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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61-62: 춘천교구의 사제와 성소사목

117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3-21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61) 춘천교구의 사제와 성소사목 I

 

 

새해 들어 우리 교구에 전해진 가장 반가운 소식은 지난 1월 17일, 2020년도 신학교에 입학할 춘천교구 신입생들이 5명이나 된다는 일이다. 2020년 3월 현재 우리 교구는 주교 2명(장익 십자가의 요한 원로 주교와 김운회 루카 현 춘천교구장 주교), 사제 116명, 부제 3명, 신학생 32명, 예비신학생은 총 96명이다. 2019년에 부제가 3명 탄생했으니 우리 교구 사제의 수는 곧 119명이 될 것이다. 하늘나라 건설을 위해 추수할 일꾼을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강원도 출신 첫 번째 사제는 영동 지역 간성에서 출생하여 강릉의 제비골1)에서 용산 소신학교에 들어간 서병익 바오로 신부이다. 그는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10일 용산 신학교를 졸업하고 종현 성당에서 동갑인 최문식 베드로2)와 함께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제 인명록에 따르면 그는 19번째 한국인 신부이다. 두 신부의 수품으로 조선교구의 한국인 신부는 15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프랑스인 사제는 46명이었고, 전국의 총 신자 수는 73,057명이었다. 서병익 신부의 첫 임지는 전라도였고, 이곳에서 사목한 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 서 신부는 사제생활의 후반을 전라도에서 보낸다. 그는 1931년 강원도 춘천 약사리 본당(현 죽림동 주교좌 성당)에서 4년간 주임 사제로 사목하다가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사목하였다. 전라도로 가기에 앞서 1935년에는 대구교구 주교좌 계산동 본당에서 1년간 임시로 사목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서병익 신부는 강론 잘하는 다혈질적 성격의 소유자로 교우들에게 기억되었다고 한다.

 

영서 지방의 첫 사제는 김휘중 요셉 신부이다. 강원도 영서 지역을 풍수원 본당에서 관할하고 있을 당시, 춘천의 버들골(춘천시 북산면 내평리)에서 한 소년이 소신학교에 입학한다. 1902년 9월에 용산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9월 22일에 수품하였다. 사제 인명록에 의하면 26번째 사제이다. 최양업 신부의 넷째 제수의 외손자로서 순교자 집안에서 또 다른 사제가 탄생하였는데, 병약하여 아쉽게도 1년 2개월간의 사목 생활을 끝으로 선종한다. 뮈텔 주교는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당시, 한국인의 남아 선호사상과 그 집안의 대를 이을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신학교 입학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를 원했다. 정규하 신부는 부모가 모든 책임을 진다는 전제하에, 신학교 입학을 허락해 달라고 뮈텔 주교에게 설득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1) 강릉 구정면에 제비골이라는 마을이 1922년 이철연 신부의 연례보고서에 언급된다.

2) 양양 본당의 주임으로 있으면서, 현재 강릉 지역의 신앙공동체 설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2020년 3월 22일 사순 제4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62) 춘천교구의 사제와 성소사목 II

 

 

오늘은 춘천교구 설립(1939년 4월 25일) 후 첫 번째 사제였던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그는 1911년 8월 9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 산골 마을에서 아버지 김덕희 에티엔(스테파노의 프랑스식 이름)과 어머니 이 마리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모 모두 독실한 신앙인으로 성가정을 이루었으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편부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12세가 되던 해인 1923년 9월 고향을 떠나 서울 용산 신학교(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 생활을 함께했던 동창 신부들은 그를 ‘활달하면서도 섬세한 사람’ ‘절대 남과 다투지 않는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 으로 기억했다.

 

1939년 6월 24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원(元, Adrianus Larribeau) 주교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아, 새로 설정된 춘천 지목구 소속으로 수품된 첫 사제이자 양양 본당이 배출한 첫 번째 사제가 되었다. 그는 풍수원 본당 이광재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사제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2년 일제에 의해 미국인 신부들이 추방되자, 사제가 부족해진 평양교구는 타 교구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때 김교명 신부가 평양교구로 파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기에 사목 활동이나 교회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원만한 성품과 열성으로 극복해 나갔고, 1944년 말 평양교구에 파견되었던 타 교구 소속 신부들이 본 교구로 돌아갈 때에도 목자 없는 양들을 위해 의주 본당에 남아 사목활동을 이어갔다.

 

해방 후 공산정권 수립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여의치 못하고 신변에 위협도 있었지만 김교명 신부는 단호히 월남을 거절하고 자신의 임지를 지키며 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교구장 주교와 사제들이 차례로 체포 또는 납치되는 가운데 거의 연금 상태에 있던 와중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다음 날 새벽 김교명 신부는 연행되어 일주일간 의주 보안서에 억류되었는데, 그 후 아무도 그의 행적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춘천교구 설립 후 탄생한 첫 사제 김교명 신부는 11년간의 사목 생활을 마치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춘천교구를 담당했던 성 골롬반 선교회에서도 한국인 사제양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사제 양성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한국인으로 처음 춘천교구 주교로 부임한 장익 십자가의 요한 원로 주교는 지속적인 사제 양성을 위해 정성을 다했으며, 현 김운회 루카 주교는 사제 양성을 담당하는 성소국을 신설하여 좋은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05년 11월부터 춘천교구 주교는 함흥교구장 서리를 당연직으로 맡게 되었다. 그래서 춘천교구의 사제 양성뿐만 아니라 남북이 자유로이 왕래하는 날을 대비하여 현재 춘천교구 성소국에서는 함흥교구(부제 1명, 신학생 4명) 사제 지원자를 뽑아 함께 양성하고 있다. [2020년 3월 29일 사순 제4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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