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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구한말 안중근의 천주교 교리인식과 신앙실천 - 김기호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1117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16

구한말 안중근의 천주교 교리인식과 신앙실천


- 김기호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본고는 안중근 의사의 천주교 교리 인식의 맥락 및 교리 인식에 기초한 신앙실천 활동의 시대적 특징에 대해서 서술하되, 황해도 출신의 열심한 신앙인이었던 김기호 회장의 교리이해 및 교회활동과 비교 검토하는 방법을 취했다. 김기호(金起浩 요한, 1824~1903)는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보다 약 반세기 이상 앞서 태어난 인물이었고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천주교 박해기를 경험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안중근이 경험하지 못한 ‘군란시대(窘難時代)’의 인물이었다. 이 양자의 직접적인 교유관계나 사승관계를 밝혀줄 단서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김기호와 마찬가지로 한국 초기교회 이래의 교리서인 정약종의 《쥬교요지》나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내용들 중에서 이단배척, 보유론적 설명, 토착화된 비유로 천주의 존재를 설명하는 점 등을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1901년에 저술된 김기호의 《봉교자술》과 1910년에 기록된 안중근의 《안응칠역사》에서는 박해시기의 저술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인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을 도입하여 교리를 설명하거나 믿음을 권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교리 설명은 개항을 전후하여 급격하게 밀어닥친 일제를 비롯한 서구 열강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앞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애국심(愛國心)과 인권의식(人權意識)이 반영된 시대적 산물이었다.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인권운동은 그의 신앙심과 혼연일체를 이룬 애국심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것은 최종적으로 당당하게 개화된 문명국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켜낸 자주 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 이르러 얻어낼 수 있는 참된 민권자유(民權自由)의 획득에 그의 활동의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었다. 안중근은 가톨릭 인권의식을 체계화하고 이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확장하여 민족과 화합하고자 노력한 진정한 의미의 한국 근대 천주교회의 사상가요, 실천가였다고 자리매김 된다.

 

 

Ⅰ. 머리말 - 신앙인 안중근 연구의 현황과 과제 -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 의사는 구한말, 일제를 비롯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입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에서 한국이 근대 서구문물 제도를 받아들여 중세적 정치사상, 사회제도의 외피를 벗어나고자 애를 쓰던 시기에 생장했다.

 

전국을 순교자의 피로 물들였던 7년간의 병인박해가 끝난 후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다시 조선에 재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1886년 선교사의 존재와 선교 활동을 제한적으로 묵인해준 ‘한불조약’을 계기로 하여 이전과는 달리 양대인(洋大人)의 권세를 누리며, 서울과 지방 각지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교세 확장을 도모하여, 해당 지역의 신자와 예 비신자들의 사회적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관과 향촌세력 등에 과감하게 맞서 싸웠다. 황해도 지역의 사목만을 전담하는 최초의 선 교사로 파견된 빌렘 신부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 진사를 비롯한 신천군 청계동의 안씨 일가를 입교시켰고, 1897년 1월 안중근도 19세의 나이로 세례(세례명 토마스)를 받고 곧바로 교회 활동에 나섰다.

 

안중근은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빌렘 신부의 복사 겸 전교회장으로서 본당내 각 공소를 순회하면서 선교 활동에 앞장섰고, 의협심과 배짱을 무기삼아 부당하게 침탈당한 천주교 신자들의 권익을 회복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02년부터 본격화된 '해서교안'(海西敎案)의 결과가 천주교회의 교세약화를 초래하면서, 안중근은 그간 자신이 추구해 온 교회활동의 한계성을 체감하였다.1)

 

이에 안중근은 ‘향촌사회’라는 지역적 테두리와 ‘양대인의 보호’라는 종교적 울타리를 벗어나 위기에 처한 민족과 국가를 위한 애국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1905년 조선왕조가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하자, 뮈텔 주교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회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종래의 친한적(親韓的)인 자세에서 한동안 중립적 관망을 하다가 서서히 친일적(親日的)인 자세로 바뀌어 갔지만,2) 천주교 신자 안중근은 오히려 이때부터 일제침략에 저항하여 교육계몽과 무장항쟁을 통한 애국활동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마침내 1909년 하얼삔 의거를 통하여 그의 항일투쟁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안중근은 이 과정에서도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잃지 않고 개인적인 신앙심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으며, 여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빌렘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음으로써 가톨릭 신앙인에 합당한 삶과 죽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3)

 

이와 같은 안중근 의사의 애국적 활동이 일제하 천주교회의 민족운동의 표본이 된 것은 그 자신의 독특한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서 최근 교회사학계는 집중적인 연구를 수행해왔다.4) 필자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예전부터 갖고 있던 관심을 최근에 와서 하나씩 글로 정리해오면서, 특히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에 영향을 준 인물들과 그 교리인식 체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본고를 집필하게 되었다.5)

 

본고는 교회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안중근 의사의 가톨릭 교리 인식의 맥락 및 교리 인식에 기초한 신앙실천 활동의 시대적 특징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안중근의 신앙심과 애국심을 기술하되, 기존 연구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황해도 출신의 열심한 신앙인이었던 김기호 회장의 교리이해 및 교회활동과 비교 검토해보고 이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신앙심과 교회활동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와 자리매김을 새롭게 시도하고자 한다.

 

김기호(金起浩 요한, 1824~1903)는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보다 약 반세기 이상 앞서 태어난 인물이었고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천주교 박해기를 경험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안중근이 경험하지 못한 ‘군란시대(窘難時代)’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격동의 시대인 ‘신앙 자유(信仰 自由)의 여명기(黎明期)’ 중 일부 기간(1879~1903년)을 함께 살다간 인물이었고, 또한 그들의 초반 활동 무대를 두고 보더라도 황 해도 지역이 공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김기호와 안중근은 천주교 인식의 측면에서 볼 때, 다 같이 신유 박해 때의 교회학자 정약종 회장의 《쥬교요지》의 인식을 계승하였으며, 신자들의 사회적 권익과 민족적 의무에 대해서 실천적 성찰을 가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김기호와 안중근의 사상과 활동을 비교 고찰하되, 계승(繼承)과 혁신(革新)의 측면을 천주교 사상사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데에 일정한 도움을 제공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1994년 안중근 의사 기념 학술 심포지엄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운동’에서 안중근에 관한 기존의 논문들과 전기 등 약간의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고 이를 <안중근 연보>로 정리해본 경험이 있다.6) 당시 필자는 안중근의 선교 활동과 그의 교리 지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이를 초기 교회의 교리와 비교해보면 좋은 연구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2000년에 와서 차기진 박사에 의해서 이러한 연구가 구체화되었다.7)

 

차기진의 연구에 의하면, 안중근은 부친 안태훈과 함께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읽으면서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신심을 함양하고 이를 전교에 활용하였다고 한다. 동 연구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의 핵심교리와 정하상의 〈상재상서〉는 첫째 삼혼설(三魂說) 중의 영혼설(靈魂說), 둘째 하느님께 대한 충효론(忠孝論), 셋째 천주의 존재증명과 천당 지옥론에서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8)

 

그러나 안중근의 교리 설명에서는 〈상재상서〉에 포함되지 않은 삼위일체(三位一體), 천주의 속성(屬性),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구속(降生救贖) 이론 등이 있고, 십계명(十誡命)의 내용도 〈상재상서〉 못지않게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십계명을 제외하고 모두 정약종의 《쥬교요지(주교요지)》 상, 하편의 내용에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9)

 

차기진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좀더 체계적으로 신학적인 분석을 가한 황종렬의 연구10)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으로 정리된다. 첫째, 안중근의 교리 인식에 나오는 천주의 존재와 영혼의 신령함에 대한 언급은 이미 《천주실의》에도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의 정의와 이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실천 지향적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11)

 

둘째, 안중근은 〈상재상서〉를 비롯하여 《천주실의》, 《칠극》 등의 다양한 교리서와 성인 및 순교자들의 전기와 《십이단》 등 기도문과 문답형식, 성사중심의 교리서들을 접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였는데, 그 자신의 세례명을 ‘토마스’라고 한 이유에 대해서 “로마에 ‘토마스’라는 성인이 있어서 아세아까지 나와서 종교를 선포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택했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적 신앙의식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12) 동시에 그는 신앙의 이유를 단순히 개인 윤리적인 구원에 제한하여 설명하지 않고 민족적 공동체적 구원관에 입각하여 선교 현장에서 청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지로 활용했다는 것이다.13)

 

셋째, 안중근의 교리 서술은 영혼이해, 신(神)이해, 그리스도 인식 등 전반적인 관점에서 정약종의 《쥬교요지》와 상통하는 점이 발견된다고 전제하면서도, 《쥬교요지》는 천주론 중심의 체계적 교리 진술로 기획되고 또 그렇게 작용했지만, 안중근의 교리는 인간 존재의 존귀함에 근거하여 그 존귀함의 근원으로서 천주께 대한 본분(本分)을 구현할 것을 설득하여 도덕-태평시대와 영세영복의 구원을 열어가도록 초대했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다고 인식했다.14)

 

필자는 이와 같은 선행업적들이 안중근의 가톨릭 교리 인식과 이해 구조에 대한 적절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좀더 심화된 사회사상사적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 연구자들이 안중근의 교리인식 체계와 비교를 시도한 《쥬교요지》, 〈상재상서〉 등의 저술연대가 안중근의 시대와 대략 50~100년 정도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과연 안중근(생몰: 1879~1910)과 정약종(생몰: 1760~1801) 내지는 정하상(생몰: 1795~1839)의 시대 사이에 다른 어떤 매개체가 없이 이들 상호관계를 직접적 계승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데에 미흡한 부분은 없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본고를 작성하게 되었다.

 

물론 안중근은 그의 부친 안태훈(安泰勳, 베드로)과 마찬가지로 정하상의 〈상재상서〉나 정약종의 《쥬교요지》를 직접 읽고서 그의 천주교 교리지식을 심화하고 확대해갔음이 틀림없고 그런 점에서 “안중근이 정약종과 정하상을 사숙(私塾)하여 계승(繼承)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은 너무나 많이 변화된 것이었다.

 

정약종이 활동하던 시기 즉 교회가 창설될 18세기 후반은 물론이고, 그 아들 정하상이 활동하던 시기, 즉 신유박해 때부터 기해박해가 일어나던 1839년까지는 기본적으로 국가공권력에 의한 공식적인 박해정책이 실시된 기간이었다. 반면에 안중근이 교회 활동을 전개하던 시대인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는 국가(=중앙정부) 차원의 박해는 이미 사라지고, 오히려 국왕을 비롯한 국가 권력의 상층부가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및 이들 국가를 배경으로 한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협조를 구하여 개화정책을 활발하게 추진해나가던 ‘신앙자유의 여명기’였다. 그러므로 이 두 기간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이나 교회활동의 배경이 되는 외부 환경의 측면에서 너무나 크고 뚜렷한 변화가 존재했다. 따라서 과연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서로 다른 시대에 살다간 인물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보다 객관적, 합리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필자는 박해시기의 인물인 정약종과 정하상 부자가 안중근에게 물려준 가톨릭 신앙의 유산(遺産) 외에도, 안중근이 신앙자유의 여명기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정립해간 교리 인식과 신앙 실천의 특징을 찾아내어, 이들을 가톨릭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란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본고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교리인식(敎理認識)과 신앙실천(信仰實踐)이란 두 가지 관점에서, 박해시기와 신앙자유의 여명기를 보다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중간 고리로써 안중근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안중근보다 연배와 활동경력이 다소 앞서는 교회 인물을 찾아보고자 했는데, 이렇게 하여 비교의 대상으로 선정한 인물이 바로 김기호(金起浩) 요한이다.

 

김기호(생몰: 1824~1903) 회장은 박해시대인 1824년에 출생, 1856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교회 활동을 하였고,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하여 약 10년 정도를 신앙생활을 거의 중단한 상태로 있다가 개항 직후부터 다시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을 보필하기 시작하여 1886년 한불조약과 이후에 전개된 이른바 ‘교안(敎案)’의 시대까지도 활동한 인물이었다.15)

 

그는 정하상과도 동시대에 산 적이 있고(1824~1839년간), 안중근과도 동시대를 살았으니(1879~1903년간) 정하상과 안중근의 사상적 가교 역할을 하기에는 적절한 시대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양자 사이의 직접적 교류나 간접적 사승 관계를 입증해줄 어떤 구체적 자료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그 가능성만을 추론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본고는 이러한 양자 사이의 본격적인 상호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선행작업의 일환으로써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런데 안중근과 김기호는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서, 황해도 지방에서 직접 전교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므로,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황해도 천주교회사의 통시적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나아가 두

사람은 모두 ‘황해도’라는 특정 지역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서울과 평안도 등지까지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갔으며, 한국 천주교회사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보더라도 결코 지역구(地域區)에 국한할 수 없는 전국구(全國區) 인재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김기호, 안중근 두 사람 상호간의 가톨릭 사상과 활동을 비교 분석함은 개항직후~구한말에 이르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시대적 특징을 파악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떤 연구자도 이러한 측면을 주목하고 양자간의 상호관계를 추구해보지 않았기에 그들 상호간의 사상적 맥락을 논리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안중근의 가톨릭 교리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선교 활동의 내용 및 신앙 실천의 일환으로 해석되는 인권운동과 민족운동 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김기호와 안중근의 상호관계에 대한 사상적 연계성과 차별성을 해명하는 방법을 통해서 논의를 진행시켜 보고자 한다.

 

 

Ⅱ. 교리인식(敎理認識)과 선교활동(宣敎活動)

 

안중근 의사의 교리 지식은 기본적으로 그 내용상 정약종의 《쥬교요지》, 정하상의 〈상재상서〉 등의 논리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데, 이점은 김기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김기호의 경우 입교 동기나 선교 활동의 양상이란 측면에서 볼 때 정하상과는 다르고 정약종과 보다 많은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김기호와 정약종의 동질성은 그들의 가톨릭 입교 동기에서 비롯된다. 김기호는 정약종과 마찬가지로 입교 동기가 순수한 종교적 구원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봉교자술》에 의하면 김기호는 한때 과거를 통해 사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이내 곧 포기하고 유교(儒敎), 불교(佛敎), 선교(仙敎, 道敎) 등을 골고루 섭렵하면서 회통(會通)할 것을 시도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구원의 참된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세추요》라는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구원의 길을 찾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16) 정약종도 일찍부터 벼슬살이에 미련을 버리고 장생불로(長生不老)를 추구하는 도교(道敎)에 심취했다가 가톨릭 교리를 전해듣고 한동안 고민을 한 후에 천주교에 귀의하게 되었다.17)

 

김기호와 정약종은 박해시기에 선교 활동을 하면서 ‘명도회’(明道會)18)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정약종이 교리 연구회 겸 선교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초대회장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기호도 병인박해 직전 베르뇌 주교가 재조직한 명도회의 회장이 되어 교리연구와 외교인 전교에 열중하였던 것이다.19) 이상과 같이 김기호와 정약종은 그들의 입교 동기가 순수한 종교적 구원(救援) 또는 진리추구(眞理追究)에 있었고, 일단 입교한 후에는 명도회의 회장으로서, 이 회의 목적에 걸맞게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에 헌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안중근의 경우는 입교 동기나 단체 활동에서 김기호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안중근의 입교 동기는 그 부친 안태훈 진사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 자발적인 진리추구의 결과나 종교적 구원의식에서 입교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20) 이점은 가장(家長)이었던 정약종 회장의 가톨릭 입교로 인해 자연스럽게 신자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했을 정하상 성인의 경우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따라서 김기호와 안중근의 신앙 입교 동기는 각각 달라서, 전자는 정약종과, 후자는 정하상의 그것과 유사하다.21) 한편 김기호는 정약종과 마찬가지로 명도회 활동에 적극 관여했지만, 안중근의 경우에는 정하상과 마찬가지로 명도회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김기호와 안중근은 다같이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에서 《쥬교요지》와 〈상재상서〉에서 설명한 방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즉 “푸른 하늘이 실재함에도 소경이 이를 보지 못하고, 후손이 조상의 모습을 모른다고 해도 조상은 반드시 존재했기에, 눈으로 보는 것을 믿을 것이 아니라 이치로 따져서 합당한 것을 믿어야 한다”는 《쥬교요지》의 가르침과, 〈상재상서〉에서 “유복자의 비유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아버지가 반드시 존재했다”는 설명방식을 김기호와 안중근이 다 같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22) 김기호와 안중근이 수용한 바 사물의 이치를 들어서 천주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모두 《쥬교요지》 이후 조선에서 토착화된 교리였다.

 

김기호와 안중근은 다 같이 이단 배척에 엄격한 당시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하였다. 김기호의 경우, 병인박해 직전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서북지방에서 전교할 때, 이단을 엄히 금하고 유불선(儒佛仙) 3교의 헛됨을 밝히 일러주었다고 했으며, 1890년 당시 부주교 두세 신부의 지시로 전국 각지의 회장들을 불러놓고 교리 재교육을 실시할 때, 가장 많이 힘써 공부한 부분이 이단을 파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술회했다.23)

 

안중근도 그가 세례를 받기 전에 빌렘 신부가 파견한 전교회장들이 와서 온 동네의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든가, 그 스스로 “구원을 향한 길은 천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24)고 강조하는 등의 예로 보아서, 그는 한때 매우 엄격한 이단배척 관념을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부분은 정약종 《쥬교요지》 상편에 불교, 도교, 잡귀신 숭배 등에 대해 강한 비판과 거부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점과 서로 연관되며, 정하상 〈상재상서〉의 ‘우사(又辭)’ 부분에서 제사(祭祀)를 쓸모없는 일로 치부하거나 신주(神主)를 금하는 등의 서술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되는 점이다.25)

 

이러한 점은 18세기 후반 중국에서의 의례논쟁의 결과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인 1791년 진산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1930년대 교황청의 유교 의례 제한적 허용조치 이전까지 한국천주교회의 특징적인 면모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김기호와 안중근은 모두 《십계(十戒)》와 《칠극(七克)》의 가르침에 공감하여 그들의 교리 인식과 선교 활동에서 이 책들에 실린 내용들을 십분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6)

 

이 책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실천윤리와 관련된 책들로 이미 초창기부터 한국 천주교회에서 널리 읽혀져 왔으며, 그 내용들이 유교적 가치관 내지 수양론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에는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한다.

 

계명이란 천주께서 계시로서 가르쳐주신 열 가지 계명입니다. … 이 열 가지 계명을 종합하면 두 가지로 돌아가니 즉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남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위 세 가지 계명은 천주를 흠숭하여 섬기는 절차요 아래 일곱 가지는 자기를 닦고 성찰하는 공부입니다.27)

 

정하상은 십계 중 제4~10계명, 즉 하칠계(下七誡)가 모두 충효(忠孝)와 우애(友愛), 인의예지(仁義禮智)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 계명들은 집안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훌륭한 덕목이라고 설명했다.28) 〈상재상서〉에는 10계명에 이어 칠극(七克)의 가르침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언급했다.

 

사람의 마음이 위태롭고 도(道)를 구하는 마음이 미약하여 자칫하면 죄를 범합니다. 사욕과 편정이 백방으로 유인하여 교오(驕傲)로 꾀이고 분노(憤怒)로 꾀이고 탐도(貪饕)로 꾀이고 사음(邪淫)으로 꾀이고 질투(嫉妬)로 꾀이고 간린(慳吝)으로 꾀이고 해태(懈怠)로 꾀여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시시로 경계하여 물리치지 아니하고 또 그때마다 공격하지 아니하면 함정에 빠짐을 면치 못합니다.29)

 

정하상은 〈상재상서〉에서 이처럼 ‘십계’와 ‘칠극’을 유교적 관점에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하여 천주교의 우수성을 보유론적 관점에서 적절히 설명하였다.30) 안중근과 김기호는 정하상의 〈상재상서〉와 마찬가지로 십계와 칠극의 내용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복음을 전했으므로 그들의 천주교 이해나 전교방식의 기저에는 보유론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기호와 안중근의 전교 방식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직후부터 유교적 지식을 가진 양반층들을 대상으로 전교할 때 인용해온 보유론적(補儒論的) 방식에 속한다는 것이다.

 

보유론적 교리설명 방식은 정약종 《쥬교요지》의 경우에는 그 색깔이 옅어져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31), 정하상 〈상재상서〉에는 앞서 설명한 십계나 칠극을 언급한 외에도 여러 곳에서 유교 경전을 거명, 인용하거나 양지설(良知說)을 활용하여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는 부분등을 통하여 보유론적 경향을 확연히 드러내었다.32) 그러므로 김기호나 안중근의 보유론적 전교방식은 정하상의 〈상재상서〉에 영향을 받은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보유론적 설명에는 때로 〈상재상서〉에도 없는 부분이 보일 정도로 그 활용 폭이 매우 넓어지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둘다 유교 경전의 고사성어를 인용하면서 영혼불멸(靈魂不滅)과 관련된 천주 교리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다음과 같은 언급들은 《쥬교요지》나 〈상재상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김기호 안중근 두 사람의 저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 《봉교자술》: 또한 육신이 죽으면 그뿐이라고 하는 말은 우부우부(愚夫愚婦)의 무식한 말이요, 또한 육신 사욕을 제멋대로 살아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옛적 중국 글이나 착한 사람의 말로 볼지라도 영혼이 하늘로 간다고 아니하였는가?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세 임금이 하늘에 있고 … 문왕(文王)이 하늘로 오르고 땅으로 내리며 상제(上帝)의 좌우에서 그를 돕고 있다. 하우씨 말씀에는 ”사는 것이 부침 (浮沈)이요,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으니, 삶은 잠깐 머무는 객지요, 죽음은 본 고향인 줄을 알 것이다. 예부터 전하여 오는 말에, ”착한 노릇을 하면 좋은 곳으로 간다“ 하니, 이것이 다 허무 맹랑한 말인가? 또한 영혼이 없다하면 집집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을 불러 혼백이라 신주(神主)라고 이름하여 위하는 일이 무슨 미친 짓이 아닌가?33)

 

▽ 《안응칠역사》: 옛날 요(堯) 임금이 말한 바,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帝鄕)에 이르면 또 다른 무슨 생각이 있으리오?”라고 한 것이나, 우(禹) 임금이 말한 바, “삶이란 붙어있는 것[寄也]이요, 죽음이란 돌아가는 것[歸也]라고 한 것과, 또 “혼(魂)은 올라가는 것이요, 넋(魄)은 내려가는 것이라”고 한 것들이 모두 다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이오.…34)

 

위의 인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김기호와 안중근은 다 같이 중국의 고전인 시서(詩, 書)를 인용하면서 이른바 전설상의 태평성대로 불려진 요·순·우(堯舜禹) 3대의 제왕들이 한 말로 전해진 고사들을 들어 한결같이 영혼의 불멸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김기호는 제사를 모시는 데 쓰는 사당의 신주를 예로 들면서 신령한 영혼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혼이 없을 량이면, 집집마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을 불러 ‘혼백’(魂魄)이라 ‘신주’(神主)라 이름하여 위하는 일이 무슨 미친 짓이냐? 슬프고 가련하다. 우리 사람이 도무지 모르는 연고라 사람마다 모두 말하기를, “나는 안다”고 하나, 참으로 아는 법과 도리는 육목육이(肉目肉耳)로 듣고 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치를 생각하여 신목신이(神目神耳)로 듣고 보아야 아는 것이다.35)

 

이처럼 신주를 인용하여 영혼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은 정하상의 〈상재상서〉에서 단순히 신주를 부정(엄금)한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즉 김기호는 제사에 사용되는 유교식 신주를 결코 용인하지 않으면서도 신주의 예를 활용해서 유교적 의례에 익숙한 외교인들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 호응하여 일단 입교를 예비하는 단계가 되면, 그가 활용했던 신주마저도 점차 비판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교리를 설명해갈 것이다. 이처럼 유교와 관련된 내용을 경전이나 의식에서 인용하여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되, 종래에는 그 유교의 부족한 점까지도 지적하여 천주교가 유교에 비해 우월한 종교라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식이 “합유(合儒)→보유(補儒)→초유(超儒)”의 3단계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보유론(補儒論)의 논법에 속한다.36)

 

김기호는 이같은 보유론의 교리설명 내지 전교방식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중근의 경우에도 유교의 혼백(魂魄)에 대한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천주교의 영혼론과는 다르다.37)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을 안중근이 이같은 유교의 학설을 인용함은 김기호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보유론의 논리구조를 그의 전교에서 익숙하게 활용하고 있었음을 반증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김기호와 안중근이 유교 고사를 인용한 것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생사(生死)를 각각 기숙(寄宿)과 귀향(歸鄕)에 비교한 것이나 전통적인 혼백(魂魄)의 개념을 들어 영혼의 불멸을 강조하는 점은 매우 주목되는 양자간의 공통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그들보다 앞서 천주 교리를 이해하고 설명한 정약종의 《쥬교요지》나 정하상의 〈상재상서〉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에 해당된다.

 

김기호나 안중근의 ‘영혼’에 대한 보유론적 설명은 그들의 가톨릭 교리 설명이나 외교인 전교에서 ‘영혼’의 존재 및 그 고귀함을 강조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곧 영혼을 지닌 인간 존재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것으로, 정약종이나 정하상의 저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권(人權)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약종의 《쥬교요지》나 정하상의 〈상재상서〉 등에서도 일단 영혼에 대한 가르침은 명백하게 나와 있는데, 이를 교리를 설명하거나 전교할 때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하느님 또는 신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지 않았다는 차이점이 있을 따름이다.

 

〈사이 죽은 후의 령혼이 이셔 샹벌을 닙니라〉

사의 혼은 뎨 몸을 조 나 거시 아니라 몸이 삼길 졔 텬쥬셔 신령 혼은 붓쳐 쥬시이 … 그러므로 사은 즘과 달나 령혼이 로 이셔 몸의셔 소사 난 거시 아닌고로 몸이 죽어도 령혼이 아 죽지 아니니라38)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높으니, 사람이 높다고 하는 것은 그 혼이 신령한 때문입니다. 그런 즉 이른 바 천명을 일컬어 성(性)이라고 하니, 태중에 있을 때 (하느님이) 부여해주신 것입니다. 어찌 초목이나 금수와 더불어 다함께 썩어 없어지겠습니까?39)

 

김기호와 안중근은 똑같이 《쥬교요지》나 〈상재상서〉에도 나오는 영혼의 신령함과 존귀함을 설명한 후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이 부여받은 고유한 본성[性命, 품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 《봉교자술》: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대군 대부이신 천주님의 명령으로 성품(性稟)을 받아 태어났음을 당신들은 아느냐, 모르느냐?”고 말하였다. … 이에 성교 도리를 강론하니 그 사람은 영혼의 존재를 말할 때 감동하여 수긍하는 것 같았다. 다시 여러 사람을 효유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만약 자기 영혼을 알지 못하면 어찌 능히 주교의 품위 존귀함을 알겠느냐?” 하고 영혼의 묘한 이치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니, 여러 사람들도 영혼의 말을 듣고 심히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 손을 끼고 조용하게 열심히 듣고 있었다. 주교께서 여러 무리들의 동정을 살피시고 손을 들어 무릎을 치며 하시는 말씀이 “너희 말이 심히 좋으니 또 다시 하여라” 하심으로 이같이 도리를 강론하기를 밤이 깊도록 하였다.40)

 

김기호는 병인박해 직전 베르뇌 주교를 모시고 황해도 외교인 촌에서 전교할 때, 위와 같은 일장연설을 함으로써 베르뇌 주교를 침해하려는 외교인들의 기세를 꺾어버리고, 그들에게 영혼의 고귀함과 불멸함을 거듭 설득함으로써 하느님의 존재를 입증하고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이에 베르뇌 주교는 김기호의 전교 연설이 매우 효과적임을 감탄하고 권장하기를 마지않았다. 결국 김기호 회장은 영혼론의 설파를 통하여 선교사의 인권을 지켜준 셈이다.

 

이후 김기호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외교인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할 때면 어김없이 그의 특이한 영혼론을 먼저 꺼내어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한 다음에 천지창조, 강생구속, 성령강림, 천주의 은혜 등으로 천주교리를 설명해나갔다.41)

 

▽ 《안응칠역사》: 사람에게 만일 영혼이 없다고 하면 육체만으로는 짐승만 같지 못할 것이요. 그러나 허다한 동물들이 사람의 절제를 받는 것은 그것들의 혼이 신령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영혼의 귀중함은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인데, 이른바 천명(天命)의 본성(本性)이란 것은 그것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천주께서 사람의 태중에서부터 불어 넣어주는 것으로서 영원무궁하고 죽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이 오. 그러면 이 천주는 누구인가? …42)

 

안중근의 경우에도 전교할 때 앞부분에 영혼론을 배치한 점이 발견된다. 그가 옥중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쓴 자서전에 의하면, 빌렘 신부를 모시고 황해도 각 고을을 전교하러 다니면서 일장 연설을 할 때, 먼저 자신에게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고 자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바로 위와 같은 영혼론을 전개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신령하고 불멸하는 영혼을 지닌 인간의 고귀함과 하느님이 그러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 상선벌악(賞善罰惡), 천당지옥(天堂地獄), 강생구속(降生救贖), 부활승천(復活昇天) 등의 교리에 대해서 차례로 설명해 나갔다.

 

이처럼 김기호와 안중근의 교리 교육이나 전교 내용을 살펴보면, 신령하고 불사불멸하는 영혼의 고귀함과 이러한 영혼을 지닌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교리를 설명해나가는 방식을 띠고 있음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데, 이는 정약종이나 정하상의 교리 설명 방식과는 다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상당부분 그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과 관련이 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정약종과 정하상의 시대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천주교 탄압이 자행되던 박해시대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일이었고, 박해를 피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기에는 자칫 반란을 도모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인권(人權)을 들먹이기보다는 천주교 신자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착한 백성임을 강조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었다.43)

 

그러나 개항 이후 국가 차원의 공식적 박해가 사라지고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처음엔 묵인의 방식으로 그리고 교안을 통한 갈등을 겪고 난 이후에는 정교조약(政敎條約)의 형태로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조금씩, 단계적으로 현실화되어갔다.

 

개항 이후 김기호와 안중근이 교회활동에 참여한 때는 바로 이러한 ‘신앙자유의 여명기’에 해당이 되기에 이전과는 달리, 서구문물의 영향을 받아 인권의 소중함에 개안(開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권의식에 눈뜬 교회와 신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전교활동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외교인들에게 전교할 때는 인간의 고귀함을 일깨워주면서 그 고귀한 품위에 맞는 도덕적 삶을 위해서 천주교 신앙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으로 나아갔고, 신자들에게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신앙인으로서의 교회적,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아갔던 것이다.44)

 

개항이후 이러한 천주교 교리 설명 방식의 변경은 ‘신앙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조금씩 획득해감으로써 등장하게 된 새로운 설교 방식으로 이해되며, 교회 내 하느님의 백성 개개인의 인권(人權)의 소중함과 그에 따른 권리 의무를 일깨워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안중근의 선교방식과 교리 인식에는 그와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김기호의 그것과 상당한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이다.

 

 

Ⅲ. 인권의식(人權意識)과 신앙실천(信仰實踐)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김기호의 《봉교자술》(1901년 3월)이나 안중근의 《안응칠역사》(1910년 3월)에서는 기본적으로 교리를 설명할 때 박해시기의 저술인 《쥬교요지》나 〈상재상서〉를 상당부분 인용하면서도, 박해시기의 저술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인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을 적극 도입하여 교리를 설명하거나 믿음을 권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는 안중근의 교리인식의 일정한 부분이 김기호의 그것과 동일한 맥락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러한 그들의 교리인식은 실재로 교회 구성원의 권익을 신앙생활과 교회활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공통된 민권의식(民權意識), 내지는 인권사상(人權思想)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안중근 의사가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한 교회 내 인권운동과 선교활동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어느 날에나 저같이 악한 정부를 한 주먹으로 두들겨 개혁한 뒤에,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쓸어버리고 당당한 문명독립국(文明獨立國)을 이루어 명쾌한 민권자유(民權自由)를 얻을 수 있겠는가?45)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인권운동은 그의 신앙심과 혼연일체를 이룬 애국심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것은 최종적으로 당당하게 개화된 문명국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켜낸 자주 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기호와 안중근의 인권사상은 그들의 영혼관과 천부의 품성관에 기반을 둔 것으로 하느님이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성품을 나누어 주었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의 평등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모두 상선벌악(償善罰惡)하시는 하느님의 공평하고 정의로움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현세를 도덕(道德)의 시대, 정의(正義)의 사회로 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보다 적극적인 인권활동을 펼친 사람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이미 기존의 연구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교회활동 초기에 황해도의 저 유명한 해서교안의 원인이기도 했던 양대인 자세적(洋大人 藉勢的) 태도를 견지하여 빌렘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권위를 빌렸다. 그리하여 이 외국인의 권위에 의지하여, 조선의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기도 하고 약자로서 불행을 당한 교우들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송사(訟事)를 불사하기도 했던 것이다.46)

 

그의 이러한 활동은 비록 그 뜻이 민권의 회복 내지는 수호에 있었다고 하지만 제국주의의 속성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된 미숙하고 불완전한 인권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안중근은 부패한 관장이나 향촌세력가뿐만 아니라 교우들의 의견을 압제하며 권위를 내세우는 프랑스 선교사 빌렘에게도 항의를 할 생각을 하다가 사전에 이런 의도를 알아차린 빌렘 신부에게 무수한 구타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물론 이 치욕스런 핍박을 참아 받고 나중에 서로 화해함으로써 안중근은 개인적으로 그에게 종부성사를 주러 교구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떠나 온 빌렘 신부의 호의를 입을 수 있었다.

 

안중근은 선교사와 갈등하고 화해하는 경험을 통해서 교회 안팎의 여러 이해집단 간에 놓여진

교안(敎案)의 해결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외국인의 신앙적 가르침은 경청하고 순종하지만 국가와 민족의 앞날에 관련된 중대사(重大事)에 대해서는 비록 선교사라고 할지라도 외국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주위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주체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47)

 

안중근은 한때 그가 몸담고 있던 청계동 본당 신자들의 총대가 되어 천주교를 비방하고 신자들에게 횡포를 자행한 금광감리(金鑛監理) 주가(周哥)를 찾아가서 일장판결을 시도했다. 또 다수의 신자가 포함된 옹진군민(甕津郡民)들이 전참판 김중환에게 부당하게 토색질 당한 돈을 되찾기 위해 서울을 드나들면서 노력한 일, 옹진 군민이자 신자였던 이경주(李景周)가 해주부 지방대 위관인 한원교(韓元校)에게 집과 아내를 강탈당한 사건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단신으로 나선 일 등의 경험도 있었다.48) 이는 모두 그가 수행한 신자들의 권익옹호 운동 내지 교회 내 민권운동의 범주에 속한다.

 

이와 같은 활동 경험을 통하여 안중근의 인권의식은 최초의 대외 의존적 사고방식에서 나중에 주체적 의식으로 바뀌어 갔다. 또한 초기 개개인의 경제적 이권 또는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사안을 해결사처럼 풀어보려는 소영웅주의적 경향에서 차츰 벗어나 교육과 식산흥업, 국채보상운동 등과 같은 애국계몽운동의 영역으로 발전해 갔고, 마침내는 그 한계성을 절감하여 모든 것을 청산하고 일제의 군사력을 직접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의병전쟁 또는 의열투쟁에 나섰던 것이다.49)

 

안중근의 투철한 인권의식은 의병전쟁 기간 중에 일본군 포로를 살해하지 않고 국제법의 관례에 따라 석방해주었다가 결국 패전의 불명예를 덮어쓰게 된 예를 통해서,50) 또 수많은 살상자를 낼 수밖에 없는 전면적인 전투를 지양하고, 조선을 침략한 대표적인 제국주의 정객을 사살함으로써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려는 그의 독립전쟁론의 결실인 하얼삔 의거를 통해서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안중근을 죽음으

로 몰고 간 하얼삔 의거는 결국 그의 애국심에 근거한 인권사상의 총화요 결실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김기호는 안중근에 비하여 다소 앞선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즉 아직 교안이라고 하는 천주교인과 외교인간의 본격적인 권리투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또한 안중근에 비해 다소 소극적인 인권의식 때문에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전교회장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인 1896년경에 원산의 일부 교우들이 좋지 않은 표양으로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에 서울에서 원산까지 왕림하여 교우들을 설득하고 교안의 위기를 해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 데51), 이는 김기호의 인권의식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김기호는 애국심과 정의감에 입각하여 교우들을 설득하면서 그들의 인권이 외교인들에게 무시당하지도 않고 또 부당하게 외교인 들을 침해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하였는데, 당시 원산본당의 브레 신부가 이를 두고 기술한 바와 같이 일제 치안당국이 천주교회를 경계 하는 눈으로 지켜볼 정도로 다소 과도한 사도적 열성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김기호 요한은 1882년 그의 전교지역이던 서북지방에서 상경하여 1892년 경까지 약 10년동안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를 보필하여 활발한 전교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는 블랑 주교로부터 전국 평신도 회장[都會長]으로 임명되어 푸아넬, 두세 신부 등과 함께 협력하여 〈소원신종(溯原愼終)〉 등 교리서를 저술하고, 이를 토대로 각 도의 회장들을 불러모아 교리에 관한 재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페낭 유학을 위해 서울에서 체류하던 예비신학생들에게 필요한 교리와 한문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김성학, 강도영, 한기근 등 후일 사제가 된 신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블랑 주교가 추진했던 제반 사회사업을 보좌하고 실무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니, 영아원(嬰兒院), 양로원(養老院) 설립과 운영, 명동성당의 대지 구입 및 인허가 획득, 정지작업 등의 일에 참여하여 평신도 봉사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였다. 또 블랑 주교가 선종한 이후부터 뮈텔 주교가 부임하던 초기까지 이전부터 수행해온 성경번역에 나서서 1891년 총 19권의 《성경직해광익》을 번역하였다.52)

 

김기호는 1901년에 저술한 《봉교자술》 서두에서 당시 교회 내외에 문제가 되고 있었던 교안(敎案)의 원인이 되기도 한 일부 신자들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모든 사람이 천주의 은혜를 힘입어 교(敎, 천주교)에 들어오는 자 그 길이 여러 가지이다. … 혹 세상의 무슨 이익을 바라고 교에 투신하는 자도 있으며, 혹 그 세태를 엿보고 풍속을 좇아 따르는 이도 있으니, 이것이 다 교에 들어오는 길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천주께서는 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고루 베풀어 장차 구령할 수 있는 희망이 있게 가르쳤으나 슬프게도 저들 중에는 게으르고 방만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길을 알지 못하여 게으른 마음으로서 도리의 오묘함을 배우지 아니하고, 또 도리의 참 뜻을 익히 알기를 꺼려하여 스스로 방종하니 슬프다. 이런 사람의 영혼 사정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겠느냐? … 또 사람들은 다 천주의 불초한 자녀가 되니, 사해동포(四海同胞)와 천하(天下)가 다 형제이다. 어찌 우애(友愛)하는 성정(性情)이 없을 것이냐? … 사람이 동포를 경송히 보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는 곧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천주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라.53)

 

위 글을 쓸 당시 김기호는 이미 회장직에서 물러나 하우현에 은거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신자와 비신자간의 분쟁에 주목하였을 것이며, 그 원인의 일단이 신자들의 현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세속적인 입교 동기와 이에 따른 교리학습의 부진 및 비신자 동포들에 대한 우애의 정이 부족한 것이라고 분석한 듯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가 1896년경 원산에서 교우와 외교인간 분쟁이 일어났을 때 천리길을 멀다 않고 달려가서 양자 간의 화해를 중재하였던 일은 그의 철저한 신앙심과 동포사랑에 기인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안중근의 경우도 그의 자서전에서 교회 입교 직후부터 시작된 그의 초창기 교회활동을 성찰하면서 특히 그의 가문도 관련되어 있었던 교안사건에 대해서 자신을 포함한 신자들이 저지른 명백한 불법과 무리한 행위들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고백하였다.54)

 

이처럼 신앙자유의 여명기에 활동한 대표적 평신도 활동가들인 김기호와 안중근은 민족 앞에 저지른 당시 교회의 이기주의적 자세와 그로 인해 야기된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서 다 같이 성찰하는 태도를 보여주는데 이는 이들에게 형성되어 간 인권사상과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기호와 안중근의 가톨릭 교리 이해나 전교활동에는 천부인권론에 입각한 인권사상이 나름대로 체계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는데, 활동 초창기의 미숙함이나 편향된 성향이 점차 탈각되고 민족 전체의 이익과 진정한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한 고민들이 성숙해간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인권사상은 결코 가톨릭 신자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종교 이기주의가 아니었고, 오히려 개신교를 포함한 비신자 집단에게도 동일한 권리를 인정하면서 가톨릭 특유의 보편성과 포용성을 활용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한 시대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김기호와 안중근은 한때 그들의 선교활동 장소가 개신교 세력이 강했던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였기 때문에 개항기 한국에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온 개신교(改新敎, 프로테스탄트)와의 경쟁의식 속에서 전교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활동과 교리인식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가톨릭 중심의 구원관을 유지하면서도 개신교 교의나 그 신자들에 대하여 특별히 필요이상의 비난이나 흥분에서 나온 부정적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우선 김기호 요한은 1879년경 로베르 신부의 지시로 저술한 《구령요의(救靈要義)》에서 “인간 영혼의 고귀함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부여한 고유한 인품(=天性品)으로 인하여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천주의 계명(誡命)을 받았으므로 누군들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55)라고 하면서 꼭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천부의 인품에 간직한 양심의 빛으로 구원의 길에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인식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개항 직후 1880년대에 블랑 주교의 지시로 여러 차례 평양과 중화 등지로 전교활동을 하러 갔지만 그가 그곳에 진출하던 개신교 신자들과 의견다툼이나 물리적 충돌을 벌였다는 기록은 한 번도 찾아지지 않는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 이단을 격파하여야 한다는 교리에 대해서 각도의 전교회장들과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 말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내용이다.56)

 

한편 안중근의 경우 비록 전교하러 다닐 때는 천주교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라고 설명했지만,57) 황해도 지방에서 특히 안중근이 전교하러 다녔던 재령이나 해주 등 개신교 신자들과 천주교 신자들간의 충돌과 다툼이 적지 않았던 곳에서도 한 번도 개신교 신자들과 직접 충돌했다거나 다투었다거나 하는 내용이 적어도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안중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우덕순과 의병활동 당시부터 알고 지내면서, 특히 하얼삔 의거 당시에는 그와 함께 특공대의 일원으로 이토오를 포살하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사실마저 발견된다. 그러므로 안중근 의사의 경우에도 매우 개방적인 종교관과 구원관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그는 1906년 이후 평안도 지방에서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할 때,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안창호와도 매우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 진다. 이러한 사실은 안중근이 민족운동에 참여할 때 이미 그 자신의 천주교 신앙은 매우 성숙해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김기호와 안중근은 모두 천주교를 통한 영혼 구원을 굳건하게 믿고 있었지만, 개신교와 그 신자들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로 인식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데 특별한 혐의나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서 김기호와 안중근은,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경쟁과 다툼으로 흔히 표현되는 당대의 일상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우호적인 차원에서 신앙을 떠나서 전 민족 구성원이 다함께 개인과 사회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단합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Ⅳ. 맺음말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인권운동은 그의 신앙심과 혼연일체를 이룬 애국심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것은 최종적으로 당당하게 개화된 문명국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켜낸 자주 독립국가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 이르러 얻어낼 수 있는 참된 민권자유(民權自由)의 획득에 그의 활동의 모든 에너지가 집중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이와 같은 애국심과 신앙심의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은 초기 교회 때부터 조선의 양반 지식인 신자들에게 널리 읽혀져 온 《천주실의》, 《칠극》, 《십계》 등의 보유론적 교리서와 함께, 18세기 후반에 저술된 정약종 회장의 《쥬교 요지》와 1830년대에 저술된 정하상 성인의 〈상재상서〉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필자가 파악하기에도 안중근과 김기호는 한국 초기교회 이래의 교리서인 《쥬교요지》나 기해박해 때의 〈상재상서〉의 내용들 중에서 이단배척, 보유론적 설명, 토착화된 비유로 천주의 존재를 설명하는 점 등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김기호와 안중근의 교리 설명은 초기교회나 박해시대의 저술에는 없는 새로운 방식이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개항을 전후하여 급격하게 밀어닥친 일제를 비롯한 서구 열강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앞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애국심(愛國心)과 인권의식(人權意識)이 반영된 시대적 산물이었다. 1901년에 저술된 김기호의 《봉교자술》과 1910년에 기록된 안중근의 《안응칠역사》에서는 박해 시기의 저술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인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을 도입하여 교리를 해석하거나 믿음을 권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기호와 안중근은 모두 황해도 출신으로서 황해도 지역에서 교회활동을 전개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1879년부터 1903년까지 약 24년간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었다. 1876년 개항직후부터 1890년대 초반까지 김기호가 명도회 회장 겸 전국 평신도 대표회장으로서, 선교사들과 함께 각 지역의 회장들이 이해하기 쉬운 교리서를 저술하고 이를 가르치는 데 열중했던 사실을 볼 때, 비슷한 시기 서울의 천주 교회당 안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고 비로소 천주교리를 체계적으로 접하게 된 안태훈이나 그의 아들 안중근에게 전해진 수많은 교리서들 중에는 김기호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재해석되고 새롭게 저술된 《구령요의》나 《소원신종》 등의 교리서가 포함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러한 가설을 입증해줄 교유관계(交遊關係)나 사승관계(師承關係)와 관련된 기록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시대 인물로서 그들의 교회활동 시기의 선후나 교리이해 및 선교활동의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안중근이 김기호의 교리 인식 체계를 상당부분 계승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여진다.58) 앞서 언급한 김기호와 안중근의 자서전에서 각각 드러난 교리 인식상의 공통점은 바로 이같은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 다.

 

김기호와 안중근의 교리 인식은 교회 구성원인 신자 개개인의 권익을 신앙생활과 교회활동에서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는 민권의식(民權意識) 내지는 인권사상(人權思想)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들은 모두 천주교의 구원관을 견지하면서도 개신교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로 인식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특별한 편견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서 김기호와 안중근은,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경쟁과 다툼으로 흔히 표현되는 개항기 교회사의 일반적인 흐름과는 달리, 가톨릭과 개신교가 상호 우호적인 차원에서 교파(敎派)를 떠나서 연대하고, 전 민족 구성원이 다함께 개인과 사회의 구원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일제 침략에 맞서 싸워 당당한 자주 독립국을 쟁취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를 다져간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에서 서술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안중근은 김기호와 마찬가지로 박해시대의 신자가 저술한 대표적인 교리서인 정약종의 《쥬교요지》와 정하상의 〈상재상서〉 등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안중근은 그 입교동기와 단체활동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김기호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김기호는 입교동기와 단체활동이란 측면에서 정약종과 동일한 성향을 보이고 있으며, 보유론적 교리 설명이란 점에서는 〈상재상서〉의 내용을 상당부분 계승한 측면이 보인다. 한편 안중근은 정약종이나 김기호와 달리, 그 입교는 부친의 영향력 하에서 타의로 이루어진 것이며, 명도회 활동과 무관한 점에서 정하상의 경우와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이처럼 안중근은 김기호와 상이한 점을 보이면서도 영혼론과 관련된 보유론적 교리 인식이나 복음선포의 내용 및 민족애에 입각한 올바른 인권의식의 제고와 그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질성을 보여준다. 이는 박해기의 저술인 《쥬교요지》나 〈상재상서〉 단계에서는 드러낼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성을 극복한 점으로 평가되며, ‘신앙 자유의 여명기’에 나타난 새로운 특징으로서 주목된다.

 

안중근은 김기호와 마찬가지로 황해도 출신으로서 황해도에서 전교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국가적 민족적 차원으로 그 활동범위를 넓혀갔으며, 천부인권론에 바탕을 둔 교리인식과 개방적인 구원의식에 입각하여 열성적인 전교 활동을 펼쳐 나갔는데, 이점 또한 김기호와 동일한 측면이 있다.

 

김기호는 신자들과 비신자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신자들 스스로 올바른 구원관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비신자 동포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으며, 실제로 1896년 원산에서의 분쟁사건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안중근은 외국인 선교사의 권세에 의지하여, 개별 사안에 개입하는 해결사의 행위와 다름없는 초창기의 개인적 투쟁에서 벗어나 점차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한 우리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인권을 수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교육, 식산 등의 애국계몽운동과 대규모 의병전쟁의 단계를 차례로 거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얼빈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의 단계로 가서 그의 애국활동의 결실을 맺었으니, 이는 그의 인권투쟁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기호와 안중근의 직접적 교류관계나 사승관계를 입증해줄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안중근의 가톨릭 사상이나 인권 활동에 미친 김기호의 영향력을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양자 사이의 관계는 본고에서 살펴본 교리 인식이나 선교활동의 특징 외에도, 앞으로 양자 사이의 교유관계나 사승관계를 포함하여 19세기 후반 서울 지역의 교회활동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때 좀더 분명 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된다.

 

안중근은 김기호와 함께 박해시기 한국적 교리 이해의 결과들을 신앙자유의 여명기로 계승, 발전시켰으며, 박해기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인권의식을 체계화하고 이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확장하여 민족과 화합하고자 노력한 진정한 의미의 한국 근대 천주교회의 사상가요, 실천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원사료 및 사료번역본

 

《쥬교요지》(절두산 천주교 순교박물관 소장원본, 서종태 편, 2003, 국학자료원 간행)

《주교요지》(1909년 간행본, 하성래 역주, 1985, 성황석두루가서원 간행)

〈상재상서〉(정하상 저, 1981년 배론성지 관리소 원문대조 역주본)

《安東金氏 大司成派譜》(국립도서관 소장)

《奉敎自述》(김기호 저, 1901.3,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救靈要義》(김기호 저, 1879년경,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溯原愼終》(김기호 저, 1887,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중 〈봉교자술〉, 〈구령요의〉, 〈소원신종〉(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1989)

《신앙인의 유산 -4대에 걸친 발자취-》(김재환 저, 1979. 4, 신일인쇄사)

《국역 안응칠 역사》(윤병석 편,

《안중근 전기전집》

 

2. 연구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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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식, 《한국 근대 천주교회와 향촌사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12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2006.9

신운용, 《안중근과 그 시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3

안중근기념사업회 편, 《안중근 연구의 성과와 과제》, 2010.9.2

조광,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2.25

김운회, 〈김기호 연구 - ‘봉교자술’을 중심으로 -〉, 《한국교회사논문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노길명,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 《교회사연구》 제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신운용, 〈안중근의 민권 · 민족의식과 계몽운동〉, 《안중근과 그 시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3

원재연,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황해도 천주교회 - 김기호와 비교연구를 중심으로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표문, 2009.10)

―――,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황해도 천주교회〉, 《안중근 연구의 성과와 과제》, 안중근기념사업회 편, 2010.9.2.

―――, 〈조선후기 천주교 서적에 나타난 ‘良知說’에 대하여〉, 《양명학》 제20호, 한국양명학회, 2008.7

―――, 〈황사영 백서의 인권론적 고찰〉, 《법사학연구》 제25집. 한국법사학회, 2002.10

―――, 〈김기호(요한, 1824~1903)의 생애와 활동〉, 《한국근대사와 종교문화》(정두희 외 지음),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2003

―――, 〈安重根 年譜〉, 《교회사연구》 제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 〈안중근의 생애와 활동〉(상: 가계와 신앙생활 / 중: 애국활동과 순국 / 하: 유묵) 《교회와역사》 제218~220호, 1993년 7~9월

윤경로, 〈초기 한국 신구교 관계사 연구 - 海西敎案과 文書論爭을 중심으로 -〉, 《한성대학논문집》 1985

윤선자, 〈‘한일합병’ 전후 황해도 천주교회와 빌렘 신부〉,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집(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6)

조광, 〈안중근 연구 백년 : 현황과 과제〉, 《한국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2.25.)

―――, 〈안중근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경인문화사, 2010.2.25)

차기진,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 《교회사연구》 16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 〈정약종의 교회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제15집(2000, 한국교회사연구소)

황종렬, 〈‘안중근 편 교리서’에 나타난 천 · 인 · 세계 이해〉, 《안중근과 그 시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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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재연,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황해도 천주교회〉, 《안중근 연구의 성과와 과제》, 안중근기념사업회 편, 2010.9.2., pp.307~348

 

2) 윤선자, 〈‘한일합병’ 전후 황해도 천주교회와 빌렘 신부〉,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집,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6

3) 조광, 〈안중근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2.25.

 

4) 신운용, 〈안중근의 민권 · 민족의식과 계몽운동〉, 《안중근과 그 시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3) ; 조광, 〈안중근 연구 백년 : 현황과 과제〉, 《한국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출판사, 2010.2 등 참고. 안중근의 가톨릭 교리인식에 대해서는 차기진,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 《교회사연구》 1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 황종렬, 〈‘안중근 편 교리서’에 나타난 천 · 인 · 세계 이해〉, 《안중근과 그 시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2009.3 등의 연구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원재연, 앞의 글(2010.9), p.308 각주 2, 3번 참고.

 

5) 원재연, 〈안중근의 선교활동과 황해도 천주교회 - 김기호와 비교연구를 중심으로 -〉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표문, 2009.10)과 원재연 앞의 글(2010.9) ; 이 두 편의 글은 그 제목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중에서 본고의 모태가 된 글은 위 발표문(2009.10)이다.

 

6) 원재연, 〈安重根 年譜〉, 《교회사연구》 제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7) 차기진 앞의 글(2000) ; 원재연, 〈안중근의 생애와 활동〉(상: 가계와 신앙생활 / 중: 애국활동과 순국 / 하: 유묵), 《교회와역사》 제218~220호, 1993년 7~9월.

 

8) 같의 글(2000), pp.18~20

 

9) 같의 글(2000), pp.20~21 ; 이중에서도 천주를 대군대부(大君大父)에 비유한 것이나 삼혼설(三魂說 ; 生魂, 覺魂, 靈魂)로 영혼을 설명한 것 등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등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특히 영혼의 존귀함에 대한 강조와 천주의 지공(至公), 지의(至義)함에 대한 강조는 안중근의 인식이 민권사상(民權思想)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준다고 설명했다. 차기진, 같은 글 pp.22~23

 

10) 황종렬, 앞의 글, 2009.3 참고

11) 같은 글(2009.3), pp.306~307

12) 같은 글, pp.308~311.

13) 같은 글, pp.309~313.

14) 같은 글, pp.314~315

 

15) 김기호 요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료 및 연구 성과들이 있다. 《안동김씨 대사성파보(安東金氏 大司成派譜)》, 국립도서관 소장 : 김기호, 《봉교자술(奉敎自述)》(1901.3,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김기호, 《구령요의(救靈要義)》(1879년경,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김기호, 《소원신종(溯原愼終)》(1887,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본) : 김재환, 《신앙인의 유산 - 4대에 걸친 발자취 -》(1979. 4, 신일인쇄사) ; 김운회,〈김기호 연구 - ‘봉교자술’을 중심으로 -〉, 《한국교회사논문집》 1(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 원재연, 〈김기호(요한, 1824~1903)의 생애와 활동〉, 《한국근대사와 종교문화》(정두희 외 지음, 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2003)

 

16) 김기호, 《봉교자술》, 〈感謝領洗入敎之特恩〉 및 원재연, 앞의 글(2003.12) 참고

17) 차기진, 〈정약종의 교회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제1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8)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9, pp.154~157.

19) 김기호, 《봉교자술》(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p.260.

 

20) 노길명,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 《교회사연구》 제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p.11 ; 이에 의하면, “안중근이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부친의 개종에 따른 하나의 부수적인 결과였으며, 개종의 동기 또한 세속적인 것과 상당한 관련을 맺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한다.

 

21) 물론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졌을 정하상 성인과, 어느 정도 성장한 단계(19세 때)에서 신앙에 입문하게 된 안중근 의사의 경우가 입교 동기 또는 입교 배경이란 측면에서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이 양자는 자신의 종교적 갈망이나 진리추구라는 측면과는 무관하게 외부적 요인, 즉 부친의 영향력이라는 타의에 의해 신앙에 입교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22) 《쥬교요지》 상편 제2~5조항 ; 〈상재상서〉 본문 첫째부분 - 유복자와 천당지옥의 비유 ; 《봉교자술》(《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p.225) : 《국역 안응칠 역사》(윤병석 편, 《안중근 전기전집》, p.140)

 

23) 《봉교자술》(《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 p.229, 251)

 

24) 《국역 안응칠 역사》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만 천주교회의 문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소.(윤병석 편, 《안중근 전기전집》, p.141)

 

25) 《주교요지》 상편 제15항~27항 ; 〈상재상서〉 又辭

 

26) 김기호는 천주교리에 별로 흥미가 없어 보이는 선비들에게 전교할 때에는 십계(十戒)와 칠극(七克)을 제목삼아 설파하였다. 김기호 《봉교자술》(한국교회사연구소편《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p.229) : 안중근이 진남포에서 1906년부터 그 재정을 부담하여 운영하던 돈의학교(敦義學校)의 학생이었던 이전(李全)은 그의 《안중근혈투기》에서 안중근이 《천주실의》, 《칠극》의 교회서적을 읽으면서 교리공부에 정진했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책들에 대한 안중근의 독서는 그로 하여금 십계명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동포애를 특별히 강조한 점이나 한민족의 단합을 역설하면서 교오(교만)의 병통을 겸손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 등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차기진 앞의 글(2000) p.27

 

27) 〈上宰相書〉 誡命者何 上主默喩之十誡也 … 又十誡摠歸二者 愛天主萬有之上 及愛人如己 上三誡 昭事之節目也 下七誡 修省之工夫也

 

28) 〈上宰相書〉 又十誡摠歸二者 … 顔氏之四勿 戴記之九思 不足比方 忠恕孝悌仁義禮智 包括這裏 有何一毫不足處手 以是道 而行乎一家 則家齋矣 行乎一國 則國家治矣 行乎天下 則天下可平矣

 

29) 〈上宰相書〉 然而人心惟危 道心惟微 頃刻犯罪 私慾偏情 百方引誘 誘以驕傲 誘以憤怒 誘以貪饕 誘以邪淫 誘以嫉妬 誘以慳吝 誘以懈怠 陷入於必死之地 苟不時時警斥 刻刻攻退 則不免於羅穽

 

30) 그러나 정약종의 《쥬교요지》에는 이같은 10계나 칠극에 관한 설명이 없다. 이는 한정된 지면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유교적 지식을 배제하고 민중들이 알아듣기 쉬운 일상생활의 비유로서 교리를 설명해나간 저자 정약종의 교리 설명 방식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1) 정약종은 일찌감치 유교 학습을 통한 출세를 포기하여 도교의 長生不老說에 관심을 가졌다가 천주교에 입교한 후에는 이와 같은 유교, 불교, 도교, 기타 민속 신앙 등을 모두 비판, 부정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지은 한글 교리서 《쥬교요지》에서도 “인심이 스스로 천주께서 계신 것을 안다”고 한 대목에서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양지’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대목을 있을 뿐, 이밖에는 이 책 어느 곳에도 유교 또는 성리학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그와 동시대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가톨릭 이론의 쌍벽을 이루었던 이벽(1754~1786)의 《聖敎要旨》는 물론이고 그의 아들 정하상의 〈상재상서〉의 보유론적 서술 방식과도 크게 다른 점으로 주목된다. 원재연, 〈조선후기 천주교 서적에 나타난 ‘良知說’에 대하여〉, 《양명학》 제20호, 한국양명학회, 2008.7 참고.

 

32) 〈上宰相書〉 伏以 孟氏之廓闢楊墨者 … 夫天地之上 自由主宰 厥有三證焉 一曰萬物 二曰良知 三曰聖經 … 何謂良知 …

33) 김기호, 《구령요의(救靈要義)》(한국교회사연구소편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p.275

34) 《국역 안응칠 역사》(윤병석 편, 《안중근 전기전집》, p.139)

35) 김기호, 《구령요의(救靈要義)》(한국교회사연구소편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pp.275~276

36) 보유론의 구체적 논리전개 방식이나 그 예와 관련해서는 원재연, 앞의 글(양명학회, 2008.7) 참고.

 

37) 유교에서 말하는 혼백(魂魄) 또는 귀신(鬼神)은 기(氣)의 작용으로 생긴 것으로 죽으면 흩어져서 사멸하는 존재로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영혼(靈魂)은 물질에 초월한 것으로 불멸(不滅)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38) 《쥬교요지》 상편 제30항 ; 사이 죽은 후의 령혼이 이셔 샹벌을 닙니라

 

39) 〈上宰相書〉 於萬物之中 惟人最貴 所貴乎人者 以其魂之靈也 卽所謂天命之謂性 而賦卑于胎中者也 烏可與草木禽獸 同歸於腐朽乎

 

40) 《봉교자술》[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p.225, 227]

41) 같은 책, 230쪽

42) 《국역 안응칠 역사》(윤병석 편, 《안중근 전기전집》, p.138)

 

43) 필자는 전에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분석하여 이를 인권론(人權論)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당시 황사영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의 자유(=믿을 권리) 외에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제반 권리를 억압하는 순조 초기의 세도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여 결국 반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했다. 그리고 이후 천주교 신자들은 반역을 도모하는 무리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1839년 정하상이 국청에서 심문을 당할 때 심문관들이 거듭해서 황사영과의 관련성을 추궁했지만 정하상은 황사영을 천주교회의 이단자로 취급하고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천주교 신자들은 국가에 충성하는 착한 백성임을 거듭해서 강조했다. 그러므로 당시 정하상이 쓴 〈상재상서〉에도 천주교가 충효의 도리에 순종하는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했을 뿐 인권(人權)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직접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재연, 〈황사영 백서의 인권론적 고찰〉, 《법사학연구》 제25집(한국법사학회, 2002.10) 참고.

 

44) 다만 이러한 설교 방식과는 별개로 신자들의 입교동기가 세속적으로 바뀌면서, 가톨릭 교회 선교사들은 신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비신자들, 즉 지방관장 내지는 향촌사회의 세력(단체)들을 포함한 교회 밖의 사람들과 상당한 정도의 충돌을 감행하였고 이것이 이른바 교안(敎案)으로 나타나 결과적으로 교세확장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장의 서술을 참고.

 

45) 윤병석 편, 앞의 책 (《안중근 전기전집》, p.148)

 

46) 박찬식, 《한국 근대 천주교회와 향촌사회》(한국교회사연구소, 2007.12) ; 윤경로, 〈초기 한국 신구교 관계사 연구 - 海西敎案과 文書論爭을 중심으로 -〉, 《한성대학논문집》, 1985 ; 차기진, 앞의 글(2000) ; 황종렬, 앞의 글(2009. 3) 

 

47) 《국역 안응칠 역사》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윤병석 편, 《안중근 전기전집》, p.141)

 

48) 원재연 앞의 글(2010.9), pp.328~333 참고

49) 이와 관련된 안중근 인권의식의 논리적인 발전 및 성숙 과정은 신운용, 앞의 글(2009.3) 참고할 것.

 

50) 윤병석 편, 앞의 책(《안중근 전기전집》 pp.163~164) ; 일본국 포로를 석방해줌으로써 의병전쟁에서 실패한 사실과 관련하여 황종렬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는 이 패배가 근본적으로는 천주의 정의에 대한 안중근의 종교적 순명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것은 안중근이 그만큼 하느님의 정의에 투철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중근의 이같은 정의의 준수야말로, 전투에서는 실패를 낳았지만 그가 마침내 이토오를 하느님의 법정, 역사의 법정, 민중의 법정 앞에 세워서 그의 죄상을 드러냄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데 쓰인 한 마름이 될 수 있도록 추동하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황종렬, 앞의 글(2009.3), pp.326~327

 

51) 원재연, 앞의 글(2003), pp.214~215

52) 같은 글 참고

53) 《봉교자술》序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pp.217~218]

54) 원재연, 앞의 글(2010.9) 참고

55) 《구령요의》[앞의 책 《만남과 믿음의 길목에서》(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p.291]

 

56) 김기호 회장과 안중근 의사의 개신교 인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고에서 다루고자 한다.

 

57) 《국역 안응칠 역사》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다만 천주교회의 문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소.(윤병석 편, 《안중근 전기전집》, p.141)

 

58) 본고에서 필자가 아직 연구를 진행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안태훈이 1890년대 후반에 서울의 종현 천주당에서 수많은 교회서적과 함께 황해도 신천으로 데리고 간 이종래 바오로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바로 그것이다. 김기호 요한은 10년간 명동 성당 일대에서 블랑주교를 보좌하고 전국 도회장을 역임하면서 교리서를 저술하고 각 지역 회장들을 교육하였으므로 1896년경 명동성당에서 피신하다가 귀향한 안태훈을 따라 황해도 청계동으로 간 이종래 바오로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정은 관련 자료의 탐색을 통하여 향후의 논문에서 규명해보고자 한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7, 2010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원재연(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33238&Page=17&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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