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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5월 9일 (목)부활 제6주간 목요일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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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 어떻게 복음의 기쁨을 드러낼 것인가

139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3-22

[경향 돋보기 -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 어떻게 복음의 기쁨을 드러낼 것인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개신교 신자였다. 내가 천주교 사제임을 알고는 대뜸 묻는다. “천주교 신자들은 구원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한다면서요?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요.”

 

개신교 신자든 천주교 신자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표지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 예수님까지도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의 기쁨을 살아야 한다. 이는 아주 단순하고 근본적인 관점이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라고 당부한다(1테살 5,16.18 참조).

 

하지만 현실의 우리 삶은 슬픔과 고통, 좌절과 패배감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복음의 기쁨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무엇을 가져서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면, 예수님 그리고 그분과 같은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을 통해 배울 수 있다. 모든 이와 친구가 되어 형제애와 사랑을 나누고 그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면 말이다.

 

 

기쁨의 비결

 

기쁨의 비결은 시선의 정화에 있는 것 같다. 잘 들여다보고 오랫동안 보는 것이다. 사랑스럽게 보는 것이다. 잃어 버린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어버이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를 관상의 시선이라고 하였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내게는 주기적으로 만나는 장애인 친구들이 있다. ‘밀밭 모임’이다. 신학생 때부터 만나기 시작했으니 가히 30년을 훌쩍 넘겼다.

 

아가타는 얼굴에 붉은 점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계속 만나며 찬찬히 보니 숨어 있는 본디 아름다움이 내 눈에도 들어왔다.

 

학인이는 뇌 병변 중증 장애인이다. 젊어서는 자신의 장애가 원망스러웠는데, 나이를 먹으니 고마워진단다. 장애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의 그런 신앙 고백이 아름다웠다. 그는 언제나 유머를 구사하며 쾌활한 태도로 주변에도 기쁨을 준다.

 

다운 증후군을 앓는 강철과 주언이는 친절한 신사들이다. 만나면 늘 먼저 다가와 안아 주면서 말한다. “신부님 사랑해요. 보고 싶었어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 친구들의 놀라운 친화력을 나도 배우고 싶다. 하느님도 이 친구들을 보시면 미소 지으실 것 같다.

 

여러 번 병자성사를 준 암 환자 프란치스코 형제도 생각난다. 이번이 마지막인가 생각하면서 성사를 주고 일어나려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자기와 함께 좀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얼마를 앉아 있었을까? 그가 나를 놓아주며 말하였다. “신부님은 정말 내 친굽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당신 친구라 하시는 듯 황홀했다. 아주 잠시 함께 그와 같이 있었을 뿐인데 엄청난 영광을 받았다.

 

밀밭 회원 바오로의 여동생 순애 씨는 조현병 환자다. 바오로 형제의 집에서 모임을 할 때였다. 좁은 방에서 순애 씨는 구석으로 내몰려 시종 무표정으로 쉼 없이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한 말씀을 청했다. 그녀는 괜찮다며 방긋 미소지었다. 뜻밖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나는 밖에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순애 씨에게 큰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했다. 이번에는 순애 씨가 커다란 함박웃음으로 응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까 미소도 그랬지만 함박웃음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행복했다. 나도 모르게 주님을 알현한 느낌이었다. 작은 이 하나를 당신과 동일시하신 주님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당신 고향에서 다달이 청소부들을 만났다. 그들은 교종의 착좌식 때 초대받은 몇 안되는 이들로, 교종을 이렇게 평한다. “베르골료는 우리 친구입니다.” 교종은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하여야 한다.’(「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고 말한다. 그렇다고 가난한 이들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복음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복음화되도록 시간을 내고 경청하며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곧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일회성 만남에 그치거나 행여 그들을 시혜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고 기쁨도 배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소박한 예수님을 통해 기쁨을 배우자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마태 11,25 참조). 이때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도 철부지임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의 힘이 자신에게 머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한다고 하였다. 별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약한 이, 보잘것없는 이 안에서도 하느님의 권능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때 약함이 기쁨이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이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것을, 새 생명을 낳는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신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기쁨 또한 가득했다. 특히 성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큰 기쁨을 누리셨고 우리에게 그 기쁨을 알려 주려 애쓰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가수 송창식 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의 나쁜 것은 실은 다 좋은 것이다.” 선문답 같지만 신앙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부활의 기쁨이다. 십자가와 고통은 우리 신앙인의 영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억지로 고통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일상을 기쁘게 살다가 고통이 주어진다면 그때 부활의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고통이 주어질 때 놀라지 말고 그것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바오로 사도는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낸다.’(로마 5,3-4 참조)고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진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 죽음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여겨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본당 신자인 베로니카 자매의 고백이다. “남편은 주벽이 여전하고 아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시어머니는 가출하시고, 삼중의 고통이 몰아닥쳤어요. 순간순간 속상하고 약 오르고, 육신이 쓰러질 것 같이 한없이 지치긴 했지만 되돌아보면 그때가 내 일생에서 가장 사랑이 많았던 때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베로니카 자매는 그 힘든 시절을 “가장 사랑이 많았던 때”라고 회상한다. 가족을 사랑했고 아울러 수난으로 고통받으시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고통이 아니라 사랑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사랑이 있다면 고통도 달게 받고 기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공동체에서 기쁨 살기

 

예수님께서는 밀밭의 가라지를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 말씀하신다. 공동체의 일원에 대한 판단을 끝까지 유보하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악까지도 이용하신다. 이것이 죄의 신비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를 ‘복된 탓’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바오로 사도는 죄 많은 곳에 은총이 풍부하다고 말한다(로마 5,20 참조). 공동체에 섣불리 일괄적인 화합과 일치를 요구하는 내 목소리가 불협화음일 수도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 멸망했다. 우리의 시선을, 죄악이 아니라 의인을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세상과 교회의 악을 핑계 삼아 삶의 기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다그칠 필요도 없다. 기쁘게 할 일을 하고 그 다음은 하느님께 의탁한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시니 당신도 일할 뿐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한 5,17 참조).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삶은 단순해 보인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내어놓고 집집이 빵을 떼어 나누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런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받았고 주님께서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4-47 참조).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는 말이 와닿는다.

 

마지막으로 자연을 통해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눈앞의 자연은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사랑스럽게 자세히 본다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서는 자연의 사물 하나하나를 들며 그들이 얼마나 큰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지 말한다(3장 참조). 하늘에 태양이 떠 있고, 바람이 초목을 흔들고, 낮과 밤이 교차하고, 춥고 덥다면,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하신다는 징표일 것이다.

 

*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 의정부교구 광릉성당 주임 신부이다.

 

[경향잡지, 2020년 3월호,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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