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신학자료

sub_menu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죽산성지 순교자 연구

111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1-17

죽산성지 순교자 연구

 

 

죽산(竹山) 지역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치명일기》 · 《병인치명사적》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등의 자료를 종합하여 살펴보면 모두 24위이다. 작은 고을이었던 죽산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온 것은 이 지역 신자들의 깊은 신앙심과 도호부(都護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포졸들의 수탈이 심하고 악독했기 때문이다.

 

죽산은 예로부터 유서 깊은 고을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의 고장이 되었다. 죽산에서 순교한 분들은 모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병인박해를 전후하여 죽산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죽산 교우촌으로는 고초골, 남풍리(속칭 남굉이), 용촌, 양대리 등이 있다. 처형지는 임진왜란 때 오랑캐들이 진을 친 곳이라 하는 이진(夷陣)터로, 신자들 사이에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잊은 터’라고 불리었다.

 

죽산 지역의 순교자들은 이름은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순교자의 행적을 연구하는 작업은 죽산순교성지의 역사적 의의와 깊이를 더해 줄 것이다. 여러 자료들과 현지답사를 통해 살펴본 죽산 순교자들은 최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 여기중, 여정문과 그 일가(아내와 아들), 문 막달레나,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조 다테오와 김 우브로시나 부부, 한치수 프란치스코, 유(兪) 베드로, 이희서, 홍천여, 정덕구 야고보, 최성첨과 그의 장남, 이진오, 김도미니코, 김인원, 홍치수, 정 토마스, 금 데레사로 모두 24위이다. 이 외에도 연구의 범위를 넓혀 죽산 순교자의 사적 뿐 아니라 그 가족들의 순교사적까지도 다루었다.

 

 

Ⅰ. 머리말

 

죽산에서 순교한 이들은 《치명일기》에는 15위이나, 《병인치명 사적》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등에 나온 순교자를 모두 종합하면 24위이다. 죽산 같은 작은 고을에서 당시 남한산성에 있었던 광주 유수부와 비견될 정도로 많은 순교자가 나온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신자들의 신앙심이 깊었고 또 죽산이 도호부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졸들의 수탈이 심하고 악독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죽산 포졸들의 포악성은 당시 유명하였다.1)

 

죽산에서 순교한 이들은 모두 교수형을 당하였다. 처형지는 이진 터(夷陣터)였다. 이진터는 임진왜란 때 오랑캐들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2) 이진터는 지금은 성원 목장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나무 한 그루 서 있지 않지만 당시는 아름드리 큰 소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한다. 사형수들을 죽산 관아(현재 읍사무소) 감옥에서 이진터로 끌고 나와 처형하는 것을 노한경이 어릴 때 실제 목격하였다 한다.3) 이진터로 끌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선 ‘잊은 터’라고 불렸다고 한다.

 

삼죽면에는 ‘두들기’라는 삼거리가 있다. 여기에 주막이 있었는데, 포졸들이 신자들을 잡아가지고 오다가 이 주막에 들려 술을 마시고 돈을 내라고 심하게 두들겨서 이 마을 이름이 ‘두들기’라고 한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달리 전하는 말로는 진흙이 신발에 많이 달라붙어 이곳에 오면 그 진흙을 떼느라고 신발을 두드려 두들기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아무튼 ‘잊은 터’라는 이름이나 ‘두들기’라는 이름이 그 유래는 어찌 됐든 병인박해 때 박해의 잔학상의 일면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죽산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현(縣)으로 강등된 때도 몇 차례 있었지만, 도호부(都護府)였다. 옛날 도호부이던 때에는 그 면적이 상당히 넓어, 지금 안성시의 일죽면, 죽산면, 삼죽면, 용인시 원삼면, 백암면 모두를 포함하고 충북 진천군 백곡면(배티 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개정(地方官制改定)에 의해 죽산도호부(竹山都護府)에서 죽산군(竹山郡)이 되었다가 다시 1914년 조선 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에 의해 안성군(安城郡)으로 편입, 현재의 죽산면으로 개정되었다.

 

서울에서 죽산 성지를 가려면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을 향해 달려가면, 일죽 인터체인지가 나온다. 만약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영동고속도로로 오다가 호법 인터체인지에서 중부고속도로로 나와 남행, 일죽 인터체인지로 들어오면 된다. 이 일죽 인터체인지에서 광장 휴게소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왼쪽 길가 커다란 바위에 ‘죽산성지(竹山聖地)’라고 한자로 쓰인 표석4)이 나온다. 이 표석 옆으로 성원목장을 끼고 성지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죽산은 예로부터 유서 깊은 고을로, 죽산 박씨, 죽산 안씨의 관향이기도 하며, 신라 말, 고려 초 당 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친, 유명한 시인 박인량(朴寅亮)의 고향이기도 하며,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는 송문주(宋文冑) 장군이 죽주산성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또 임지왜란 때는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이 화포(火砲)를 제작, 왜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 후 병자호란 때는 삼학사의 한 명으로 심양에 잡혀간 오달제(吳達濟)의 고향이요, 정조 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 주국(李柱國) 장군이 태어난 충절의 고장,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런 유서 깊은 고장에서 또 병인박해 때에는 천주교인들이 하느님을 위해 충성으로 목숨을 바친 순교의 고장이 되었다.

 

그러면 죽산에서는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을까?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며, 한국에 천주교를 도입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권철신(權哲身, 1736~1801)과 가장 친했던 이기양(李基讓, 1744~1802)과 그의 외사촌 동생 정섭(鄭涉) 등이 살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이천시 호법면 단내[丹川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한국 초기 교회 시절부터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정은 되지만, 문헌의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사학징의(邪學懲義)》에 한은(韓銀)이 죽산 사람으로 포도청에 체포돼 신문을 받았으나, 배교하고 나온 기록이 있다.5) 그러나 한은(韓銀) 역시 죽산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서울로 이사와 정약종(丁若鍾)의 집 행랑채에 살며 천주교를 믿은 것이기 때문에, 죽산에 그 당시 천주교 신자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또 지리적으로는 김대건 신부가 전교하던 은이 마을과 가깝고, 그 전교지역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병인박해 이전에 신자촌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그것도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병인박해를 전후하여 죽산 지방에 교우촌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증언록》, 《병인치명 사적》, 《치명일기》 등에 나타난 죽산 교우촌으로는 (용인시) 원삼면 고초골[枯草洞]6), (안성시) 보개면 남광리(南光里, 속칭 남굉이)7), (용인시) 백암면 용촌[湧川里]8), 양대리 등이 있다.

 

아무튼 죽산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 때로부터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때까지 스물 네 명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단 한 사람이 주님을 위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쳐도 우리는 그 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죽산에서는 24위나 되는 분이 순교의 거룩한 피를 흘린 것이다.

 

그 순교의 땅이 오랜 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다가, 1994년 강정근(姜正根) 신부가 죽산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성지 성역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죽산 성당은 본디 안성(구포동) 성당에서 분리돼 나온 성당이다. 이 성당을 건축한 이는 수원교구 이정운(李淨雲) 몬시뇰인데, 이 몬시뇰이 죽산 성당을 무명순교자 성당으로 봉헌하고, 죽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성당 마당 한구석에 건립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분들의 순교 사실이 자꾸만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가는 형편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정근 신부가 매달 죽산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미사를 이진터(夷陣터) 앞, 성원목장 도로변에서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비포장 도로였기 때문에, 자동차의 매연, 소음, 먼지 속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면 신부의 제의에는 먼지가 수북이 앉아 있었고, 신자들의 옷자락, 머리카락에도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미사를 드리기는 하지만, 소음 때문에 강론을 제대로 할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소음속에서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조용히 묵상할 수가 없었다. 이런 안타까운 속에서 강정근 신부가 순교지 이진터를 성지로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하느님께 간구하며 노심초사하였으나 작은 시골 본당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강정근 신부는 좌절하지 않고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일을 추진해나가며 신자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황무지에 호박을 심어 팔기도 하고, 신자들 집에서 생산한 포도를 서울 각 성당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아, 거기서 얻은 수익금으로 성지 개발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교구내 각 성당을 순회하며 성지 개발을 호소, 성지 개발 회원들을 모집, 그 성금으로 성지 개발에 필요한 땅을 구입하고 1차적으로 성지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성지가 오늘의 죽산 성지로 성장한 것이다.

 

이제 죽산 순교자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죽산에서 순교한 이들은 이름은 있으나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순교자에 가까운 분들이었다. 아무리 무명 순교자일지라도 순교자의 피는 거룩하다. 한 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작업은 죽산 순교 성지의 역사적 의의와 깊이를 더해 주리라 믿는다.

 

접근 방법으로는 각 증언록에 나오는 것을 바탕으로 하였고, 부족한 것은 현지답사를 통해 보충하였다. 시대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해간다. 마을 모습도, 마을 이름도, 길도, 말씨도, 흐르는 개울물의 방향도 달라진다. 필자는 가급적 순교 당시의 지리적 상황에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현지답사를 하며 그 정확한 현실에 접근해 보려 노력하였다. 옛날 신자들, 순교자들이 숨어 살던 마을의 모습, 마을 이름, 그들이 다니던 길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실제적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현재의 죽산은 참으로 많이 변하여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제일 많이 변한 것이 마을 모습이요 도로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Ⅱ. 죽산 순교자9)


1. 최 안드레아 - 1868년 7월, 교수형, 27세

2. 방 데레사 - 최 안드레아 아내, 같은 날 교수형, 25세.

 

최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는 부부간이다. 안드레아는 최 라자로의 아들이었다. 그 부친은 병인(1866)년 박해 때 치명하고, 그는 피하여 외교인 집에 다니며 일하고 살다가, 1868년 4월 죽산 포교에게 잡혔다. ‘책과 당(黨: 신자)을 대라.’고 혹형하되 의연히 참고 견디며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죽산으로 가 여러 달을 옥중에서 보내다가 아우에게 편지하기를 ‘나는 아직 살아 있으나 곧 주님을 위하여 죽을 터이니, 너희들은 부디 주님의 명하신 대로 살다가 혹 살아나거든 열심히 수계하며 본분을 잃지 말고 서로 우애하고 화목을 잃지 말라. 죽은 후 천국에서 반가이 만나자.’ 하였다. 국령(國令)이 지엄한 때문에 7월에 교수형으로 죽이니, 나이 27세였다.

 

방 데레사는 경기 용인 사람이었다. 본성이 순직하고 시부모에게 효성하며 열심히 수계하고 본업을 극진히 하였다. 시부모는 병인(1866)년에 치명하고, 피하여 다니다가 그 장부가 1868년에 또 잡혀 치명한 후 몸을 의지할 데 없으므로 개가하여 몸을 의탁하고 자식까지 두었었다.

 

죽산 포교에게 그 장부와 한 가지로 잡혀 혹형함에 그 장부 배교함을 보고 민망히 여겨 말하되, ‘이런 기회에 주님을 위해 형벌을 참아 받고 형벌 아래 죽으면 치명이거늘, 어찌 배주하느냐?’ 하고 어린 자식을 육정(肉情: 인간의 감정)에 박하되 떼어 버리고 죽산으로 잡혀간 지 오래지 아니하여 부부 한가지로 교수형으로 죽이니, 나이 25세였다.10)

 

이 증언에 의하면 방 데레사가 개가한 후의 남편이 바로 최 안드레아임을 알 수 있다. 그 남편 최 안드레아가 배교하려는 것을 보고 배교하지 못하도록 격려하며 마침내 함께 순교하였음도 알 수 있다. 순교가 쉬운 일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 자식마저 떼어놓고 순교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인간적으로 보아서는 비정한 어머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인간적 감정, 모성애를 초월한 거기에 순교의 거룩한 얼이 숨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두 증언은 그 끝에 “그 아우(시동생) 공주 서재요골 사는 최 안드레아가 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후손을 추적한 결과 현재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리(納安里, 속칭 사리목)에 살고 있는 최병기(崔秉基, 1925생) 시몬을 찾을 수 있었다. 강릉 최씨 족보와 최병기 시몬의 증언에 의하여 최 안드레아는 그 이름이 제근(濟根)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 안드레아의 집안에서는 그들 부부만 순교한 것이 아니다. 그 아버지 최종여 라자로와 그 큰 아버지 최천여 베드로가 모두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라자로는 본디 경상도 사람이었다. 선대에 입교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교를 열심히 믿었다. 본성이 순하고 착하여 이웃 사람이 모두 칭송하였다. 그 부모가 고향을 떠나 산골에서 농사로 생활하며 여러 해를 지내다가, 병인년 군난에 목천(木川) 소학골11)에서 본관 포교에게 형제가 함께 잡혀갔다. 본관 문목(問目)에 “네, 천주학을 하느냐?” “네, 합니다.” 하고 답하였다. 감옥에 갇힌 지 10여 일 후 영문(營門)으로 올려 또 영장(營將) 문목에도 전과 같이 “성교를 봉행하노라.” 하였다. 이 두 사람 외에 다른 신자와 한 가지로 대개 15일 후 병인(1866)년 11월 23일에 모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나이 40세였다.12)

 

또 최 라자로 종여는 목천 소학골에서 그 형과 한 가지로 살면서 열심히 수계(守誡: 신앙생활)하였다. 병인 10월 초10일에 목천 포교에게 잡혔다. 그때 마침 홍역(紅疫) 병으로 거의 사경에 이르러 스스로 걸어가지 못하므로 포교들이 목을 매어 끌고 본관으로 갔다. 며칠 갇혔다가 공주 진영(鎭營)으로 가서 그 형 베드로와 함께 11월 초8일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나이 40세였다.13)

 

 

3. 여(呂)기중, 1866년 순교, 60세.

 

여기중의 집안은 그 아들 여정문, 며느리(이름 모름), 손자(이름 모름), 한 가족 4명, 3대가 모두 순교하였다. 그 아버지 여기중은 1866년에 순교하고, 그 이듬해 그 아들 여정문과 며느리, 손자, 일가족 3명이 함께 체포되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국법에서는 아무리 악독한 죄인일지라도 일가족을 한 날, 한 시에 같은 장소에서 죽이는 것은 금하고 있었다. 더욱이 종족 보존을 위해 부자를 같이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박해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그 법은 무시되고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함께 죽이는 일까지 자행되고 있었다. 그 처참한 형률이 여정문의 집안에 내려졌던 것이다.

 

여기중은 본디 충청도 내포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 천주교에 입교, 고향에서 살며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계율을 지키기에 불편하므로, 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병인(1866)년에 죽산 포교에게 잡혀가 “숨겨 놓은 재물과 신자를 대라.”고 온갖 형벌을 당하였으나 일절 입을 열지 않고, 신자들이 숨은 곳은 대지 아니하였다. 죽산으로 잡혀간 지 얼마 못되어 교수형으로 죽이니, 나이는 60여 세였다.14)

 

 

4. 여(呂)정문, 1867년 순교, 44세.

5. 여정문 아내, 같은 날 순교.

6. 여정문 아들, 같은 날 순교, 15세.

 

여정문은 여기중의 아들이다. 그 전 해에 부친이 치명하고, 피하여 다른 동네 가서 살다가 또

죽산 포교에게 잡혀 갔다. 그때 그 아내는 잡아가지 아니하나, ‘장부와 한 가지로 죽겠다.’ 하며 자원하여 잡혔다. 이 광경을 본 15세 된 그 아들도 이제 장가들어 세상 육정에 내외 이별함이 심히 박하되, 부모 두 분이 잡혀감을 보고 자원하여 잡혀갔다. 셋이 함께 죽산으로 가서 치명 대사를 서로 권면하며, 옥에 갇힌 지 얼마 못되어 교수형으로 죽이니, 나이 44세요, 그 아들은 나이 15세였다.”15)

 

 

 

 

7. 문(文) 막달레나, 1867년 순교, 19세.

 

문 막달레나의 집도 그 시아버지 고(高) 야고보, 남편 고(高) 요셉, 모두 3명이 순교를 하였다. 이들은 본디 내포 사람으로, 시아버지 고 야고보는 1866년 죽산 포교에게 잡혔으나, 수원으로

가서 순교하였고, 남편 고 요셉은 그보다 먼저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죽산에서 순교한 문 막달레나부터 먼저 살펴보고, 다음에 그 남편, 시아버지의 순교 사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문 막달레나는 부모의 가르침을 잘 받고 수계를 열심히 하였다. 요셉과 혼배한 후 시부모를 효성으로 공경하며 농사를 열심히 지었다. 병인년(1866)년 박해에 남편이 먼저 잡혀 공주로 가 죽고, 시 부모와 함께 산으로 피신하여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 그 해 겨울 산에서 해복하는 고초를 겪었으나 어려워하는 말을 하지 않고 감수하였다. 시부모와 함께 피하여 다니다가, 죽산 포교에게 시부모와 함께 잡혀 죽산 관으로 갈 때, 어린 자식이 있어 육정에 떠나기 어렵 되, 자식을 버리고 시부모와 함께 간 지 한 달 후에 또 다른 신자와 함께 교수형으로 죽이니, 나이 19세였다.16)

 

문 막달레나에게는 바로 산에서 해산한 어린 핏덩이 자식이 있었다. 인간의 감정으로서는 도저히 이 어린 핏덩이 자식을 버리고 잡혀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배교하고 나와 어린 핏덩이 자식을 살려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때 그녀는 신앙과 자식 사이에서 얼마나 큰 고통과 갈등을 겪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종교가 중요하냐, 아니면 인간의 모성애가 중요하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어머니로서 너무 비정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배교를 할 수가 없어서, 그 모든 애끊는 인간 감정을 끊고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끌려간 지 한 달 후에 다른 신자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이진터에서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19세였다. 죽산 이진터 형장에 피어난 19세의 한 송이 순결한 순교의 꽃이 아닐 수 없다.

 

문 막달레나의 남편 고 요셉은 그 부친 고 야고보보다 먼저 잡혀가 ‘배주하라.’ 하며 약간 형벌하되, ‘만만코 배주는 못한다.’ 하였다. 공주로 갈 때 아는 여신자 한 사람을 길에서 만나 ‘나는 주님을 위해 죽으러 가니 이제 세상에서는 다시 못 뵈울 것이나, 육정에 걸리는 생각을 버리고 잘 닦아 천주께 가서 만나지게 하기를 바란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옥에서 함께 있는 신자들을 제성하며 열심히 권면하고 한 달 후 여러 신자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죽이니, 나이 24세였다.17)

 

문 막달레나의 시아버지 고(高) 야고보는 비록 순교는 수원에서 하였지만, 그가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수원으로 이송되어 갔기 때문에, 그를 실상 죽산 순교자에 포함하여도 좋을 것이다.

 

 

 

고 야고보는 충청도 내포 사람이다. 소년에 입교하였으나 수계하기에 불편하므로 깊은 산골로 이사하여 여러 신자와 함께 수계하며 농사를 지었다. 병인박해 때 죽산 포교에게 잡혀 며느리와 한 가지로 죽산으로 가서, 처음부터 주님을 위해 죽기로 다짐하였다. 별로 형벌도 받지 않고 옥에 몇 날 있다가 수원으로 이수하여 교수형으로 죽이니, 나이 50세였다.18)

 

 

8. 박경진(朴景鎭) 프란치스코, 1868년 8월 14일 순교, 34세.

9. 오(吳) 마르가리타, 1868년 8월 13일 순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그 아내 오 마르가리타는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시복 추진 중이다. 그들은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진천(鎭川) 절골에서 살았다. 무진(1868)년 7월 19일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속에 숨어 있다가 잡혔다. 그때 포졸들이 삼겹 바를 곱쳐 들고 후리치며 채찍으로 내리쳤다.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그 동네 외인 신철숙의 집에 동정을 알려하고 갔다가, 철숙이 “내게서 자며 동정을 살피는 것이 좋다.”고 유인하자,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거기서 유숙하였는데, 철숙이 뒤로 포졸에게 통지하여 잡히게 되었다.

 

내외가 함께 죽산 관아에 갇혔을 때 그 동생 필립보와 장자 안토니오에게 편지하였다. 그 편지에 “어린 조카들 데리고 진정으로 천주 공경하다가 천주의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자취를 따르라.”고 하였다. 8월 13일 내외가 함께 치명하였다.19)

 

1997년 죽산 성지를 찾아온 한 낯선 신부가 있었다. 성지에서 가족미사를 마치고 난 뒤, 그 미사를 집전한 신부와 가족들이 강정근 신부를 찾아왔다. “여기서 순교하신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가 저의 증조부모님 되십니다.” 이렇게 말을 한 그 노사제는 전주 교구 박노학(朴魯學, 1917생, 일명 聖雲) 베네딕토 신부였다.

 

그리하여 1998년 1월 9일 전주로 박노학 신부를 찾아가 그 족보를 확인하였다. 족보에 박 프란치스코는 밀양 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21세손이며, 이름은 경진(景鎭), 자(字)는 치명(致明), 갑자 생(甲子生, 1834)이며, 오 마르가리타는 해주(海州) 오씨(吳氏)로 병신생(丙申生, 1836), 묘는 합장으로 안성군 죽산면 가치암(加峙岩, 가치라미)라고 기록돼 있었다.

 

 

 

 

10. 조(趙)치명 다테오, 1868년 7월 순교, 30세.

11. 김 우브로시나, 부부가 같은 날 순교, 27세.

 

이 집안에서도 조치명 다테오, 김 우브로시나 부부가 죽산에서 순교하였다. 그 밖에도 이 집안에서는 그 형 조덕삼 시몬이 목천 칠안면 공심이서 살다가 체포돼 서울에서, 그 사촌 조대여 방그라시오가 진천에서 살다가 체포돼 청주로 가 순교하였다.

 

조(趙)치명 다테오는 본디 경기 광주(현재 천호동) 양반의 집 사람이었다. 죽산 용촌에서 살다가, 병인년(1866)에 잡혔다가 도망하고, 무진년(1868) 7월에 죽산 포교에게 다시 잡혔다. 본디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형벌을 무수히 하며 ‘당과 친척을 대라.’ 하나, 한 말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그 아내 김 우브로시나가 포교에게 말하기를 ‘귀 막힌 사람에게 그 모양으로 하면 무슨 좋은 것이 있느냐?’ 하니, 다테오는 놓고 그 아내를 대신 잡아갔다. 떠날 때 다시 다테오도 잡아, 내외 함께 죽산 관아로 가, 죽기로 다짐하였다.

 

별로 형벌 없이 하옥하였는데, 그 아들 열 한 살 된 아이가 밥을 빌어 부모에게 드리자, 그 모친이 밥을 받아 함께 갇힌 신자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혹 굶기도 하였다. 하루는 우브로시나가 아들을 불러 ‘우리는 곧 죽을 것이니, 너는 부모를 생각지 말고 살던 곳으로 가라.’ 하였다. 자식이 명대로 살다가 부모를 뵈오려고 가니, 죽산에서 이미 교수형으로 치명하였다. 나이 32세였고, 그 아내는 27세였다.20)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의 후손 박노학(성운) 신부님이 “서울 교구 조창희(趙昌熙) 신부님 조상도 죽산에서 순교하였다고 들었어요.”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1998년 1월 9일 조창희 신부님을 찾아가 조 신부님이 조치명 다테오의 증손자임을 확인하였다.

 

조치명 다테오의 형 조덕삼 시몬은 병인년(1866)에 두 번 잡혔다가 두 번 도망하였었다. 그러나 경오(1870) 2월 23일 다시 경포(京捕)와 본읍(本邑) 포차(捕差)에게 잡혔다. 그때 그는 목천 칠안면 공심이에 살고 있었다. 포졸이 묻되, ‘너 천주학을 하느냐?’ ‘하노라.’ 하고 본관에 들어가 첫 추열에 죽기를 다짐하니, 옥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 서울로 보냈다. 관령(官令)대로 가다가 온양읍에 들려 그 고을에 갇힌 여러 신자와 함께 서울로 가서 치명하였다.

 

조치명 다테오의 사촌 조대여 방그라시오는 평상시 열심히 수계하며 하는 말이 ‘내 본명 성인이 23세에 치명하였으니, 나도 본명 성인과 같이 치명하여 승천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병인(1866) 10월에 진천 포교에게 잡혀 형벌 없이 동구밖에 나가 잡혔는데, 포교 말이 ‘집에 가 자고 오라.’ 하였다. 그 밤에 집에서 자고 이튿날 집안 사람에게 ‘잘들 있으라.’ 하직하고 포교와 함께 본관에 들어갔다가 청주로 이송돼 교수형으로 치명하였다. 나이는 38세였다.21)

 

 

 

 

12. 한치수(韓致洙) 프란치스코, 1866년 순교, 47세.

 

한치수 프란치스코는 본디 충청도 홍주 사람인데, 경기도 양성 미리내로 이사하여 살고 있었다. 박해를 피하여 죽산 용촌에 가서 살다가 병인년(1866) 11월에 집안 식구 아홉 사람이 함께 경포에게 잡혔는데, 프란치스코는 죽산으로 가서 치명하였다. 나이는 47세였다. 나머지 여덟 사람은 서울로 갔다가 놓여나왔다.22)

 

한치수 프란치스코의 형 한치원 알렉시오는 병인년(1866)에 잡혔다가 서울에서 배교하고 내려와 잘못한 것을 알고 뉘우쳐 회한하다가 기사년(1869) 11월 아들 내외와 그 아우 내외, 조카 내외와 함께 경포에게 잡혀, 기사년(1869) 12월 28일 여섯 사람이 함께 교수형으로 치명하였다. 나이는 64세였다.

 

그 아들 완쇠(完釗, 안드레아)는 25세, 며느리(李於仁連, 마리아)는 20세, 조카 시몬(完郁)은 24세, 시몬의 아내(金於仁連, 세시리아)는 18·9세였다. 시체는 그 아우 지금 문경 먹방이 사는 한 안드레아가 찾아 장사하였다.23)

 

한 안드레아가 순교한 것으로 증언한 한치원 알렉시오와 그 아들 한완쇠 안드레아, 며느리 이어린년 마리아, 조카 한완욱 시몬, 시몬의 아내 김어린년 세시리아는 《치명일기》 195, 196, 197, 198, 199, 200번에도 1869년(己巳) 12월 28일 상기 6명이 함께 치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치명일기》의 기록도 한 안드레아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포도청등록》 1872년(壬申) 11월 25일조에는 그들이 그때 체포돼 신문을 받고 모두 배교하였다. 한 안드레아가 그들의 시체까지 찾아다가 장사하였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순교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순교하였다면 1872년 이후에 순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1872년에 체포돼 우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을 때 한치원의 나이가 63세로 기록돼 있는데 반해, 한 안드레아는 한치원이 64세에 치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로 보면 그 들은 1873년에 치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3. 유(兪) 베드로, 1869년 8월 순교, 24세.

 

유(兪)24) 베드로는 구교우의 후예였다. 수계하기 좋은 곳만 찾아 다니다가 충청도 제천(堤川) 북면(北面) 번자리(番自里)25)로 가서 살았다. 그때 병인박해를 만나 다시 강원도 강릉 영서 계골 깊은 산골로 이사가 살았다. 거기서 다시 평창 지방으로 이사하여 살 때 같은 신자 황(黃) 요한과 두 집이 서로 제성권면하며 열심히 주를 받들어 섬기고, 그 부모와 3형제가 화목하게 살았다. 1869년(己巳) 8월 그믐쯤이었다. 뜻밖에 김석여라 하는 사람이 식전에 찾아왔다. 반갑게 맞아들여 인사를 나누고 서로 이야기를 함에 집안 식구들도 태연히 여기고 아침밥을 예비하던 중 방에 들어가니, 벌써 김석여가 수갑을 질러 잡아 눕혔었다. 그렇게 체포돼 죽산으로 끌려와 순교하니 나이 24세였다.26)

 

 

14. 이희서, 1866년 12월 22일 순교.

15. 홍천여(洪千汝), 같은 날 순교.

 

이희서는 본시 양지(陽智) 사기점27)에서 살다가 양지 한터로 이사하였는데, 병인(1866)년 12월 22일 죽산 포교에게 홍천여와 함께 체포돼 순교하였다. 나이는 49세였다.28)

 

 

16. 정(鄭)덕구 야고보, 1867년 순교, 23세.

 

정덕구 야고보가 태어난 곳은 용인 더욱골29)이다. 후에 용인 삼배울(삼배일)30) 점촌(店村: 사기그릇 굽는 마을)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서 살 때 병인(1866)년 박해가 일어나, 그 해 10월 20일 저녁 광주 포교 세 패가 들어와 야고보의 삼촌(여삼)과 조모, 동생, 온 가족이 모두 잡혔다.

 

그때 영세를 예비하고 있던 이 서방(이화실)도 함께 잡혀 한 방에 넣고 이 서방과 야고보, 두 사람의 다리를 함께 맞대어서 쇠고랑을 채우고, 손도 고랑을 채우고 삼촌과 함께 몽둥이로 두드렸다. 너무 심하게 맞아 두 사람이 모두 정신을 잃었다. 포졸들이 술에 취하여 곯아떨어진 틈에 쇠고랑을 부수고 도망쳤다.

 

이화실과 삼촌은 먼저 잡혀 순교하였고, 정덕구 야고보는 충청도 공주 국실31)로 도망하여 살다가 다시 죽산 포졸들에게 체포돼 순교하였다. 나이는 23세였다.32)

 

 

17. 최성첨, 1868년 8월 13일 순교.

18. 최성첨 장남, 같은 날 순교.

 

최성첨은 세례명을 알 수 없다. 그는 충청도 내포(內浦) 구교우로, 고향을 떠나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며 살다가 안성 성남33)서 병인년 박해를 만나 외교인 지방으로 피하여 갔다. 무진(1868)년 8월 죽산(竹山) 포교에게 잡혀 8월 13일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아들도 함께 순교하니, 29세였다.34)

 

최성첨의 집안에서는 장남만이 아니라, 차남 최 요한과 3남 최 요한도 순교하였다. 차남 최 요한은 병인박해 때는 피하여 천안(天安) 만복동35)에 가서 살았다. 1878년(戊寅) 공주 포교에게 체포돼 4월 10일 아우 최 요한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나이는 27세였고, 아우 최 요한의 나이는 알 수 없다.36)

 

이 두 형제의 순교 사실을 증언한 사람이 목천 서덜골 사는 요한의 4촌 최 회장 원심(遠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적한 결과 앞에서 살펴본 최 안드레아와 한 집안으로 천안시 북면 납안리(사리목)에 사는 최병기(崔秉基) 시몬이 그 후손이었다.

 

 

 

 

19. 이진오(이희서 사위), 1868년 순교.

 

이진오는 앞 (14)에서 살펴본 이희서의 사위다. 시흥 말미서 살다가 안산 방개울로 이사하였다. 1868년에 남양과 죽산 두 고을 포교에게 잡혀가 순교하였다. 나이는 28세였다.37)

 

 

20. 김 회장 도미니코, 1869년 10월 7일 순교.

21. 김인원(김 회장 도미니코와 함께 순교)

 

김 회장 도미니코는 경기도 용인 병목골38) 살다가 병인박해 때 열 세 식구를 데리고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여섯 달 동안 근근히 지내는데, 이웃 동네 외교인 10여 명이 작당하고 찾아와 17세 된 딸을 겁탈하려 하였다. 이에 도미니코의 셋째 아들 요한이 제 누이를 데리고 뒤로 숨기며 “만일 쫓아오면 이 돌로 쳐죽이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자를 내어 놓지 않으면 포교를 불러 너희 가족을 몰살하리라” 하였다. 할 수 없이 딸을 내어주고 자책하다가 목천 베 장골39)로 가서 살았다. 1869년 10월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김인원은 죽산 백해40)에서 살다가 병인박해를 피하여 도미니코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김 도미니코와 함께 잡혀 죽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41)

 

 

22. 홍치수, 1871년 순교.

 

홍치수는 충청도 청풍 쑥갓42) 사람으로 양근에서 살다가 음성(陰城) 사정리43)로 피신하였으나, 1871년(辛未)년에 죽산 포교에게 잡혀가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44)

 

 

23. 정 토마스, 1866년 순교, 25세.

 

정 토마스에 관해서는 1968년 가톨릭대학교 교회사연구회[회장 조광(趙珖)]에서 간행한 《교회사연구지》 제2집 죽산 순교자란에 유일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위의 표에서 약호 ‘A’는 ‘《치명기(致命記)》: 한글 펜사본, 敎會史硏究所 所藏’으로 돼 있다. ‘A’는 1938년에 정리된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가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찾아가 문제의 《치명기》를 열람해 보았으나 정 토마스에 관한 순교 기록이 나타나질 않았다. 1968년 《교회사연구지》를 편집할 때 참고한 그 《치명기》의 일부가 혹 유실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유실되었다 할지라도 위의 표가 《치명기》의 기록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 확실한 것인 만큼, 정 토마스는 용인에서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잡혀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24. 금 데레사

 

23번 정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1968년 가톨릭대학교 교회사연구회[회장 조광(趙珖)]에서 간행한 《교회사연구지》 제2집 죽산 순교자란에 이름이 기록돼 있을 뿐 어는 증언록에서도 순교 사적을 찾을 수 없다.

 

 

Ⅲ. 맺음말

 

죽산에서 순교한 분들은 《치명일기》에는 15분이나 여러 증언록에 나타난 분들을 종합하면 모두 24분이다. 그러나 정 토마스와 금 데레사 두 분은 1968년 가톨릭대학교 교회사연구회에서 간행한 《교회사연구지》에 그 이름이 나와 있을 뿐, 《교회사연구지》를 간행할 때 참고한 《치명기》가 분실되었는지 남아 있지 않아, 현재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어느 문헌에서도 그 순교 사적을 찾을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순교 사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하여, 그 두 분을 죽산 순교자에서 제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실재했던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한 명단을 그 문헌이 분실되었다 하여 순교 사실까지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죽산에서 순교한 분들을 거주지별로 보면 죽산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원이 대부분이나, 멀리 강원도 평창까지 이르고, 연대별로는 1866년부터 1871년에 이른다. 이 연구에서 필자는 죽산에서 순교한 분만의 순교 사적을 다루지는 않았다. 그 가족들의 순교사적까지를 묶어서 다루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순교는 그 한 사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크게는 교회사, 작게는 그 가족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죽산에서 순교한 분들 중에는 박경진(朴景鎭) 프란치스코 · 오 마르가리타를 비롯하여, 최 안드레아 · 방 데레사, 문 막달레나, 조치명 다테오 · 김 우브로시나, 최성첨과 그 장남 등 모두 열 분의 후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순교자 대부분이 박해로 후손을 잃어버려 뿌리만 있고 줄기가 없는 꼴인데, 후손이 있다는 것은 뿌리가 살아 있고 줄기가 무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줄기에서 두 분의 사제가 나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죽산 순교자 중에는 최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여정문 내외,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조치명 다테오와 김 우브로시나 등 여덟 분, 네 쌍의 부부가 죽산에서 같은 날 순교하였고, 방 데레사와 문 막달레나는 어린 자식을 떼어 놓고 가서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박순집증언록》(황석두루가서원 국역영인판, 2001)

《병인치명사적》(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필사본)

《사학징의(邪學懲義)》(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 1979)

《치명일기》(황석두루가서원 국역영인판, 1986)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보경문화사 영인본, 1985)

 

…………………………………………………………………………

 

1) 《左捕盜廳謄錄》, 丙寅, 3月 8일. “竹山捕校輩 最尤甚殺”

2) 죽산 두현리 사는 정명수(鄭明秀, 1904-1995)의 증언.

3) 이석주의 증언. 

 

4) ‘죽산성지’ 표석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죽산성지 표석과 그 옆에 있는 타원형의 큰 바윗돌은 본디 여기 있던 것이 아니다. 강정근 신부가 어떻게 하면 순례객들이 죽산 성지를 쉽게 찾을 수 있고, 또 인상적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할까 고민하던 때, 삼죽면 태정리 음달 사시는 최정규(崔廷圭, 요셉, 1933년생)가 집을 짓기 위해 정지작업을 하다가 마당 한 구석에서 이 바윗돌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서는 예로부터 다듬잇돌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어서 최정규는 그 돌을 깨어 석재로 팔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때 강정근 신부가 보고 그 돌을 봉헌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흙속에 묻힌 뿌리를 캐다 보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옛 중앙청 철탑을 자를 때 사용한 다이아몬드 톱을 빌려다 중간을 잘라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무게가 또 문제였다. 너무 무거워 운반하는 데 다리가 무너질 위험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성모님께 맡기고 인적이 드문 날 밤을 택해 운반을 결행, 마침내 무사히 옮겨 와 지금 그 자리에 놓게 되었다 한다. 이 표석을 설치할 땅은 성원목장 강성원(보니파시오)이 봉헌해 주었다.

 

5) 《사학징의》, pp.318~320. 한은(韓銀)은 본디 죽산 사람이나 전염병을 피하여 공주(公州), 지평(砥平) 등지로 이사하여 살다가 서울 정약종(丁若鍾) 집 행랑채로 이사와 김한빈(金漢彬)과 함께 그 집에 살며 10계명을 배웠다. 1801년 11월 포도청에 체포, 12월 초계(草溪)로 유배되었다.

 

6)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학일리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는 죽산도호부 원삼면에 속했는데 1914년 용인군에 편입되었다. 산간지역에 위치한 유서깊은 교우촌이다.

 

7) 경기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는 죽산도호부 서삼면에 속했는데 1914년 안성군에 편입되었다. 현재 상남, 하남, 풍정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전염병을 옮기는 쥐를 잡기 위해 집집마다 고양이를 길러 마을 이름이 ‘낭괭이’, ‘남괭이(남굉이)’가 되었는데, 마을이 다시 웃낭괭이와 아랫낭괭이로 나뉘면서 지금은 상남과 하남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8) 경기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 조선시대에는 죽산도호부 근일면에 속했는데 1914년 용인군에 편입되었다.

9) 명단의 순서는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서를 따른 것이다.

10) 《병인치명사적》 23권, p.75

 

11)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리. 성거산(聖居山) 동쪽 자락에 있던 마을로, ‘씨앗골’, ‘쇠악골’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목천현[1895년에 군이 됨] 읍내리에 속했는데 1914년 천안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12) 같은 책, 23권, p.72

13) 같은 책, 6권, p.2

14) 《병인치명사적》, 23권, p.31

15) 《병인치명사적》, 23권, p.32

16) 《병인치명사적》, 23권, P.43 

17) 같은 책, 23권, p.43 

18) 같은 책, 23권, p.42

19) 같은 책, 23권, p.193

20) 《병인치명사적》, 6권, p.62 

21) 《병인치명사적》, 6권, p.64 

22) 《병인치명사적》, 6권, p.79

23) 《병인치명사적》, 6권, p.80. 

24) 그의 성씨가 류(柳)나 유(劉)가 아니고 유(兪)인 것은 증언 기록에 한자로 분명히 ‘兪’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5)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에 있는 마을. ‘양지편’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제천현[1895년에 군이 됨] 북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송학면에 편입되었다.

 

26) 《박순집증언록》1권, p.24

27)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대대리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는 양지군 주북면에 속했는데 1914년에 용인군에 편입되었다.

28) 《치명일기》 433번; 《병인치명사적》 2권, p.144

 

29)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에 있는 덕골[德谷] 마을. 상, 중, 하 3개의 마을로 되어 있어 상덕, 중덕, 하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30) 경기 용인시 이동면 덕성4리. ‘삼배일’, ‘삼파(三巴)’라고도 한다.

31) 충남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들국화가 많이 있다고 해서 ‘국곡(菊谷)’이라고 불렀다.

32) 《병인치명사적》, 21권 p.69; 24권, pp.20~26

 

33) 경기 안성시 안성1동에 속한 성남동. 조선시대부터 장터와 우시장이 있어서 ‘장터’, ‘장기리’, ‘소전거리(쇠전거리)’로 불리었다.

 

34) 같은 책, 21권, p.93 

35) 충남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에 있는 마을. 예전에 만복사(萬福寺)가 있어서 ‘만복골’, ‘만복동’, ‘만북골’이라고도 했다.

36) 같은 책, 21권, p.93

37) 《병인치명사적》 2권, p.145

38)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4리. 한덕골 안 골짜기에 있는 마을.

 

39) 베장골 : 충남 천안시 북면 양곡리. 산속이라도 양지가 바르다고 해서 ‘벼장골’, ‘베장골’, ‘양곡(陽谷)’, ‘변정(卞正)’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목천현[1895년에 군이 됨] 북면에 속했는데, 1914년 천안군에 편입되었다.

 

40) 경기 안성시 안성1동에 속한 가현동에 있는 골짜기. 조선시대에는 죽산현[1895년부터는 죽산군] 서삼면이었는데 1914년 안성군에 편입되었다.

 

41) 같은 책, 21권, p.120

 

42) 충북 제천시 덕산면 수산리에 있는 마을. ‘수가리(壽加里)’, ‘탄지(炭枝)’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청풍도호부 원서면과 충주목 덕산면에 걸쳐 있었는데 1914년 제천군에 편입되었다.

 

43) 충북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모래우물이 있어서 ‘사정(沙丁, 沙井)’, ‘모래물’이라고도 했다.

44) 《병인치명사적》 23권, p.98

 

[학술지 교회사학 vol 7, 2010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하성래(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33237&Page=16&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파일첨부

0 1,392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