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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 시대의 신앙: 존재, 자유, 사랑

38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2-12

[과학 시대의 신앙] 존재, 자유, 사랑

 

 

신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필자가 지난 1년 동안 과학과 신앙에 대해 우리나라 최고의 잡지에 글을 쓴 것을 분에 넘치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과학자라고 하지만, 물리학의 한 분야를 전공하는 한 개인의 경험은 결코 일반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감히 개인적 생각을 독자분들에게 내어놓은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과 ‘대칭성’에 대한 믿음

 

물리학자들이 물질세계에 대해 흔히 ‘대칭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하는 그런 생각, 곧 인간에 대한 ‘보편성’을믿기 때문이다. 우주의 시작이 어땠는지, 저 멀리 안드로메다가 어떨지 가 보지도, 경험해 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론을 전개하는 것은 지금 이곳의 물리 법칙이 시간적으로 과거나 미래 언제라도, 공간적으로 이 우주 어디에서라도 적용될 것이라는 ‘대칭성’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이들과 근본적으로 같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단순히 물질의 조합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보편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신앙은 우리 자신이 물질의 단순한 조합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이러한 초월성을 믿지 않고 초월성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도킨스(R. Dawkins)와 같은 공격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이다.

 

물질을 초월하는 특성을 ‘자유 의지’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그런 자유 의지를 지닌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믿는다. 자유 의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란이 있다. 필자도 어렸을 때 양자 물리학의 측정이 결정론적이지 않다는 것에 착안하여 양자 물리학이 자유 의지를 증명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제는 자유 의지가 과학적, 논리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이라기보다는 양자 물리학의 비결정론적인 면이 자유 의지의 여지를 확보해 준다고 생각한다.

 

물질은 대칭성이라는 물리 법칙에 따르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를 초월하는 인간 존재의 보편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누가 보장하는 걸까? 그 초월성의 근원을 ‘창조주이신 하느님’이라고 믿으며, 이제 필자 나름의 신학을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독자분들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저 너른 마음으로 받아 주시기를 바란다.

 

 

한없이 무한하신 하느님

 

먼저 ‘나 자신은 존재하는가?’에서 출발해 보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의심할 수 없고, 의심하는 주체인 나는 분명히 존재하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나 말고도 다른 존재가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나의 존재를 넘어,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은 이 세상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논리적으로’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고 한다. 나도 어렸을 때 가끔 비슷한 상상에 빠지곤 했다. 이런 상상은 심지어는 내 가족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의심하게 했다. 이런 유아적(幼兒的)인 유아론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논리’가 아니라, ‘희망’과 ‘믿음’이다. 내가 존재한다면 나는 있을 가치가 있는 존재이다. 비록 내 존재 가치가 작지만, 이 가치는 영원하다고 믿는다. 그럼 내 가치를 영원히 기억하고 인정해 줄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존재가 신, 바로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내 가치가 영원하기에 그분은 영원한 분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희망하고, 믿는다.

 

나 자신을 영원한 가치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또한 신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수학적 비유를 쓰자면 무한대를 나타내는 수중에도 여러 단계가 있는데, 자연수의 개수 ‘알레프-0’(ℵ0)도 무한대이고, 연속적인 실수의 개수 ‘알레프-1’(ℵ1)도 무한대이지만, 알레프-1은 상대가 안 되게 더 큰 무한대이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통해 당신에게는 아무런 손상됨이 없이 당신의 자유 의지를 나누어 주셨다. 우리보다 무한히 크신 존재로서 우리를 온전히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하느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 당신을 우리에게 조금씩 내보여 주신다.

 

 

‘자유’와 ‘사랑’

 

자유를 가진 존재들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서로를 무시하든가, 미워하든가, 사랑하든가. 그중에서 가장 합당한 관계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각자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사랑’이다. 가장 이상적인 관계 양식을 내보인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 아닐까?

 

몇 년 전 중국은 ‘무쯔’라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중국과 유럽을 잇는 세계 최장거리 양자 암호 통신을 성공시켰음을 자랑하였다. 이 인공위성의 이름 ‘무쯔’는 춘추 전국 시대 노나라의 사상가인 ‘묵자’(墨子)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묵자는 반사경을 포함해서 다양한 발명을 하여 중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기술자였을 뿐 아니라 당시 국가 간 분쟁을 중재하기도 한 평화 운동가였다. 특히 무차별적 박애의 겸애(兼愛)를 설파한 평화론자로 알려졌다.

 

그의 주된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자.’는 것인데, 예수님의 복음과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묵자의 사랑은 방법론으로서 ‘우리가 잘 살기 위해 서로 사랑하자.’는 말이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이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론이다. 방법론으로서의 사랑은 누가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 무력해진다. 당위론으로서의 사랑은 하느님의 명령이니 논리적 반박은 불가하며,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통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탈출기의 해방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셨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요한 8,32 참조). 자유에 가장 합당한 행위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표현은 특히 ‘사랑의 복음서’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 복음서와 요한의 첫째 서간에 넘치도록 많이 나온다.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주체의 수효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불교는 인과를 중요시하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을 추구하고 결정론적인 운명론에 가까운 것 같아서 ‘0’으로 쓸 수 있다. 같은 의미에서 니힐리즘도 ‘0’을 뜻할 것이다.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하느님의 절대 의지 앞에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하니 ‘1’로 나타낼 수 있다. 그에 비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의 자유를 존중하시니 이는 ‘2 이상’이다. ‘자유를 가진 존재들’은 서로 사랑하며 미래를 만들어 간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라 5,1-13).

 

* 한 해 동안 ‘과학 시대의 신앙’을 써 주신 김재완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김재완 요한 세례자 – 고등과학원(KIAS) 계산과학부 교수로 양자 컴퓨터, 양자 암호, 양자 텔레포테이션 등을 연구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9년 12월호, 김재완 요한 세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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