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신학자료

sub_menu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복음으로 세상 보기: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

169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06

[복음으로 세상 보기]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

 

 

우리에게 있어서 자연만큼 자상하고 좋은 스승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새싹이 돋움을 통해서 봄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이 부는 것을 통해서 가을이 다가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연의 가르침을 알고 보는 것과 그것을 통해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고 보겠습니다. 즉,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라 해서 모두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깨닫고 누구나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엄연한 사실도 애써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 다른 잡다한 것을 보느라고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 19-31 참조)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종기투성이의 거지 라자로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부자의 집 대문간에 앉아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과 돈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가련하고 불쌍한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과연 부자는 라자로를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집 대문간에 앉아 있는 거지가 눈에 거슬렸거나 혹은 눈에 가시로 여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라자로를 잘 돌보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자선을 실천하지 못한 연유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부자는 늘 함께 살아가는 라자로의 이웃이었지만,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다른 것들에 신경과 마음이 쏠려 있어서 볼 수 없었고, 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가련한 이웃인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웃들을,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 즉,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고통 받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보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말하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 있어야 볼 수 있어

 

제 사목의 대상은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 국내 이주민들입니다. 그들은 이주노동자들, 결혼 이주민들, 다문화 가정의 이주민 자녀들 그리고 요즈음 사회 안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들입니다. 난민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의 생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 먼 나라 이곳 한국에서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주로 만나는 분들이 이주민이어서 그런지 이주민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니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예전에 비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외국인에 대한 편견 중 하나가 ‘잠재적인 범죄자’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확률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떤 이주민 활동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철저한 준법 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좁은 도로의 횡단보도에서도 파란불을 지키며, 길거리에서도 침도 하나 뱉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혹시나 작은 잘못 하나로 추방되거나 그것이 이유가 되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누구보다 모범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외국인 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예전 저의 4년 동안 해외 생활에서의 마음가짐과 생활 태도를 생각해 보니 수긍이 가고 동의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작은 잘못으로 인해,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 나라에서 추방되어 다시 교구로 돌아가서 꾸중을 듣지 않을까? 걱정하고 신경 쓰며 지냈었습니다. 그러한 때를 생각해 보니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주민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은 예전에는 관심을 갖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았기에 가질 수 없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는 보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가져 보게 됩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사랑 증거

 

사회교리의 기본원리 중 하나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고 박해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몸소 가난한 이를 선택하셨고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하는 교회는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라자로가 우리 집 문 앞에 앉아 있는 한 정의나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며, 그분과 함께 변두리의 더러운 곳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정치에 뛰어들어 정의와 인간 존엄성을 위해,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해 싸우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변하고 살아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비명에서, 환난을 겪는 사람들의 탄식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신음에서 사명을 찾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DOCAT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톨릭 사회교리서’ 머리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교황께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변두리로 나아가 복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을 돌봄을 통해(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 진정한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평화의 사명을 실천하라고 권고 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 4)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묵상하며 우리의 시선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두고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월호, 이광휘 베드로 신부(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0 1,073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