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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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_2024년 5월 18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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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18 ㅣ No.172516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내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부활시기를 마무리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아침을 차려 먹이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시고, 그의 장래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사도 요한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장래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요한 21,2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에게는 베드로와는 다른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각자에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베드로에게는 ‘증거’의 몫이,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오는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증언’의 몫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선포’(kerygma)와 ‘증거’(mariteria)라는 예수님의 예언직의 두 가지 형태입니다. 

곧 말씀의 선포와 행위의 모범을 통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이 둘은 서로 경쟁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고 재미난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확인까지도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다른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 친구입니다. 

그러니 그의 장래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은 찬구를 경계하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여기서 베드로는 요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요한을 위해서 묻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요한을 무척 사랑했고, 또한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사도행전> 2-4장과 <요한복음서>에 잘 나타나고 있음을 말하고, 본문에서 베드로는 전에 최후만찬에서 배신자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묻지 못하고 요한을 시켜서 물었기에, 이제 요한을 위해서 호의로 직접 묻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고 하십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 베드로는 벌써 그렇게 하지 안않던 적이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고까지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미 세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가지 않았던가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호숫가에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도,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올라갈 때에도, 부활하시어 나타나셔서도, 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씀의 선포를 증언으로 추종하며, 말씀의 증거를 모범으로 삼으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주님!

길을 가다가 멈추지 않게 하소서!

멈추다가 떠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떠밀리다가 뒤로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휩쓸리다가 가야 할 길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따라 가게 하소서!

눈길을 돌리느라 옆길로 새지 않게 하소서!

자신을 따르느라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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