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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무로부터의 창조와 세계의 영원성

56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2-11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무로부터의 창조와 세계의 영원성

 

 

우주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인류가 학문적인 사고를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최근에도 자연 과학과 측정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물리학적 통찰에 기반을 둔 빅뱅 이론을 바탕으로 초끈 이론, 다중 우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이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그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연 과학의 놀라운 성과들을통해 이 개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렇지만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이 현대 사회에서만 벌어졌던 것은 아니다. 중세 시대에, 더 정확히 말하면 스콜라 철학의 융성기였던 13세기에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논쟁의 한 단면이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이하 STh)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논쟁이 벌어졌고, 그 논쟁이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통적 이해를 위협하는 ‘세계의 영원성’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처음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라는 창세기의 설명을 토대로 헬레니즘 문화와의 접촉 과정에서 서서히 발전해 온 개념이다. 그러나 초기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상세한 논의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에서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교리로 정립되었다. 이 이론을 전통으로 받아들인 중세 초기의 학자들에게 시간, 운동, 우주 자체에 하나의 ‘시작’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더욱이 그 시대 사람들은 이 시작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선 태고가 아니라, 다만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12세기 중반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발견되면서 ‘세계의 영원성’ 주장이 널리 퍼져 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활동했던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등의 다양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개별적인 차이는 있어도 모두 ‘세계는 영원하다.’고 보았다.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와 같은 아랍 주해가들은 세계는 ‘영원한 창조’라는 의미에서 영원으로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였다.

 

1260년경부터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브라방의 시제와 같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 나타나는 이론을 근거로 ‘이 세계는 시작이 없이 영원히 존재했다.’는 주장을 여러 대학의 인문학부에서 강의함으로써 큰 혼란을 야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늘 현실태에 있는 제일 원인은 언제나 행위하며 언제나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모든 종의 존재자는 가능태로부터 현실화하지 않고 이미 실존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시제는 신의 세계 창조를 믿었지만, 철학자로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논증이 너무도 확실해서 이성으로는 그의 논증을 반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보수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자들의 반박

 

이러한 주장은 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시간 안에서의 창조’를 믿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주장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논박했던 대표적인 학자는 바로 프란치스코회 총장을 지낸 보나벤투라(1217?-1274년)이다. 그는 「6일간의 세계 창조에 대한 강연」 등에서 그 주장을 논박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을 바탕으로 창조가 시간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나벤투라는 “창조가 절대적으로 첫 시작을 내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라고 가르쳤다. 그에게 창조는 그러므로 ‘무로부터’(ex nihilo)이며, 이것은 바로 ‘첫 시작에서’(in principio)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원으로부터의 창조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라는 사고를 세계의 가능한 영원성과 조화될 수 있다고 간주하려던 시도는 그에게 경박하고 전망 없는 시도처럼 보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주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활용해서 ‘무한성’과 ‘유한성’을 대비시키며 증명하려고 다양하게 시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도적인 입장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나벤투라와 함께 초기부터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만일 세계가 영원하다고 하는 것이 창조를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때는 철학적인 근거들을 바탕으로 이를 강하게 논박했다.

 

그는 이런 견해를 거짓일 뿐만 아니라 이단적(falsae et haereticae)이라고 거절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철학자들의 논증은 필연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원인인 신의 의지는 자신의 결과를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실현하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문제들에 속하는 질문은 ‘증명으로’가 아니라 오직 ‘변증으로’만 해결될 수 있어서 개연성을 지닐 뿐이기 때문이다(STh I,46,1).

 

그렇지만 아퀴나스는 보수적 신학자들처럼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부정이 철학적으로 증명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적 신학자들도 그들의 입장을 필연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오직 개연성(probabilitas)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이렇게 그는 세계의 영원성도, 그것의 불가능성도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agnosticism)의 입장을 취했다. 아퀴나스도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세계의 영원성에 반대하는 신학자들과 연합해서 같은 주장을 펼쳐야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그는 독특하게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가 이런 입장을 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퀴나스가 신중한 태도를 보인 의도

 

아퀴나스는 시간 안의 창조를 위해 제시된 논증들이 필연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의 시작은 이성적인 논증 대상이 아니라 계시에 의존하는 신앙에 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신의 의지는 계시로 인간에게 드러날 수 있고 신앙은 이런 계시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세계가 시작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이나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이런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위해 유익하다. 곧 혹시라도 어떤 사람이 신앙에 속하는 것을 논증하려고 필연적이 아닌 논거들을 도입하여 우리가, 신앙에 속하는 것들을 이런 논거들 때문에 믿는 것으로 불신자들에게 생각되게 하여 그(불신자)들에게 비웃음의 자료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STh I,46,2).

 

신앙에 속하는 것들을 필연적이지 않은, 개연적인 논거들 때문에 믿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불신자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 안의 창조를 위한 논증의 허약함 때문에 정반대의 입장, 곧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려는 어설픈 노력은 오히려 신앙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세계의 영원성’ 문제에 지나치게 신중해 보이는 아퀴나스의 태도를 소극적이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철학자로서는 이성의 한계를 충분히 성찰하여 제시하고, 신앙인으로서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논거들로 말미암아 신앙이 비웃음을 사서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불가지론을 주장하며 논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퀴나스가 취한 태도가 외견상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자 나름대로 그가 택한 적극적인 방어 시도로도 볼 수 있다.

 

세계의 영원성 문제와 관련하여 아퀴나스가 취한 고유한 입장에는 근본적으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의 생각이 녹아 있다.

 

그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밝힘으로써 세계의 영원성과 창조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신앙에 고유한 역할들을 돌려주면서도 지속적인 대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은 그가 끊임없이 사용한 영원성, 필연성, 운동(변화)과 창조, 시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구분 등에서 잘 나타난다.

 

현대의 과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신학자들도 자신들의 입장만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학문의 고유한 영역과 한계를 인식하면서 대화가 필요함을 아퀴나스의 신중한 입장으로부터 배워야 하지 않을까?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9년 12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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