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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5월 2일 (목)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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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사랑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140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4-02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사랑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사람은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건조하게 말하면, 인간에게는 이성(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차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유하는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당연히 지성의 힘과 성찰과 통찰의 능력에 우위성을 두었습니다. 거룩한 사람 역시 하느님에 대한 앎과 하느님에 대한 통찰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 안에서 인간의 의지적 행위와 삶을 중요시하는 추세가 발생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은 통찰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47항) 거룩함의 길에서 하느님에 대한 지성적 통찰보다 하느님을 향한 의지적 노력과 개인적 노력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식과 성찰보다 의지와 실천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천중심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의 우선성

 

인간에게 지성(머리), 감정(마음), 의지(몸)는 중요합니다.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이성을 통해 아는 지식도 필요하고, 감정과 정서 안에서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행동과 의지를 통해 실천하는 것도 요청됩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교회 안에서 교리와 신학만을 중요시하는 일종의 지식인중심주의와 엘리트중심주의를 낳았습니다. 넓은 맥락의 영지주의 전통입니다. 감정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감각적인 신앙체험만을 추구하는 무분별한 열정의 태도를 낳았습니다. 의지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종교적 행위의 의지적이고 습관적 반복만을 중요시하는 형식주의적 신앙을 낳았습니다. 일종의 펠라지우스적 전통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이 영지주의적 태도와 펠라지우스적 태도가 잔존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영지주의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대판 펠라지우스적 태도에 대해서도 역시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펠라지우스적 태도를 지닌 이들은 “인간 의지가 순수하고 완벽하고 전능한 어떤 것이나 되는 양”(49항) 행동합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만을 믿고, 정해진 규범을 지키거나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49항)

 

어쩌면 거룩함의 길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보다 하느님을 향한 행위와 실천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말과 생각보다는 행동과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말보다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또 하느님에 대해 입으로 숱하게 떠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행동과 삶이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즉 행동과 삶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습이 아니라면,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말은 빈 것이 되고 맙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에 있어서 행동과 실천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의지적 행위와 실천의 노력보다 앞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입니다. 조건 없이 선물로 주신 당신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 덕분에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은총의 선물은 인간 지성의 능력과 의지의 힘을 초월합니다.”(54항) 하느님의 “은총은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통상적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50항)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이 은총의 선물에 대하여 기쁨의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54항) “교회는 우리가 우리의 공로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된다고 되풀이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언제나 먼저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52항) 결국 은총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의 지성과 의지의 한계를 인정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노예살이로 변질된 종교적 태도

 

인간의 의지적 노력만을 강조하는 종교인들은 자칫 관습주의자, 율법주의자, 형식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은 “율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 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 교회의 전례와 교리와 특권에 대한 허식, 실질적인 일처리 능력에 대한 자만, 또는 자립과 자아실현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57항)의 모습을 보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보다는 종교적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본당 안에서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할 때, 우리가 정말 그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분을 닮게 해서 기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복음 선포와 선교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위험에 빠지곤 합니다.

 

또한 우리는 본당에서 신심활동을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쩌면 신심 단체 활동을 더 오래한 신자들 사이에서 더 쉽게 발견되는 위험입니다. “이는 일부 그리스도인 단체들이 그들 고유의 특정 규범, 관행, 행동 방식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일어납니다.”(58항) 레지오 마리에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지오의 규범과 교본과 전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규범과 교본과 전통은 진정한 성모님의 군대가 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규범과 관행과 행동 방식을 준수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규범과 관행과 행동 방식인지를 끊임없이 묻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복음의 기쁨과 은총의 선물로서의 행복과 자유를 잃어버리고(55항), “일종의 노예살이로 변질”(59항)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교리와 신학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 규범과 관행과 전통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리와 신학적 앎이 필요합니다. 규범과 관행과 전통을 준수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무슨 복잡한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두 가지 정식이나 명령을 전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두 얼굴, 아니 오로지 하나, 곧 수많은 다른 모습에 반영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전해주십니다.”(61항)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으로만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4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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