려 하니 저절로 실소가 나옵니다. 무지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니 이들 역시 주님 공부가 한없이 부족한 무지에 눈먼 자들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무지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다음 말씀 역시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성령의 역사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주님을 모시고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평생 배움의 여정에, 겸손과 경청, 순종과 섬김의 자세는 필수입니다.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우리 모두를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가 참된 공부이며 이런 공부에 충실한 자가 진짜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 이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셋째, “회개하라!”입니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주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참된 회개가, 영적혁명같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회개하면서 하느님 방향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회개의 사랑, 회개의 용기, 회개의 진실, 회개의 정직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비상한 회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바로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서두부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주님의 물음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창세기에서 나무열매를 먹은 사람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는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대답합니다. 이때라도  회개할 때인데 그는 이걸 놓쳤습니다. 죄를 지으니 두려움이, 부끄러움이 어둠처럼 그 마음에 스며든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 두려움없이 살았던 사람인데 죄로 말미암아 숨게 된 사람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도록 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제대로 다하는 회개의 삶에 충실할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어지는 결과가 이를 보여줍니다. 이들의 죄를 추궁했을 때 회개는커녕 책임 전가에 바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기에 먹었습니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 저 여자와 저 여자를 아내로 주신 하느님 당신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뱀에게 죄를 전가하는 무책임한 여자입니다. 

 

죄의 결과는 관계의 파괴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가 파괴되었고, 이어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어 힘껏 노력해야 살 수 있는 험하고 거친 땅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좋아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관계의 회복에, 복원에 진정한 회개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다시피 죄의 도미노 현상처럼 세상에 만연되기 시작한 죄입니다. 누군가는 지금 지옥은 텅 비어 있다 말합니다. 모든 악마들이 지옥에서 나와 세상 곳곳에서 활개치며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끊임없는 회개가 필요한 때입니다. 말그대로 회개의 선택이요 회개의 실천 훈련에 회개의 습관화가 절박합니다.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위한 기도와 노동과 성독이 균형을 갖춘 일과표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비록 수도원같은 일과표는 아니더라도 회개의 일상화를 위해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기도시간은 동시에 회개시간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물으실 때, “예, 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언제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의 책임을 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1.주님을 희망하십시오!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자 빛이신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꿈을 두는 것입니다.

2.주님을 공부하십시오!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공부입니다.

3.주님께 회개하십시오!

끊임없이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회개의 선택, 회개의 훈련, 회개의 습관화, 일상화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참가족, 한가족입니다.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입니다. 더불어의 삶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는 말마디이기도 하며 어제 교황님이 사제들에게 한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참으로 많은 사제들이 ‘소속감’(sense of belonging)으로 대변되는 ‘생명선’(lifeline)을 잃고 있음을 주목하자! 사제들은 ‘편안히(at home)' 느끼는 것이 본질적이다."

 

사제들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보금자리 공동체의 울타리가 사라져 소속감의 생명선이 사라질 때, 방황이요 혼란이요 사람은 살아남기 힘듭니다. 날마다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 사랑의 한가족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편안히(at home)' 더불어 머물며, 주님을 희망하며, 주님을 공부하며, 주님께 회개하며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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