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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성: 백성을 이루어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

57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2-12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성 : “백성을 이루어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

 

 

들어가는 말 : ‘공동합의성’의 개념

 

“공동합의성의 여정은 3천 년 기 교회로부터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길이다.”

 

2015년 <교황청 주교시노드> 설립 50주년 기념 연설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현대 교회가 걸어야 할 길로서 공동합의성(synodalitas)을 제시한다. 교황에게 있어 공동합의성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교회의 필수적 요소이다.

 

공동합의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표방한 교회론으로부터 도출되는 개념이다. 공의회는 교회 어느 한 사람이 혹은 일부 집단이 이끄는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충만한 구원을 향하여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임을 강조하였다. 보편교회의 주교단, 대륙별 및 국가별 주교회의, 교구 사제평의회 및 사목평의회, 본당 사목협의회 등이 이러한 정신을 반영하는 기구이다. 최근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공동합의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동합의성은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modus vivendi et operandi)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 교회는 함께 걸어가는 데에서, 회합에 있는 데에서, 그리고 모든 구성원들이 복음화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자신이 친교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실현하는 것이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항)

 

공동합의성은 단순히 의사 결정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삶의 방식’이요 ‘실존방식’, ‘활동방식’을 말한다.

 

 

1. 신학적 전제: 하느님 백성


1) 교회, ‘하느님 백성’

 

공동합의성 개념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이해에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계제도를 포함하여 모든 구성원들을 포괄하는 전체로서 교회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전망은 교계제도를 중심으로 교회를 보던 것과 비교할 때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교계제도에 속한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christifideles)’로부터, 성사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성품성사로부터가 아니라 세례성사로부터 교회를 이해하는 것이다.

 

공의회는 평신도만이 아니라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세례받은 사람들 전체’를 ‘하느님 백성’이라고 정의한 후 교계제도보다 먼저 다룸으로써 교계제도가 하느님 백성 ‘위’ 혹은 ‘밖’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이 백성 전체가 하느님 구원의 도구로 부름받았다는 것, 그리고 교계제도는 이러한 부르심에 봉사하기 위한 제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신자들 또한 교회 전체의 사명 수행을 위해 목자와 협력할 책임이 있다.

 

2) 하느님 백성의 실존방식 : 친교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본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 동호회처럼 각 사람들이 우연적으로 만난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그리고 구성원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몸인 공동체로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동체성의 강조는 교회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그 기원과 목표를 두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교회는 삼위일체적 구원경륜으로부터 생겨났고, 존재하며 그 구원사업을 실현하도록 부름받았고, 또한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이다. 따라서 세 위격간의 친교(koinonia)는 교회의 근원이자 모델, 목표이며, 이 친교는 교황과 주교들, 목자와 신자들, 지역교회들간의 관계,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의 관계, 나아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지향하고 실현해야 할 목표이다. 『교회헌장』은 교회가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자 도구”라고 선언한다. 한마디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1항)

 

그러므로 교회의 실존양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친교’이다. 친교는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상호 관계성, 그리고 ‘공통적인 것에 함께 참여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같은 말씀을 듣고, 한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이 신앙으로 하나의 세례를 받았고, 같은 성령의 도유를 받았다. 또한 같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몸,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룬다. 이들은 하나의 동일한 사명, 곧 모든 시간과 공간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실현할 사명을 받았으며,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역사 안에서 걸어가고 있다. 이 여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또 그것을 지향하며 걸어가는 여정 동안 형제들과 친교를 이룬다. 이러한 교회 이해로부터 ‘함께 가는 사람들’, ‘동반자’ 간의 공동합의성 개념이 도출되는 것이다

 

 

2. 함께, 그리고 저마다 제 길에서 : 공동 합의성의 구체적 실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구원의 도구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고 교회 자신이 궁극적으로 충만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봉사하도록 하느님은 교계제도를 세우셨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고 또 언제나 증가시키도록 당신 교회 안에 온몸의 선익을 도모하는 여러 가지 봉사 직무를 마련하셨다. 실제로, 거룩한 권력을 가진 봉사자들이 자기 형제들에게 봉사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품위를 지닌 모든 사람이 자유로이 질서 정연하게 동일한 목적을 함께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교회 헌장』 18항)

 

공동합의성이란 교회 구성원 모두의 실존 방식,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고, 이것은 교계제도에 속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의 관계도 포함한다. 더욱이 교계제도가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할 때, 목자와 결합된 신자들의 활동은 공동합의성을 가장 탁월하게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1) 하느님 백성의 직무 수행에 나타나는 공동합의성

 

하느님 백성이 세례받은 모든 이들의 전체라고 정의할 때, 이 백성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왕직, 예언직, 사제직에 참여한다. 공동합의성의 실현은 이 직무들의 수행에서 탁월하게 나타난다.

 

(1) 사제직 수행에 있어서 공동합의성: 보편사제직과 직무사제직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개념에 대들보 역할을 하는 것이 보편사제직 개념이다. 그리고 이것은 ‘함께 가는 여정’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보편사제직은 세례를 통해서 받는 것으로서, 세례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고(로마 6,3-4)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스스로 제물이요 사제가 되셨으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세례받은 모든 신자들은 기도하고 찬양 드리고 하느님을 증거하며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는 이 사제직을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수행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십자가에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과 실존 전체에서 수행된 것처럼 보편사제직이 수행될 수 없는 영역이란 없다.

 

“그들의[평신도들의] 모든 일, 기도, 사도직 활동, 부부 생활, 가정생활, 일상 노동, 심신의 휴식은, 성령 안에서 그 모든 일을 하고 더욱이 삶의 괴로움을 꿋꿋이 견뎌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이 되고(1베드 2,5 참조), 성찬례 거행 때에 주님의 몸과 함께 정성되이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 또한 이와 같이 평신도들은 어디에서나 거룩하게 살아가는 경배자로서 바로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한다.”(『교회헌장』 34항)

 

그런데 보편사제직 수행은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특징을 갖는다. 개인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보편사제직은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사제직 수행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개인의 능력은 전체로서의 교회가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요 조건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의 봉헌이 개별적 봉헌의 총합인 것은 아니다. 이 봉헌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몸인 교회가 하는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사제직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장이 전례이고(『전례헌장』 7항 참조) 이 중에서 성찬례는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든 전례 거행이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활동이며, 모든 전례 거행의 1차적 집전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제단에서 자신을 봉헌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다(SC 7 참조). 직무사제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찬의 희생제사를 온 백성의 이름으로 봉헌하고 신자들도 성찬의 봉헌에 참여한다. 다시 말해 ‘목자와 결합된 신자들 전체’ 곧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체성사의 거행 안에서 사제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사제의 손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제와 ‘함께’ 희생 제물을 봉헌한다. “성찬의 희생제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신적 희생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기 자신을 그 제물과 함께 봉헌”(LG 11)한다. 공의회는 직무사제의 고유 역할을 분명히 하지만 그러면서도 직무사제의 봉헌이 신자들과 분리되어서 일어나지 않으며 이 봉헌에서 신자들의 역할 또한 지극히 능동적임을 강조한다. 성체성사에서 공동합의성은 탁월하게 나타난다.

 

신자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바치는 희생 제사가 제단의 희생제사와 함께 하느님께 봉헌됨으로써 사제적 백성의 직무 수행은 정점에 도달한다. 개인적 희생제사와 제단의 희생제사와의 관계는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제사의 성격을 보면 분명히 이해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신 십자가의 희생제사는 당신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십가가 희생제사는 온 생애를 성부의 뜻에 따라 사셨던 그분 삶의 결정적 완성이다. 그리스도의 ‘실존적 희생제사’와 ‘십자가 희생제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실존적 희생제사는 십자가에서 그 충만에 도달한다. 신자들이 삶의 모든 순간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실존적 희생제사이고, 이 희생제사는 성찬례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결합됨으로써 그 완성에 도달한다. 이어 성체성사는 다시 신자들로 하여금 삶 안에서의 실존적 희생제사를 바치도록 고무하고 파견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의 보편사제직의 수행은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개인의 삶으로써 준비되고 성찬례에서 절정에 도달하며 다시 개인의 삶으로 파견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사제직이 없는 직무 사제직은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하고 직무 사제직이 없는 보편사제직은 그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한다. 성체성사는 이 두 사제직이 ‘하나로 모여’ 하느님 백성 전체가 사제직을 수행하는 장이고 따라서 공동합의성이 탁월하게 실현되는 장이다.

 

(2) 예언직 수행에서의 공동합의성: 신앙감각과 교도권

 

보편 사제직의 수행은 예언직의 수행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예언적 기능 안에서 신앙유산이 교회를 살아있게 한다. 세례 받은 신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몸 전체의 사명에 참여하지 않는 지체는 하나도 없으며, 각 지체는 자기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언자의 정신으로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사제교령』 2항) 그리고 사제직의 수행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는 주체는 무엇보다도 세례받은 신자 전체, 곧 하느님 백성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 특히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로 그리스도께 대한 생생한 증거를 널리 전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입술의 열매를 찬미의 제물로 하느님께 바친다.”(『교회헌장』 12항)

 

삶의 증거와 찬미라는 형태로 수행되는 예언자직에서 공의회는 특별히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백성 전체가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보편적 동의를 표할 때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교회헌장』 12항) 공의회의 이 가르침의 근원에는 세례받은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신앙감각(sensus fidei)를 일으키시어 이 백성에게 위탁된 진리의 말씀이 보호되고 전파되는데에 있어 오류가 없게 하신다는 신앙이 있다.

 

“신자들은 올바른 그리스도교 교리와 실천을 파악하고 그에 동의하며, 잘못된 것을 배척하도록 해 주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본능을 지닌다. 이러한 초자연적 본능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친교 안에서 받은 신앙의 은사와 본질적으로 결합된 신앙감각이라고 불린다. 이 신앙 감각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예언자적 소명을 완수하도록 해준다.”(『교회생활에서의 신앙감각』, 2항)

 

신앙감각은 오감과 같은 ‘감각’이라기보다는 ‘식별하고 동의하는, 혹은 배척하는’ 인지적 차원을 동반한 일종의 직관이다. 이 신앙감각으로 인해 신자들 전체가 신앙과 윤리에 대한 문제에 동의를 표할 때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교회가 세례받은 이들이 총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것처럼, 그리고 각 개인이 그 몸에 참여하는 것처럼, 교회가 하는 신앙의 증언은 세례받은 이들의 의견의 총합이 아니라 교회의 동의, 하느님 백성의 소리(vox populi Dei)이다.

 

그렇다면 하느님 백성의 이러한 예언직 수행에 있어서 공동합의성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교도권은 직무 사제직이 보편사제직 ‘속’에 위치한 것처럼, 예언직 수행에 있어서도 하느님 백성 ‘속’에 위치한다. 교도권은 하느님 백성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감각과 연관을 맺고 있어야 한다. 교도권은 사도로부터 전해받은 신앙을 ‘단독으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감각이 성령에 의한 것으로서 신앙유산의 전달과 보호에 대한 것이며, 신앙 유산이 교도권이 가진 금고 속에 있는 보물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전’(『계시헌장』 8항)이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 하느님 백성 속에 살아있는 성전을 들어야 한다. 물론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때로 백성이 성령의 움직임을 잘못 알아듣기도 하기 때문에 교도권은 신자들 안에 있는 신앙감각을 강화하고 식별하고 판단한다.

 

성령께서 하느님 백성 안에서 신앙감각을 일으켜 주심으로써 이 백성으로 하여금 신앙진리를 수호하고 전달하게 하시고 교도권은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 백성을 인도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 백성과 교도권 사이에 교도권 중심의 일방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편사제직과 직무사제직이 서로를 ‘향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백성의 신앙감각과 교도권 사이에도 호혜성이 있다. 하느님 백성이 교도권의 설교를 통해 울려 퍼지는 하느님 말씀에 의해 양육되면 될수록 하느님 백성 전체 그리고 각 개인들의 신앙감각은 더 정제된다. 반면 설교가 살아있지 못하고 제대로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면 하느님 백성은 구원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다른 한편 교계제도에 속하게 될 어린아이, 젊은이에게 신앙을 전하고 기도를 가르치고 하느님을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교계제도만이 아니라 가정, 주일학교, 본당에 있는 하느님 백성이다. 그리고 사제가 된 후에 하느님 백성 속에 울려 퍼지는 성령의 소리를 통하여 사제 또한 성장한다. 그러므로 교도권과 하느님 백성 사이에도 호혜성, 일종의 ‘비례성’의 법칙이 있다.

 

2) 공동합의성의 실현

 

(1) 다양한 수준에서의 공동합의성의 실현 및 제도적 설립

 

공동합의성이 하느님 백성의 개념, 친교, 그리고 이 백성이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에 참여하는 방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합의성은 교황, 주교, 혹은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 등 몇몇 사람들만의 활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 내에서 한 사람(one)-몇몇 사람(some)-모두(all) 사이에 일어나는 역동성이다. 교황과 주교단, 주교와 사제단, 사제와 신자들, 혹은 교황과 신자들 전체, 주교와 신자들처럼 ‘하나-몇몇 사람-모두’는 다양한 수준에서 공동합의성을 실현한다. 그래서 공동합의성은, 보편교회, 지역교회, 여러 개별교회들을 포괄하는 광범위 지역 차원, 그리고 본당 수준에 이르기까지 교회생활 전체에 대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공동합의성’을 명시적으로 정의한 것은 아니나, 교회의 다양한 차원에서 설립하도록 규정한 제도들은 이후 발전하게 될 공동합의성의 정신을 실현하는 도구들이 된다. 교구의 의전사제단, 참사회, 사제평의회, 사목평의회 등이 이에 속한다. 특히 사목평의회는 주교가 사제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 곧 수도자와 평신도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도록 구성하는 자문기관이다.

 

“교구마다 특별히 교구장 주교가 직접 주재하고 특별히 선발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동참하는 사목 평의회를 설치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이 평의회는 사목 활동에 관한 것을 연구하고 심의하며 이에 대한 실천적 결론을 제시하는 소임을 가진다.”(『주교교령』 27항)

 

(2) 공동합의적 교회 실현을 위하여 : 경청과 협력의 중요성

 

교황 프란치스코는 공동합의적 과정의 단계를 경청, 결정, 실행으로 보았다. ‘공동합의적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시작하고”, “목자의 소리를 들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자요 박사”로 불리도록 초대된 “로마 주교의 소리를 들음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여기에서 하느님 백성, 주교단, 로마의 주교, 곧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이 과정의 주체들이다.

 

사실 공동합의성 실현에 있어서 경청은 1단계라기보다는 가장 근본적이요 필수적이며 전 과정이 속해 있어야 하는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경청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양한 경우에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주교는 아랫사람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자기와 함께 기꺼이 협력하도록 권고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교회헌장』 27항).

 

경청은 신자들과 일하는 사제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요청된다.(『사제교령』 9항 참조) 이렇게 ‘들어야 할’ 목자의 의무는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해야 할’ 신자들의 의무에 상응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그들이 갖춘 지식과 능력과 덕망에 따라 교회의 선익에 관련되는 일에 대하여 자기 견해를 밝힐 권한이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럴 의무까지도 지닌다.”(LG 37)

 

교황 프란치스코는 주교 시노드 설립 50주년 기념 담화에서 경청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하나의 공동합의적 교회는 주의를 기울여 듣는 교회, 그 들은 바를 실현하는 교회이며 주의를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서로 듣는 것으로써 모든 이가 들어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신자 백성, 주교단, 로마의 주교 모두 서로 들어야 하고 모두가 성령의 소리, 곧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경청은 목자에게만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 백성(전체), 주교단(몇몇), 그리고 로마 주교(하나)에 이르기까지 상호 경청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청이 필요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이해, 그리고 직무자가 하느님 백성 ‘위’에도 ‘밖’에도 아닌 하느님 백성 ‘안’에 위치하며, 교회 내 구성원 누구도 다른 구성원들과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전체가 그리고 각 구성원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사명을 부여받았고 함께 가는 여정에서 각자의 몫을 능동적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며 같은 성령께서 교회 전체를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고립된 채 독립적으로 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으로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길을 간다. 이 여정의 동반자들로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의 형제, 친구, 협력자, 협조자로서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공동합의성의 실현이 좌우된다.

 

협력자 혹은 협조자라는 용어는 주교와 사제들의 관계를 말할 때 종종 사용되는데, 사제는 주교의 협력자(『교회헌장』 28항)로서 주교의 신중한 협력자(『주교교령』 15와 28항), 교구 통치에 있어서 주교의 협력자(『주교교령』 29항)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사제와 평신도의 관계에도 사용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관련되는 이 사도직에 더하여 평신도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복음 안에서 바오로 사도를 도와주며 주님 안에서 많은 일을 하였던 저 사람들처럼(필리 4,3; 로마 16,3 이하 참조), 교계 사도직과 더 직접적인 협력을 하도록 불릴 수 있다.”(『교회헌장』 33항)

 

한편 실천적인 면에서 협력자의 개념을 단순 ‘조력자’로 축소시키는 것은 공동합의성 개념에 부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동합의성은 함께 가는 사람들을 공통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동반자로 보면서, 각자 제 몫을 하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몫을 하도록 “상호 협력”하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만약 협력을 단순 조력으로만 보게 되면 구성원들 간의 관계는 상하관계, 혹은 일방적 의존관계에 머물게 된다. 공동합의성의 실현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구성원들이 ‘공통의 일’을 위한 각자의 고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각 구성원이 공통의 활동에 각기 고유한 기여를 한다는 것이 간과되면 안 된다.

 

“목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구원 사명 전체를 자기들이 독점하도록 세우신 것이 아니며 오로지 모든 이가 고유의 방법으로 공동 활동에 한 마음으로 협력하도록 신자들을 사목하고 그들의 봉사 직무와 은사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들의 빛나는 임무임을 안다.”(『교회헌장』 30항)

 

 

나가며

 

20세기 공의회 이후 특히 최근 가톨릭교회는 ‘함께 가는 길’을 그 핵심적 개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공동합의성의 실현 여부에 대한 책임은 공동체 구성원 중 어느 누군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각 구성원들은 서로 구분되는 고유의 역할을 하고 있되,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LG 32 참조) 목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권위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무사제직과 교도권을 수행하고 신자들은 그러한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같은 성령으로부터 도유되어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고 신앙 감각과 말씀의 선물을 가지고 예언직을 수행한다. 이 둘의 직무 수행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있는 상호지시적 관계 안에서 그리고 호혜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둘은 함께 가야 하고, 함께 감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의존적으로 기대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몫을 수행하면서 가는 것이고, 동시에 상호 연관성으로 말미암아 서로 각자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가는 것이다.

 

따라서 목자에게든 신자에게든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는 데 있어 게으름과 무지는 설 자리가 없다. 한국교회가 쇄신되어야 한다고 본다면, 혹은 함께 가기에는 평신도의 준비상태가 부족하다고 본다면 그 모든 책임은 평신도에게만도 목자에게만도 있지 않다. 모든 것이 목자의 탓이라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목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모든 것이 평신도의 탓이라면 그것은 목자의 역할뿐 아니라 평신도와 목자 사이의 불가분리적 연관성을 간과한 것이다. 목자와 신자들은 함께 길을 가는 동반자이고, 각자 자기 몫이 있으며 그 몫에는 다른 쪽이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혹여 동반자가 자신의 사명에 소홀하다고 하더라도 동반자의 게으름이 나의 게으름까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개인주의자들의 모임, 혹은 예수 동호회가 아니라, 하느님이 백성을 이루어 당신을 섬기게 하신 공동체로서, 구성원들이 제 몫을 충실히 해나가는 가운데 그리고 다른 지체들도 충실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가운데에 하느님이 세우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평신도, 2019년 겨울(계간 66호), 최현순 교수(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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