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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8: 케다에서 탈롱까지

1662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4-03-22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8) 케다에서 탈롱까지


호위병과 함께 코끼리 타고 밀림 헤쳐가며 탈롱으로 향하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케다에서 가톨릭 신자인 샴 왕국 대사의 도움으로 지역 관장인 리고르 왕자를 만나 스님과 똑같이 환대받았다. 폐허가 된 케다 렘부의 예수 성심 성당. Nutmeg books.

 

 

페낭 도착 후 행선지 모두 뒤틀어져

 

1827년 1월 12일 페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한 프랑스인 선장이 타밸(Tavael)과 미얀마 남부 지역인 메르기(Mergui)를 거쳐 저를 샴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페낭의 선교사들은 이 제안을 환영했고 저 역시 동의했습니다.

 

페낭에 머무는 동안 장 바티스트 부쇼(Jean Baptiste Boucho)ㆍ바르브(Barbe) 신부가 사목하는 토종(Taujong)과 풀로티쿠(Poulo-Ticoux)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풀로티쿠는 쥐들이 득실거리고 주민들이 몹시 가난해 ‘쥐섬’이라고 불렸습니다. 바르브 신부는 이곳에서 교우들을 돌보는 본당 사목자, 이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는 교리교사,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 교수, 가톨릭학교를 감독하는 책임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게 “저도 방콕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내비쳤습니다.

 

사실 저는 주님 부활 대축일 이전에 방콕에 도착해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님과 함께 파스카 성야 미사를 봉헌할 수 있기를 고대했습니다. 배로 메르기에 가면 거기서 방콕까지 400㎞ 남짓한 거리여서 가능하리라 예상했습니다. 프랑스에선 역마차로 이틀 길이지만, 보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기대는 얼마 안 가 물거품이 됐습니다. 1827년 주님 부활 대축일 다음날 곧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이 되어서야 페낭을 떠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선지도 출발 전날 모두 뒤틀어졌습니다. 저와 일행을 태워주기로 한 프랑스 선장이 행선지를 수마트라 섬 아셈(Achem)으로 갑자기 바꿔버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원래 계획대로 육로로 방콕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 장 바티스트 부쇼(Jean Baptiste Boucho, 1797~1871)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가 페낭에서 만났던 그는 1845년 말라카-싱가포르대목구장으로 임명돼 샴대목구에서 분리된 마라카 반도를 사목했다.

 

 

밀림 헤치며 코끼리 타고 리고르로 출발

 

방콕에서 사제품을 받게 될 신학생 한 명과 갓 세례를 받은 중국인 교우 한 명을 데리고 페낭을 떠났습니다. 다음 날 말레이시아 북부 지역인 케다(Kedah)에 도착해 이곳 샴 왕국 대사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방콕까지 가는 데 필요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울러 대사의 안내로 지역 관장인 리고르 왕자를 만났습니다. 케다 관장은 친절하게도 저와 저의 일행이 리고르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호위병과 코끼리를 제공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호위병이 차출되고 채비가 갖춰지는 동안 저는 이곳에서 유럽인 사제로서 스님과 똑같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곳에선 오직 스님만이 고관에게 표하는 예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스님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온종일 눈을 내리깔고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앉지도 누워있지도 못하고 산책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곳 케다에서 교우 둘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유아 세례 예식을 가르쳐주며 마을에서 아기들이 죽을 위험에 처하면 세례를 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우리는 케다에서 일주일가량 머물다 리고르로 출발했습니다. 케다 관장은 호위병 열넷과 코끼리 몰이꾼 다섯, 코끼리 다섯 마리를 내주었습니다. 리고르(Ligor, 오늘날 나콘시탐마랏)는 방콕에서 약 610㎞ 떨어진 태국 남부의 중심 도시입니다. 1767년 샴의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리고르 왕국으로 독립했으나 곧 샴의 방콕 왕조에 귀속됐습니다. 현재 샴 왕국은 방콕 왕조의 라마 3세(1788~1851)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샴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왕국입니다. 불교 국가인 샴은 라오스ㆍ버마(미얀마)ㆍ캄보디아뿐 아니라 케다ㆍ페를리스ㆍ클란탄ㆍ트렝가누 등 말레이반도 북부 4개의 이슬람 왕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교지인 방콕으로 갈 당시 샴 왕국은 라마 3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라마 3세.

 

 

리고르까지의 여정은 기대보다 순탄치 못했습니다. 케다에서 출발하기 며칠 전 여행자 9명이 무장강도에게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우리는 여정 중에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시신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 시신을 본 14명의 무장 호위병들은 겁에 질려 제게 호송단을 보강하기 전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또 페낭에서부터 동행했던 중국인 신입 교우와 케다 주재 샴 대사가 심부름꾼과 통역자로 보내준 교우 둘은 케다에서 50㎞를 못 가 탈진해 버렸습니다. 밀림이라 길을 내면서 나아가야 했기에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행은 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수풀에 불을 질러 길을 만들었습니다. 탈진한 이들과 코끼리를 번갈아 타면서 밀림을 헤쳐갔습니다. 저도 독이 든 열매를 모르고 막 먹으려다 안내자들이 급히 낚아채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후 열매를 따기 전에 안내자들에게 물었고, 그들은 대부분 “못 먹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오염된 물과 해충으로 대부분 풍토병 앓아

 

우리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은 후 쉬지도 마시지도 먹지도 못하고 저녁 7시까지 길을 개척해 이동하는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강도질을 일삼는 원주민들과 맹수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낮에는 습도가 높은 열대 몬순의 찜통 더위와 살갗을 태우는 강한 햇살이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모래가 햇살을 반사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챙 넓은 천모자를 만들어 얼굴을 가려봤지만, 피부가 물고기 비늘처럼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밤은 더 위험했습니다. 표범과 호랑이·독사와 각종 벌레가 득실대는 땅 위에서 무방비 상태로 돗자리만 깔고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이들을 방어하는 유일한 수단은 야영지 주위로 불을 지펴놓은 것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우리 주변을 배회하던 호랑이가 가까이 접근했는데 코끼리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괴롭히고 위험에 빠뜨린 것은 깨끗한 마실 물을 얻을 수 없는 거였습니다. 대부분 썩은 물이거나 흙탕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물을 받아 불순물을 가라앉힌 후 윗물로만 차를 끓여 마셨습니다. 저보다 먼저 이 길을 갔던 페코 신부가 풍토병으로 갑자기 선종한 까닭도 아마 오염된 물과 해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리고르로 곧장 가려는 계획을 부득불 접어야만 했습니다. 모순되게도 가장 약한 저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병을 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할 만큼 까다롭게 굴어 저만 멀쩡하고, 모든 걸 아는 양 자신했던 현지인 모두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위병 일부를 교체하기 위해 탈롱(Thalon, 오늘날 파탈룽)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은 리고르 왕국의 속국으로 왕의 친척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을 떠나 말레이시아 북부 케다에서 그곳 관장의 도움으로 호위병과 함께 코끼리를 타고 탈롱으로 향했다. 케다 구눙바링(Gunung Baling). Yeng Chan.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3월 1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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