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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인간 존엄의 근거인 인격 개념의 확장

57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2-17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인간 존엄의 근거인 ‘인격’ 개념의 확장

 

 

‘땅콩 회항’ 사건, 공관병을 노예처럼 부린 장군, 모욕을 못 견딘 아파트 경비원의 자살 등 이른바 ‘갑의 횡포’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이러한 내용이 누리 소통망(SNS) 등을 통해 퍼져 나가면서 대중은 분노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외치던 ‘갑’들은 사실이 방송을 통해 확산되면서 예상하지 못한 곤욕을 치렀다. 그 뒤 몇몇 ‘을’들이 목소리를 낸 덕분에 이 사건이 유독 주목을 받게 되었을 뿐 비슷한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사극에서 다루어지는 조선 시대만 보더라도, 왕조차 이 정도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에도 용납되지 않았던 일들이 민주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렇게 공공연히 자행되는 데는 이유가 있을 법하다. 갑질했던 당사자들이 비록 대중의 분노와 법의 심판에 밀려 고개를 조아리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들의 사소한 행위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고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을까? 이에 답하려면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인격개념을 살펴보는 작업이 도움을 줄 수 있다.

 

 

보이티우스가 제시한 인격에 대한 정의

 

‘인격’(persona)개념은 근대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년)를 통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정언 명령(定言命令)의 제2형식은 “너는 너의 인격에도 또 다른 사람의 인격에도, 인류를 언제나 목적으로써 사용하지,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써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에게도 결코 예외가 아니며, 특정한 조건하에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이성과 초월성 자체에만 근거를 두는 칸트보다 더욱 깊이 있는 인격에 대한 성찰은 중세 철학의 전통 안에서 발전되었다. ‘인격’ 개념의 정의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로마 최후의 철학자 보이티우스(Boethius, 480-524년)의 정의이다. 그는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Persona est rationalis naturae individua substantia)라고 정의했다. 

 

보이티우스는 먼저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이성적 본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인격을 보편적인 본성과 동일시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적 실체’라는 개념을 부각함으로써 개체들의 고유한 지위를 인정한다. 이런 정의는 플라톤처럼 인간을 영혼으로 환원하거나 유물론자들처럼 개체들이 지닌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두 극단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스콜라 철학이 시작되면서 보이티우스의 인격 정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이 정의로는 ‘관계성’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고, ‘삼위일체론’에 적용될 경우 ‘삼신론’(三神論)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쟁점이었다.

 

 

아퀴나스의 보이티우스 수용과 확장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이티우스의 정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 없이 해석을 통해서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이티우스의 정의뿐만 아니라 이를 비판하던 학자들의 견해까지 종합하여 ‘이성적’, ‘본성’, ‘개별적’, ‘실체’라는 각각의 요소가 담고 있는 뜻을 더 분명하게 드러냈고, 다양한 입장을 서로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그 정의를 상세히 분석한 것은 자신이 앞으로 할 작업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아퀴나스가 이러한 성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의 철학적 천재성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통찰의 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보이티우스의 정의는 철학적 용어를 신학에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퀴나스는, 처음에는 일상적인 언어나 철학적 개념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그에 머물지 않고 신학적인 관심과 통찰로부터 철학적 개념의 근본적인 변화 내지 발전을 끌어냈다.

 

곧 아퀴나스는 전통적인 개념이나 해석이 신학적인 문제에 부딪혀 도구로 사용되기에 충분하지 못한 경우 그 개념을 변형시키거나 확장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인격 개념의 경우 이런 작업의 결과는 보이티우스가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던 다양한 특성을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격 개념의 풍부한 활용

 

아퀴나스는 인격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성적 실체 안에 있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은 어떤 더 특별하고 더 완전한 모양으로 발견되는데, 그런 실체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지배권(dominium sui actus)을 가지며, 다른 사물들과 같이 작용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용한다”(「신학대전」, 이하 STh I,29,1).

 

이 설명을 통해서 ‘이성적 본성’과 이에 따른 ‘자기의식의 중요성’, 윤리적 행위 결정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인격이야말로 ‘전체 자연(본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인격은 전체 자연(본성)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perfectissimum in tota natura), 곧 이성적 본성 안에서 자립하는 것을 뜻한다”(STh I,29,3).

 

이에 더해 아퀴나스는 ‘개별성’과 ‘자립성’에 바탕을 둔 ‘교환 불가능성’(유일회성, 대체 불가능성), ‘관계성’과 신과의 유비적 연결에 기반을 둔 ‘자기 초월성’을 주목했다(STh I-II, 서문). 나아가 이 모든 특성을 포괄하는 ‘완결된 전체’가 지닌 근본적인 ‘존엄성’을 발견했다.

 

물론 아퀴나스의 이러한 종합이 결코 인격이 지닌 신비적인 성격을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의 많은 인격론 가운데 이렇게 다양한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아퀴나스의 인격 개념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현대의 인격 개념들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 곧 존재론적 인격론이 강조하는 인간의 자립성, 심리학적 인격론이 집중했던 인간의 자기의식과 책임성, 대화론적 인격주의가 언급했던 인격 상호 간의 통교 등은 서로 연결될 때 그 본디 가치가 드러난다. 이미 아퀴나스가 완성한 전통적인 인격 개념은 이러한 다양한 요소가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연결될 가능성을 함축한다.

 

아퀴나스의 인격 이론은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하지 못해 침체되었던 다양한 이론 사이의 활발한 토론을 자극한다.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많은 학자가 공감할 수 있는 풍부한 인격 개념이 정립될 경우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것이다. 국가와 종교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따라 개인의 존엄성이 위협받는 모든 곳에서 이런 개념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인격 개념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갑의 횡포’를 성찰해 보자. 아마도 횡포를 부리는 갑들은 자신이 주는 봉급, 또는 상품에 지불한 비용 등의 돈으로 그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인격’마저 구매한 것처럼 착각하는 듯하다.

 

더욱이 이른바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깨진 곳에서는 그 횡포가 더욱 커진다. 대한민국의 청춘들이 자조감에서 만든 ‘열정 페이’라는 신조어에서 드러나듯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다른 이의 노동을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으나 사회 안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돈으로 다른 이들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부를 지닌 갑부도 결코 살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타인의 인격’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돈을 썼는데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 하고 따지기 전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 또는 서비스업 종사들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2019년 7월에는 급기야 ‘직장 갑질 방지법’까지 시행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사회 전체가 각성하여 자신을 돕는 이들의 인격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박승찬 엘리야 - 가톨릭대학교 철학 전공 교수.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맡으며 한국가톨릭철학회 회장으로 활동한다. 라틴어 중세 철학 원전에 담긴 보화를 번역과 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다양한 강연과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교 문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린다. 한국중세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2월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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