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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질병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병든 세계 속 텅 빈 교회는 하느님의 표징이며 호소

143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5-17

질병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병든 세계 속 ‘텅 빈 교회’는 하느님의 표징이며 호소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는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본 글은 체코 프라하 카를 대학의 토마시 할리크 신부가 미국 예수회 잡지인 <아메리카>에 기고한 글로 전염병이 창궐한 현 시대에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한국교회 신자들을 위해 이 글을 번역해 본지에 기고했다.

 

 

우리의 세계는 병들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대유행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명도 병들었단 것이다. 코로나19의 전 세계적인 유행과 이에 따른 여러 현상들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병든 세계’, 이것이 바로 시대의 징표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감염병이 사회의 통상적인 기능을 일시적으로 방해하겠지만, 곧바로 이전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아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세계의 안전이 이처럼 뒤흔들리는 사태를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다. 외적으로 보면, 세계화된 세상이 폭넓게 남긴 상처들이 이제 드러난다.

 

 

교회 - 야전병원

 

이런 상황은 ‘세계무대의 주역(Global Player) 가운데 하나’인 교회에, 신학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랐던 것처럼 ‘야전병원’이어야 한다. 교황은 교회가 안락하고 ‘호화로운 고립’ 속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야전병원’이어야 한다면, 교회는 역사의 처음부터 줄곧 그랬던 것처럼, 어쨌든 건전하고 사회적이고 헌신적인 봉사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훌륭한 병원처럼 다음의 세 가지 과제도 이행해야 한다. 바로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 ‘진단’과 공포와 증오, 포퓰리즘, 전체주의 등과 같은 나쁜 바이러스가 널리 확산되는 사회에 면역성을 길러주는 ‘예방’ 그리고 용서를 통해 과거의 정신적 충격을 해소하는 ‘회복’에 나서야 한다.

 

올해의 사순 시기에는 많은 대륙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마찬가지로 수많은 유다인과 이슬람교도도–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나는 사제와 신학자로서 텅 비어 있고 닫혀 있는 교회에 대해 고민해왔다. 나는 교회의 이런 모습을 하느님의 표징이며 호소라고 생각한다.

 

텅 비어 있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감추어진 교회의 공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그리스도교의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을 경우 교회의 미래가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이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더욱더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 교회의 회개란 하나의 ‘개선’이 아니라, ‘정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에서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향전환을 뜻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봉쇄조치로 텅 빈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 CNS 자료사진.

 

 

개혁의 호소

 

우리는 교우들과 함께 하는 미사와 각종 행사를 중단한 지금의 사태를 하나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곧 일단 멈추고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 우리가 개혁의 여정에서 어떻게 계속 전진해야 하는지를 깊이 숙고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단순한 구조 개혁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라,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깊이에 이르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미사 중단 기간에 인터넷이나 TV로 미사성제를 생중계하는 식으로 재빨리 인위적인 대체수단에 의지하는 것은 그리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가상(假想) 신심’ 혹은 ‘TV미사나 인터넷 미사’로 방향을 바꾸어 화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차라리 우리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 “내 이름으로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어쩌면 이러한 ‘예외적인 상태’는 교회의 새로운 형태를 위한 단지 하나의 힌트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이런 형태의 선례들은 많이 있었다. 교구와 본당 사목구와 사도직 활동단체와 수도회들은 유럽의 대학들이 설립되었던 이상(理想)에 다가서야 한다. 말하자면 교회는 학생과 선생이 서로 친교를 나누는 일, 그리고 자유로운 토론과 깊은 명상을 통해서 진리를 찾던 지혜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 영성과 대화가 가득한 그런 외딴섬에서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나올 수 있다.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교황으로 선출되기 하루 전에 요한 묵시록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방향을 제시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묵시 3,20)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안으로부터 문을 두드리시며 밖으로 나가길 원하십니다.” 실제로 교황은 이를 실천하고 있다.

 

교회는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사진은 2015년 12월 8일 자비의 희년 개막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을 여는 프란치스코 교황. CNS 자료사진.

 

 

우리 시대의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올해 주님 부활 대축일에 많은 성당들이 텅 비었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장소에서 빈 무덤에 관한 복음을 선포했다. 텅 빈 교회의 상태가 우리에게 빈 무덤을 상기시킨다면, 우리는 천사가 들려주는 다음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는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은 이렇다. “오늘날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가?”

 

사회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에는 ‘신앙인’이 점점 줄어들고, ‘구도자’가 늘어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의 수도 늘어난다고 한다.

 

자신을 신앙인으로 여기는 사람과 비신앙인으로 여기는 사람을 분류하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구도자’는 신앙인 가운데도 있고, 비신앙인 가운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비신앙인은 주변에서 제시하는 종교적 표상들을 거부하지만 진정한 목마름을 잠재울 수 있는 샘의 갈망을 느낀다.

 

나는 죽음을 이기신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가야하는 이 ‘현대의 갈릴래아’가 바로 구도자의 세계라고 확신한다.

 

 

구도자에게서 그리스도를 찾음

 

해방신학은 우리에게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를 찾으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를 실행하려면, 무엇보다도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념을 버려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근본적으로 변화되셨다. 복음이 전하듯이, 그분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것을 우리는 그대로 믿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 손을 대는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이 떠맡으셨던 세상의 상처, 교회의 상처, 육신의 상처 등에서 그분을 만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그분을 더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개종을 집요하게 권유하는 우리의 태도도 버려야 한다. 구도자를 가능한 한 빨리 회심시켜 우리 교회의 제도적이고 정신적인 기존 울타리에 가두어놓기 위한 계획으로 구도자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안의 잃은 양들’을 찾으셨지만, 그들을 당시 유다교의 기존 제도 안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전통의 보화로부터 새로운 것만이 아니라 옛 것도 발견해, 그것에 대해 구도자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 우리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더 넓혀야 한다.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초대교회는 그 역사 시초에 성전 파괴를 체험했다. 그 성전은 예수님이 기도하셨고 당신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곳이다. 이에 대해 당시 유다인은 창조적이고 용기 있는 해결책을 찾았다. 곧 파괴된 성전의 제단을 유다인 가정의 식탁으로 대신했고, 제사규정을 사적 기도나 공동 기도에 대한 규정으로 대체했고, 번제와 희생제를 입술과 생각과 마음 등의 제사, 기도와 성경 연구로 대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회당에서 추방되었던 초창기 그리스도교도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았다. 그러니까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은 전통의 폐허 속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새롭게 읽고 해석하는 것을 배웠다. 지금 우리도 이와 흡사한 상황에 있지 않는가?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느님

 

5세기 초에 로마가 몰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제각각 성급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방인들은 로마의 몰락을 그리스도교의 수용 때문에 내려진 신들의 형벌로 보았고, 그리스도인들은 창녀 바빌론의 생활을 아직 근절하지 않았던 로마에게 내린 하느님의 형벌로 생각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두 해석을 거부했다. 그는 그 변혁의 시기에 ‘두 왕국’의 영원한 싸움에 대한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 두 왕국은 그리스도인의 나라와 이방인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두 가지 ‘사랑’을 뜻한다. 그 하나는 초월에 닫혀 있는 자기사랑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이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사랑이다. 문명이 변화되는 이 시대는 현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신학과 교회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지만, 교회가 어디에 없는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정교회의 신학자 예브도키모프(Evdokimov)가 지적한 적이 있다. 지난 공의회에서 다뤄졌던 ‘보편성’과 ‘교회일치운동’의 단어는 아마 새롭고 더 깊은 의미를 얻어야 할 것이다. 더 넓고 더 깊은 교회일치운동, 말하자면 더 용기 있게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는’ 시대가 왔다.

 

이번 부활 시기를 그리스도를 새롭게 찾는 시기로 받아들이자.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 계신 분을 찾지 말자. 그분을 담대하고 지속적으로 찾자. 그분이 낯선 분으로 우리에게 발현하시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서,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목소리에서, 평화를 가져다주시고 공포를 몰아내시는 그분의 영에서 그분을 알아차릴 것이다.

 

토마시 할리크 신부 - 토마시 할리크 신부는 체코 프라하 카를 대학 사회학 교수로, 체코 그리스도교아카데미의 회장과 프라하 아카데미 공동체의 주임신부를 역임하고 있다. 공산정권 하에서 비밀리에 사제품을 받고 지하교회에서 활동했던 할리크 신부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가톨릭신문, 2020년 5월 17일, 토마시 할리크 신부, 번역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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