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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걸어가는 교회

55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9-24

[경향 돋보기 - 함께 걸어가는 교회를 위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걸어가는 교회’

 

 

교회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2천 년 교회 역사에서 이 질문이 진지하게 제기된 것은 생각보다 최근의 일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유럽 사회의 변화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관계에도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다. 세상은 더 이상 교회의 통제를 원하지 않고, 고유의 자율성을 주장하였다. 이성의 힘에 대한 자각과 자유의 추종은 서구 사회를 근대로 나아가게 하였는데, 이러한 흐름은 초자연적 진리 추구와 신적 권위를 주장하는 교회와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자기 고유의 실존을 구축해 나가는 세상에 대해 교회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말해야 했는데, 이것은 교회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물론 교회의 자기 이해가 근대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14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회론은 교황권과 황제권이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교황의 권한을 명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렇지만 교회는 아직 교회 전체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 개혁을 맞는다. 황제권과의 대립 속에서 주로 교계 제도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전개된 기존 교회론과 달리, 루터는 ‘만인 제사장직’에 기초하여 교계 제도의 신적 기원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교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는 뚜렷하게 대조되는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프로테스탄트는 성령에 의해 말씀 안에 모인 교회,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교회를 강조한 반면, 가톨릭 교회는 그 반작용으로 더욱 교계 제도를 중심으로 한 가시적이며 제도적인 교회를 강조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교회관은 19세기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 정점에 달하였다.

 

이런 교회관에서 주된 특징은 교회의 ‘능동적 주체’를 교계 제도에 속한 이들에 한정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곧 ‘교회의 사람’은 오로지 성직자나 수도자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었고, 평신도들은 이들에게 수동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 교회와 세상 사이의 다리, 또는 ‘양다리’를 걸친 사람들로 이해되었다. 여기에는 ‘보편 사제직’ 개념이 교회 안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것도 큰 몫을 하였다. 신약 성경(1베드 2,9; 묵시 1,6)에서 말하는 보편 사제직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 있는 것이었음에도 루터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구분’이 아닌 ‘분리’된 두 계급처럼 이해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19세기 근대 사회 앞에서 교회 또한 자신을 사회라고, 그것도 ‘완전한 사회’라고 스스로 주장한다. 이것은 교회가 윤리적으로 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집단이 사회를 이루는 구성적 요소를 교회가 다른 어떤 공동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갖추었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교회의 경우 사회를 구성하는 형상적 요소인 ‘권위’가 신적 권위이기 때문에 사회로서 교회의 완전성은 더 분명해 보였다. 더욱이 교회는 ‘완전 사회’인 것만이 아니라 신적 권위를 가진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구성된 ‘불평등한 이들의 완전 사회’라는 자기표현은 결과적으로 교회를 더욱더 계급 사회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고 강화된 이 ‘균형 잃은’ 교회 이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교회는 어떤 소수 그룹만이 중요하며 주체가 되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세례받은 사람들’의 ‘전체’, 곧 ‘하느님 백성’이다. ‘교회가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 전체성은 그 안에 이루어지는 어떠한 구분보다 우선적으로 중시되어야 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경륜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충만한 구원과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이 여정 동안 모든 시대 모든 공간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실현되도록 봉사하는 사명을 받았다. 이 궁극적 목표와 사명은 교회 내 구성원들 가운데 일부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된 것으로서, 여기에 단지 ‘수동적으로만’ 참여하는 구성원은 아무도 없다(교회 헌장, 30항 참조).

 

교계 제도는 하느님 백성의 ‘위’도 ‘밖’도 아닌 하느님 백성 ‘안’에 이 백성이 ‘자유로이 또 질서 있게’ 목표에 도달하도록 봉사하고자 세워졌다(교회 헌장, 18항 참조). 성령의 인도를 따라 목자와 결합된 하느님 백성 전체가 이 여정을 함께 간다. ‘교회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20세기 공의회가 제시한 답은 이렇게 인간 역사 안에서 충만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이다.

 

 

저마다 자기 길에서, 그리고 함께 가는 길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 안의 어떠한 불평등성도 배제한다. 교회 안에는 참으로 놀라우리만큼 많은 다양성이 있다.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교회 안 지체들의 기능도 다양하다(교회 헌장, 13항 참조). 그 다양성은 공동체 안에서 분리와 배제가 아니라 오히려 풍요로움의 원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양한 지체들이 각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그 몸이 조화롭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교회 안에서 지체들의 평등성과 다양성에 대해 명시적으로 선언한다(교회 헌장, 32항 참조).

 

그러므로 목자와 결합된 하느님 백성은 역사 안에서 함께 걸어가되, 이 여정에서 각 지체는 고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저마다 자기 길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다”(교회 헌장, 11항).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 내 삶과 활동이 ‘함께 감’과 ‘저마다 자기 길에서’ 사이의 역동성 속에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함께 감’은 공의회 이전까지 교회의 자기 이해와 비교할 때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동일한 사제직과 왕직과 예언자직에 각기 고유의 방식으로 참여하며 이 길을 간다.

 

여기에서 보편 사제직 개념의 회복은 성직자-수도자-평신도의 3단 계급 구조로 이루어진 교회가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이의 전체, 곧 하느님 백성으로서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개념은 하느님 백성의 개념 자체를 떠받치는 대들보와 같다(교회 헌장, 10항 참조).

 

세례받은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3중 직무에 참여하되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곧 ‘저마다 자기 길에서’ 이를 수행한다(교회 헌장, 31항 참조). 물론 이 말이 다시 3단 계급 구조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수도자는 성직자와 평신도 중간 계급이 아니다(교회 헌장, 43항 참조). 공의회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 안에 각 지체의 역할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공의회가 말하는 ‘저마다 자기 길에서’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이 결코 다른 지체로부터 고립된 수행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공의회 문헌 안에서 아직 충분히 발전된 형태로 이 ‘함께 감’과 ‘저마다 자기 길에서’ 사이의 역동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미 기본적인 큰 틀은 제시되어 있다. 곧 교황, 주교, 목자, 평신도가 어떻게 서로 관계 안에서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하는지 명시한다.

 

교황의 경우 수위권에 대한 교의를 보존하면서도, 공의회는 교황이 마치 주교들과 ‘분리’된 것처럼 말하기보다는 주교들과 친교의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고(교회 헌장, 8항 참조) 교황이 ‘주교단’(collegium episcoporum) ‘안에’ ‘형제들과 함께’ 있음을 알린다. 주교단은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로 존재하면서 교회의 선익에 봉사한다(교회 헌장, 22항 참조).

 

개별 주교는 지역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자신에게 위탁된 하느님 백성을 보살피는데(교회 헌장, 27항 참조) ‘협력자들’인 사제들의 도움을 받는다(교회 헌장, 28항 참조). 그리고 신자들은 목자들의 말을 수동적으로만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의 구원 사명에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협력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함께 감’과 ‘저마다 자기 길에서’는 역동적으로 상호 침투한다.

 

 

한 사람, 몇 사람, 모든 사람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안하는 교회 삶의 역동성이다. 교회 안에서 ‘한 사람’, ‘몇 사람’, ‘모든 사람’ 이 셋 사이의 긴밀한 역동성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은 교회의 삶의 원리이다. 교회 구성원들은 한 사람 - 몇 사람, 몇 사람 - 모든 사람, 한 사람 - 모든 사람 등 늘 ‘함께’ 구원을 향해 가는 이 여정을 가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 나간다.

 

교회는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이 끌고 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통의 목표를 향하여 공통의 사명을 수행하며 저마다 자기 길에서 제 몫을 하며 함께 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찰, 곧 ‘교회는 스스로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공의회가 ‘쏘아 올린 공’, 이 전망의 변화는 공의회가 끝난 직후 교황청 ‘세계주교대의원회의’(1965년), 각 지역별 주교회의, 교구와 본당에서 사목 평의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실현되어 나갔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함께 감’은 더욱 강조되었고 신학적으로도 그 의미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명료화되었다. 그 결과로 나온 문헌이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의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2018년)이다.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이제는 서구 사회에서조차 주님의 작은 양떼가 되고 있는 교회가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가장 교회다운 모습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씀처럼 “교회는 ‘함께 가는 길’(συνοδος)에 대한 이름”이다.

 

* 최현순 데레사 - 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이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 신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9월호, 최현순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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