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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46-47: 머튼의 마리아 영성

143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5-25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46) 머튼의 마리아 영성 


“성모님께서 제 마음을 모두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대해 다양한 종류의 호칭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원죄 없으신 탄생’, ‘평생 동정’, ‘미혼모’, ‘과부’, ‘성모 승천’, ‘그리스도의 어머니’, ‘여왕’, ‘발현과 기적’, ‘전구자’, ‘바다의 별’, ‘평화의 모후’, ‘천상의 모후’ 등.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모님에 대한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종’이었다. 왜 그가 ‘주님의 종’으로 성모님을 강조한 것일까?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묘사한 성모님을 통해 머튼은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1940년 ‘고독의 성모 성당’에서 자신 봉헌

 

사실 머튼이 세례를 받은 1938년 즈음에 그에게는 성모 신심이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 「칠층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영성 생활 첫해에 또 한 가지 큰 결함은 하느님의 모친에 대한 신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성모에 관하여 가르치는 교리를 믿었고 기도할 때면 성모송을 외웠다…. 사람들은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복되신 동정녀의 엄청난 힘을 깨닫지 못한다…. 당시 나는 성모님을 믿기는 하였으나 그분은 내 삶에서 아름다운 신화보다 약간 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족했던 성모 신심은 1940년 쿠바의 성모 성지 순례를 하면서 점점 채워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어머님을 일찍 여의고 따뜻한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고 자란 그에게 성모님은 이 순례 중에 그 마음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고, 쿠바의 ‘고독의 성모 성당’에서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기도를 바치게 된다.

 

“성모님,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저에게 이 사제직을 얻어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사랑으로써 제게 이 큰 은총을 주신 성삼위께 감사하는 뜻으로 첫 미사가 당신의 손을 통해 당신을 위해 봉헌되도록 하겠습니다.” (「칠층산」)

 

사제직을 향한 그의 갈망은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점점 성장하게 되었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해서도 자신과 함께 수도원에 거하시며 자신을 돌보시는 분도 바로 성모님이시라고 여겼다. 1947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에 기록한 일기에서 머튼은 축복받은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오늘 자신을 방문하였고,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건강과 빛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9년 부제품을 받은 후에도 “성모님께서 제 마음을 모두 가지셨습니다.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복음서를 성모님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1950년대 반복되는 성소의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머튼은 성모님께 모든 희망을 두는 기도를 바친다. “성모님 안에 희망을 둡니다. 오늘 미사에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을 가졌다면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독을 향한 이 갈망이 당신을 향한 저의 사랑의 부분이고 저를 향한 당신의 의지라면 문제가 됩니다.” 1965년 은둔소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그 은둔처를 성모님께 봉헌하며 ‘가르멜의 성모’라 이름 짓고 난 다음, “나는 성모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분은 이곳에 계신다”라고 자신의 성모 신심을 표현했다.

 

 

성모님의 완벽한 겸손과 순종에 매료

 

이처럼 머튼은 쿠바 성지 순례 이후부터 수도생활을 마칠 때까지 늘 성모님과 함께 살았으며 성모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였다. 그에게 있어 성모님은 어머니요 연인이었으며, 관상생활의 스승이었다. 성모님의 아들로서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신뢰를 드렸으며, 사랑하는 여인인 마리아에게 순수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심지어 간호사 M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고하며, 그 사랑은 순수하고 조건없는 사랑의 체험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성모님께 감사드린다고 고백한다.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깊어 갈수록 머튼에게 그녀는 관상의 모델이 되었다. 초기 머튼에게 성모님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였다. 그래서 성모님께 전구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후기 머튼에게 성모님은 ‘주님의 종’으로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신 분,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어 주님의 뜻 순종하신 분,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삶을 사신 분, 아들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신 분이셨다. 성모님의 단순한 관상적 삶에 대해 머튼은 「논쟁점」 (Disputed Questions)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모님은 인간과 모든 그 일상 안에서, 어떤 드라마틱하거나 굉장한 행복감 없이 그녀의 삶의 방식 안에서 단순하고 겸손하게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 가까이에 계신다.” 관상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머튼은 성모님의 생애와 예수님을 향한 태도 안에서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받아들인 성모님의 완벽한 겸손과 순종에 매료되었다. 드러나지 않게 자신을 감추고 온전히 예수님과의 일치의 삶을 사신 성모님과 같이 자신도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관상의 삶을 살고자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24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47) 머튼의 마리아 영성 ②


“저의 삶은 빛에 의해 유리와 같이 사라짐입니다”

 

 

지난 호에서 성모님은 ‘주님의 종’으로서 토마스 머튼에게 관상의 모델이 되셨다는 설명을 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성모님의 순종과 말씀의 오심’, ‘주님과의 일치: 창문의 비유’를 통해 관상의 모델이 되신 머튼의 성모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룬 다음, 우리가 머튼의 마리아 영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성모님의 순종과 말씀의 오심

 

성모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에 “왜”라고 하지 않고 “예”라고 응답하셨다. 이 성모님의 “예”라는 순종의 응답을 통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성모님은 ‘말씀’이신 아드님과 태중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긴 기다림 속에서 함께 하셨다.

 

관상은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관상은 성모님께서 아드님의 탄생을 위해 기다리셨고, 아드님의 공생활 시작을 기다리셨고, 아드님의 부활을 기다리셨듯이, ‘말씀’이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재탄생하시기 위한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성경 말씀을 읽고 맛 들이며, 고요한 미풍 가운데 들려오는 침묵의 말씀을 들으며 기다릴 때, 어느 순간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하나 되어 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성모님께서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아드님과 일치의 삶을 사셨기에 머튼은 성모님을 ‘유리창’에 비유하며 그분의 자기 비움과 깨끗함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머튼은 「새 명상의 씨」에서 “이기심이 전혀 없고 아무런 죄도 없는 성모님은 햇빛을 들여보내는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은 전혀 하지 않는 맑은 유리창과 같이 깨끗하십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성모님은 너무도 맑고 투명한 창문이시기에 성모님을 바라보지만 성모님은 사라지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머튼은 성모님을 창문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노래했다.

 

저의 뜻은 창문과 같기에,

그리고 태초의 탄생이 교만이 아님을 알기에,

저의 삶은 빛에 의해 유리와도 같이 사라짐입니다.

저는 신랑의 태양의 강렬한 빛 안에서 온전히 사라졌습니다.

 

저의 사랑은 창문과 같기에,

그리고 태초의 먼지와 같은 탄생이 수치가 아님을 알기에,

저는 저의 죽음의 새벽까지 온 밤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저의 성령과 혼인하던 날,

그리고 거룩한 변모에 의해 빛 안으로 온전히 사라졌습니다.

 

 

주님과의 일치: 창문의 비유

 

머튼은 1962년 강론에서도 “순수함과 겸손의 완전함에 의해 성모 마리아보다 하느님의 빛을 더 완벽하게 소유한 이는 없었다. 그녀는 빛이 비춰지면 온전히 사라지는 듯 보이는 깨끗한 유리창처럼 진리와 충만히 하나 되었다”라고 성모님과 하느님의 일치를 유리창에 비유하여 묘사하고 있다.

 

머튼은 성모님의 가장 큰 영광은 그녀가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모님께서 완전하게 자신을 비우셨기에 오히려 더 큰 하늘의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비움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은 성모님이 하느님으로 충만해 있듯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모셔오는 성모님의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모님의 영광은 그저 단순히 하느님의 영광이 그분에게 있는 것뿐입니다. 성모님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새 명상의 씨」)

 

머튼의 이러한 성모님에 대한 묘사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자신을 완전하게 가난하게 하고, 자신을 완전하게 비우며,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어느 날 하느님의 영광을 받을 것이다. 머튼은 “성모님께서 숨어 계시는 하느님 안에 우리도 숨어든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찾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드러나지 않으심, 그리고 청빈과 드러냄 없는 은거를 함께 나누는 것은 성모님을 아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겸손과 비움을 통해 성모님을 알아갈 때 우리도 성모님의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관계는 성모님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듯이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실 때 완성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31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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