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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기근 신부의 로마여행일기

104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7-17

한기근 신부의 〈로마여행일기〉

 

 

국문 초록

 

〈로마여행일기〉는 천주교 성직자 한기근 신부가 프랑스, 이탈리아, 팔레스티나의 성지들을 순례한 기록이다. 근대 문물과 제도 · 사상 등을 소개하는데 집중하였던 1920년대의 많은 여행기들과는 달리 천주교 성지들을 순례한 여행기이다. 프랑스어와 라틴어 해독에 어려움이 없었던 한기근 신부는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에 한국인 성직자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로마에 도착하여 조선 치명자들 시복식에 참가하였고, 시복식 후 감사 미사에 참가하였으며, 로마의 많은 성당들을 참배하였고 카타콤바를 방문하였다. 두 번째 도착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비안네 신부, 소화 데레사 수녀, 에마르 신부의 생가 등을 순례하였는데, 조선 치명자들이 시복된 1925년에 시성 · 시복된 이들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겸 신학교도 복자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동양 선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 순교한 이들이 선교를 준비하며 생활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라 살레트 · 루르드 · 파리 등 성모 발현지들을 방문한 것은 한기근 신부의 성모 신심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의 깊은 성모 신심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많은 성당들을 참배하면서, 도시는 물론 시골에도 가득한 성당들을 바라보면서, 비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천주교 성직자 한기근 신부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10일 동안 여행하였던 팔레스티나는 한기근 신부에게 최고의 성지 순례지였다. 4복음서와 《종도행전》에 언급된 장소들을 직접 찾아가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루살렘 · 베들레헴 · 나자렛에서 예수와 성모와 사도들의 자취를 확인하고 기도하였으며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가 방문하였을 때 팔레스티나의 많은 성지들은 여러 교파가 공동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사나 예절을 할 수 없는 곳도 있었고, 입장료를 내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모스크로 바뀌어 있는 성지도 있었다. 이탈리아 ·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티나에서도 시간과 비용 때문에 가지 못한 곳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한기근 신부는 천주교회의 중요한 성지들을 참배하고 〈로마여행일기〉로 기록하였다. 〈로마여행일기〉는 비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한국의 천주교회 성직자가 기록한 첫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기로 의미가 있다.

 

 

1. 머리말

 

〈로마여행일기〉는 1925년 5월 11일 경성(京城)1)역을 출발하여2) 이탈리아 · 프랑스 · 팔레스티나 등을 여행하고 12월 10일 경성의 종현(鍾峴) 성당으로 돌아온3)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1867/1868~1939) 신부의 여행기이다. 1920년대는 여행 기록의 홍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해외여행 기록들이 신문 · 잡지에 수록되었다. 많은 해외여행자들이 그들이 탄 배 안의 우편이나 경유지의 우편을 통해 국내 언론사에 자신의 여행 기록을 보냈다.4) 김준연(金俊淵, 1895~1971)은 〈독일 가는 길에〉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12회,5) 박승철(朴勝喆)도 같은 제목으로 《개벽》에 3회 연재하였으며,6) 정석태(鄭錫泰, 1901~?)는 〈양행 중 잡관 감상(洋行中 雜觀雜感)〉으로 《별건곤》에 3회, 계정식(桂貞植, 1904~1974)은 〈인도양과 지중해−도구(渡歐) 수기〉로 《동아일보》에 9회에 걸쳐 그들의 여행기를 수록하였다.7)

 

한기근 신부의 〈로마여행일기〉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에 약 2년 동안 게재되었다. 1925년 5월 31일 자(제566호)부터 1927년 6월 15일 자(제615호)까지 39회에 걸쳐서 였다.8) 여기에 〈로마를 향하여 떠나면서〉라는 논설(1925년 5월 15일 자, 제565호)은 머리말, 〈잘 다녀왔습니다〉(1926년 1월 15일 자, 제581호)라는 글은 맺음말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여행일기〉는 1920년대에 넘쳐났던 많은 여행기들과 비교할 때 독특하다. 대부분의 유럽 여행기들은 저자가 유학생이었고, 작성 목적이 근대 문물과 제도 · 사상 등을 소개하는데 집중하였으며, 그들의 유학 목적지인 독일 · 프랑스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하는데 치중하였다. 그런데 〈로마여행일기〉의 저자는 천주교 성직자였고, 천주교 신자들의 신익(神益)을 위하여 천주교회의 기관지에 수록하는 것이 작성 목적이었으며,9) 여행한 곳은 이탈리아 · 프랑스 · 팔레스티나의 천주교 성지였다. 그래서 근대 문물과 제도 · 사상 등을 소개하는데 집중하였던 1920년대의 많은 여행기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로마여행일기〉를 분석함으로써 그동안 근대 문물 · 제도 · 사상의 측면에서만 추적하였던 1920년대 여행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연구 영역을 만들어낼 수 있다. 〈로마여행일기〉에도 재난 대비 훈련과 같은 근대적인 제도, 수에즈 운하 · 전기 · 승강기 등 근대 문물에 대한 기록들이 있다. 내용이 적지만 반근대주의 선서10)를 하였던 성직자가 기록한 것으로 의미가 있고, 다른 여행기들과는 차이가 있기에 별고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2. 조선 치명자 시복식 참가 경위

 

한기근 신부는 1925년 5월 11일 로마를 향해 경성역을 출발하였다.11) 로마 교황청에서 거행될 ‘조선 치명자’12)들의 시복식(諡福式)에 한국인 신부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성년(聖年)이었던 1925년13) 교황청은 7회의 시성식(諡聖式), 그리고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을 포함하여 5회의 시복식을 예정하고 있었다.14)

 

기해(己亥) · 병오(丙午) 박해 때 순교한 79위 조선 치명자들15)의 시복식은 파리 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에서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 청원인 역할을 하고 있던 가르니에(Garnier, Eugène, 1862~1952) 신부가16) 보낸 1924년 9월 29일 자 편지로 확인되었다.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이 1925년이 확실하다는 내용이었고17) 이 소식은 1924년 10월 31일 자 《경향잡지》 552호에 소개되었다.18) 1925년 3월 17일 서울 대목구장 뮈텔(Mutel, Gustave Charles Marie, 閔德孝, 1854~1933) 주교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Demange, Florian, 安世華, 1875~1938) 주교가 조선 치명자들 시복식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을 출발하였다.19) 시복식이 1925년 6월 초에 있으리라는 소식을 접하였기 때문이었다.20) 두 주교가 출발한 3월 17일, 《조선신문(朝鮮新聞)》에 조선 치명자들 시복식이 언급되었다. 앵베르(Imbert, Laurent Joseph Marius, 范世亨, 1797~1839) 주교 외 2명과 조선인 신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등 4명이 ‘조선 순교자’로 선정되고 복자로 서위(敍位)되어 로마 교황청에서 개최될 박람회에서 표창되기에 이들의 유골을 가지고 뮈텔, 드망즈, 한(韓) 신부 등 3명이 로마로 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21) 《조선신문》보다 일주일 전인 1925년 3월 10일 자 《매일신보(每日申報)》도 뮈텔이 순교자들의 유해를 바티칸으로 가져갈 것이라고 하였다.22) 《동아일보》 3월 19일 자도 뮈텔과 드망즈 그리고 ‘한 모(韓某)’ 신부가 순교자 4명의 유골을 가지고 3월 18일에 출발하였다고 보도하였다.23) 한국 천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는 1925년 3월 31일 자에서 시복식 참가를 위한 두 주교의 출발을 알렸다.

 

《경향잡지》보다 《조선신문》과 《매일신보》에서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과 한국 천주교회의 시복식 참가를 먼저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신문은 일간지였고 《경향잡지》는 격주간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일간지일지라도 이러한 내용을 언급한 것은 3 · 1운동 이후 일제가 외국인 선교사들의 행동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24) 《경향잡지》의 기사를 통해 한국인 신부의 시복식 참가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한 신부’, ‘한 씨 성을 가진 신부’라고 지칭할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회에 물어서 알 수 있었겠지만, 한기근 신부의 여권 신청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여권을 발급받은 한국인들은 많지 않았는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이름, 본적지, 신분, 나이, 직업, 여행지, 여행 목적’ 등을 신청 서류에 기재하여 제출하고25) 상당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26) 일제는 그들의 식민통치 실상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한국인들의 외국 여행을 어렵게 하였고, 여권발급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다.

 

《조선신문》은 시복 대상자를 4명으로, 시복 장소를 교황청에서 개최될 박람회라고 잘못 소개하였다. 《동아일보》도 두 주교의 출발 날짜를 3월 18일로, 그리고 ‘한 모 신부’가 두 주교와 같이 출발하였다며 잘못된 내용을 보도하였다. 두 신문에서 뮈텔, 드망즈와 함께 교황청에 가는 ‘한 신부’, ‘한 씨 성을 가진 신부’가 언급되었는데 한기근 신부였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는 46명의 한국인 신부와 64명의 서양인 신부가 속해 있었는데,27) ‘한 씨 성을 가진 신부’는 한기근 신부뿐이었다.

 

한기근 신부가 한국인 신부 대표로 시복식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제 서품이 상당히 빠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기근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7번째 사제 서품자였고, 1924년 12월 말 현재 그보다 사제 서품이 빠른 한국인 신부는 1896년 4월 26일에 사제 서품을 받은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신부와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1863~1949) 신부뿐이었다. 그런데 강도영 신부는 미리내 본당, 정규하 신부는 풍수원 본당의 본당신부로 활동 중이었고, 한기근 신부는 1913년 5월부터 경향잡지사의 제2대 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28) 경향잡지사 사장 직무가 본당신부 직무보다는 상당 기간의 여행에 필요한 시간을 내기가 나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에게 시복식 내용을 알리기에 《경향잡지》가 효율적이라고 생각되어 경향잡지사 사장 직무를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가 선정되었을 것이다.

 

두 주교가 로마를 향해 출발하였을 때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고, 그래서 한기근 신부는 시복식 날짜에 맞추어 출발하는 것으로 되었다.29) 한국 천주교회는 두 주교가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한 1925년 4월 30일에 조선 치명자들의 정확한 시복식 날짜를 알았다.30) 7월 5일에 조선 치명자 79위의 시복식이 거행될 것이라는 뮈텔 주교의 전보가31) 5월 5일 경성의 드브레(Devred, Emile Alexandre Joseph, 兪世俊, 1877~1926) 주교에게 전해졌다.32)

 

두 주교의 출발 약 두 달 후인 1925년 5월 11일 한기근 신부도 로마를 향해 출발하였다.33) 시복식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서 출발하는 유일한 한국인 성직자였고, 한국인 신자였다. 5월 11일 오후 부산에서 시모노세키[下關]행 배에 탑승한 한기근 신부는 이튿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고베[神戶]로 이동하였고, 교토[京都]로 가서 한국인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일주일 동안 일본에 머물렀다.34)

 

5월 18일 한기근 신부는 앙브와즈(Amboise)에 탑승하여 고베를 출발하였다.35) 당시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방법은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너가는 것과,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는 두 가지였다.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4월 2일 인천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상하이[上海], 런던, 베를린을 거쳐 49일 후인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36) 1901년 프랑스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김만수(金晩秀, 1858~1936)도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웨이하이[威海]-옌타이[煙台]-상하이-홍콩[香港]-사이공-콜롬보-지부티(Djibouti)-포트사이드(Port Said)-마르세유(Marseille)를 거쳐 53일 만인 6월 6일 파리에 도착하였다.37)

 

1908년 10월 24일 파리를 출발한 조선 대목구장 뮈텔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중국 안둥[安東 : 1965년 丹東으로 개칭]까지 이동한 후 배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23일 후인 11월 15일 한성에 도착하였다.38) 경의선(京義線)이 1906년 4월에 개통되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계되었기 때문에39) 가능해진 행로였다. 1911년 10월 27일 압록강 철교가 준공되고40) 11월 1일 개통되어41) 중국 창춘[長春]까지의 철로가 완성되자 경성에서 파리까지의 여정은 11일로 단축되었다.42)

 

그러나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갔다. 상당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음에도 시베리아 철도보다 배편을 이용한 것은, 결빙기에는 압록강 항해가 불가능하고 압록강 철교도 폐쇄되었기 때문이다.43) 여기에 국치 이후 일본과 러시아 · 소비에트 연방의 불편한 국제 관계가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시베리아 철도 이용이 중단되었고, 전후에도 석유와 석탄 매장을 기대한 일본군이 북(北)사할린에 계속 주둔하였기 때문이다. 1925년 1월 20일 일소(日蘇) 기본 조약 체결 이후에야 시베리아 철도 이용을 기대할 수 있었다.44)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면 도쿄[東京]에서 런던까지 15.5일이 걸리고 1등 여비 520원에 식비 160원을 합하여 680원의 경비가 계산되었다. 일본 우편선을 이용한다면 52일이 걸리고 1등 여비 1,430원이었으니,45)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면 배편을 이용하였을 때보다 시간은 1/4, 여비는 1/2 이상을 줄일 수 있었다.

 

일본을 출발한 한기근 신부는 5월 21일 상하이, 5월 26일 홍콩, 5월 30일 사이공, 6월 3일 싱가폴, 6월 9일 콜롬보, 6월 17일 지부티에 도착하였다.46) 이어 6월 21일 수에즈 운하(Suez Canal)를 지나 6월 22일 포트사이드, 6월 27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하였다. 경성에서 출발한 지 46일, 고베에서 앙브와즈에 탑승한 지 40일이었는데 각 항구에서의 체류 날짜를 제외한 행선(行船) 일자는 36일이었다.47)

 

 

3. 시복식 참가와 로마의 성당 · 성지 방문

 

6월 28일 한기근 신부는 시복식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 마르세유 대표부에 와 있던 제라르(Gérard, Edmond, 1874~1951) 신부48)와 함께 로마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리고 6월 30일 파리 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를 만났다. 로마 대표부는 수개월 전부터 시복 대상 조선 치명자들의 상본을 대 · 소 수만 장 인쇄하여 무료 보급하는 등 매우 분주하였다.49)

 

한기근 신부는 로마 대표부에서 장면(張勉, 1899~1966)과 장발(張勃, 1901~2001)도 만났는데,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나폴리행 두이리오(Duilio)호에 탑승하여 6월 30일 로마에 도착하였다.50)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이 1925년이 확실하다는 가르니에 신부의 편지가 전해진 다음 달인 1924년 10월, 한국 천주교회는 시복식에 참가할 한국인 신자를 구하였다. 한국인 신자들 중에도 로마에 다녀올 만한 자산가는 여러 명 있다면서 신자들의 시복식 참가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시복식 참가 지원자는 없었다. 시복식에 참가하려면 부산에서 마르세유까지의 왕복 선가(船價) 900원, 로마 한 달 체류 식비 200여 원 등 1,200원이 필요했다.51) 거리가 멀고 많은 시간과 여비가 필요하기에 수백 명 · 수십 명은 갈 수 없을지라도 3개 교구(경성 · 대구 · 원산)에서 2명씩이나 1명씩은 갈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거의 10만 명 신자52) 중에 시복식 참가 희망자가 1명도 없음을 한국 천주교회는 한탄하였다.53) 그런데 1925년 경성 5인 가족의 1달 최저 생활비는 60원이었고,54) 1,200원은 경성 5인 가족 20달의 최저 생활비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더 이상 시복식 참가 지원자를 기다릴 수 없었던 한국 천주교회는 장면을 대표로 지명하였다. 한기근 신부 출발 전날인 1925년 5월 10일,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에서 장면을 시복식 참가 대표로 선거하였던 것이다.55) 장면은 1925년 6월 4일 뉴욕의 맨해튼대학(Manhattan College)을 졸업하고 귀국을 준비 중이었기에 외국어도 할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치명자들 시복식에 한국 신자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청을 받은 장면은 컬럼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 in the City of New York)에서 미술 공부 중이던 동생 장발과 함께 로마로 출발하였다.56)

 

7월 4일 한기근 신부는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기낭(Guinand, Pierre, 陳普安, 1872~1944) 신부 등과 함께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황 비오 11세(Pius XI, 1857~1939 : 1922~1939 재위)를 만났다. 그리고 강복을 요청하는 한국인 신부들의 연명 라틴어 편지57)를 전하고, 교황으로부터 ‘기념패’와 ‘성경 말씀 기록 쪽지’를 받았다. 교황은 “조선 성교회의 모든 거룩한 사업과 모든 신품과 모든 교우들에게 진심으로 강복”하였다.58)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 당일인 7월 5일 한기근 신부는 성 베드로 대성전59) 제의실에 도착하였고,60) 이어 뮈텔 주교 등과 함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0시부터 거행된 시복식에 기낭 신부, 장발과 함께 시복 대상 조선 치명자들의 가족 대표로 가족석에 앉았다. 장면은 ‘피곤함’으로 시복식에 참석하지 못했다.61) 기낭 신부는 당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교장이었는데 휴가를 위해 1925년 2월 16일 경성에서 출발했었다.62) 조선 치명자 79인을 복자로 반포하는 칙령이 반포되고,63) 5곳에 걸려 있는 조선 치명자 그림들의 휘장이 벗겨졌다.64)

 

만여 명이 참석한65) 시복식이 끝난 후 한기근 신부는 조선 치명자들을 그린 다섯 개의 큰 그림66)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67) 제단 양옆에는 김효임(金孝任, 골룸바, 1814~1839)과 동료 순교자 9위와 유대철(劉大喆, 베드로, 1826~1839)의 그림, 대성전 문루 위에는 앵베르 주교, 모방(Maubant, Pierre-Philibert, 羅伯多祿, 1803~1839) 신부와 샤스탕(Chastan, Jacques Honoré, 鄭牙各佰, 1803~1839) 신부 참수 장면 그림, 제대 위에는 ‘영광’이라는 제목의 ‘79위 치명자 성상’68) 그림이었다.69) 파리 외방전교회 로마 대표 가르멜 신부의 1925년 1월 5일 자 편지에 의하면, 화가가 조선 치명자들의 그림 윤곽을 잡았으며 곧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하였으니70) 그림 작업에 5개월여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조선 치명자들의 얼굴이나 옷을 모르는 화가가 그린 그림들이 아쉬웠다.71) 1925년 5월의 시성식부터 라디오와 확성기를 이용하였는데72)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 때도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시복식 날 오후, 한기근 신부는 교황이 참석한73) 가운데 거행된 성체 강복식에서 뮈텔 주교의 주교관(主敎冠) 복사를 하였는데 2만여 명이 참석하였다.74)

 

시복식이 끝난 후 뮈텔 주교는 시복식과 성체 거동 소식을 경성에 알렸고,75) 드망즈 주교도 “커다란 기쁨, 시복식 거행, 교황의 온정에 넘치는 호의”라는 전문을 경성으로 발송하였다.76) 한국 천주교회는 《경향잡지》에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 관련 기사와 사진들을 수록하였다. 〈새로 나신 복자를 향하는 축문〉(570호, 1925년 7월 31일)을 시작으로, 〈조선 복자 시복식에 민 주교께서 강복 거행〉, 〈앵베르, 모방, 샤스탕, 김대건 4명 얼굴 새긴 복자 동판〉(사진), 〈조선 치명자 시복식 반포와 고유서〉(이상 571호, 1925년 8월 15일), 〈종현 대성당 3일 기구 특별 반포〉, 〈시복일에 베드로 대성당 베드로 어좌 제대 위에 걸어 놓았던 79위 치명자 성상〉(사진), 〈강복 증서〉(이상 572호, 1925년 8월 31일), 〈조선 치명자 시복일 저녁 예절에 교황폐하께옵서 운좌를 타시고 베드로 대성당에 임하시는 광경〉(사진)(573호, 1925년 9월 15일) 등의 기사와 사진이었다.

 

특히 많은 사진을 수록한 것은 시복식에 대한 큰 관심이었고, 그로 인한 구독자 수 증대를 기대한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근대 문물로 조선에 수입된 사진은 1920년대에 다양한 시청각 매체를 통하여 확산되었다.77) 《경향잡지》도 〈외방전교회의 모든 주교〉(468호, 1921년 4월 30일)라는 제목의 사진 게재를 시작으로 1921년에 4장, 1922년에 3장, 1923년에 2장, 1924년 2장의 사진을 수록하였다. 그런데 시복식이 있었던 1925년에는 37장으로 크게 증가시켰고, 1926년에도 14장의 사진을 수록하였다. 사진이 주는 호소력과 효과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독자 수는 증가하지 않았고,78) 잡지 제작비 상승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사진 수록은 1927년 5장, 1928년 7장, 1929년 3장으로 감소하였다.

 

조선 치명자들 시복식은 장면과 장발의 귀국 환영회를 알리는 천주교회 밖 신문의 기사에서도 언급되었다. 시복식 50일 후인 1925년 8월 25일 자 《시대일보》에 “지난 7월 5일 이태리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에 참석한 후 돌아왔으며”라고 시복식이 언급되었다.79) 9월 30일 자 《동아일보》에는 치명자 시복 경축 기념식이 언급되었다.80) 《시대일보》 1926년 3월 4일 자에는,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신도대표 장면과 장발, 그리고 신부대표 한 씨가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개최된 조선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참가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었다.81) 병인년(丙寅年 : 1866) 순교자들이 시복되었다고 잘못 기록하였지만, 한기근 신부의 시복식 참가를 보도하였다.

 

7월 6일 한기근 신부는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장면과 장발 등 24명과 함께 교황청을 방문하여 교황을 만났다. 이때 한기근 신부가 가져온, 경성 천주교 청년회의 강복을 요구하는 ‘상소문’82)을 한국 천주교회 신자대표 장면이 교황에게 봉정하였다. 교황은 전교와 자선에 힘쓰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며 강복 증서83)를 주었다.84) 교황을 만난 후 한기근 신부 등 25명은 교황청을 나와 기념사진을 찍었다.85)

 

7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 동안 조선 치명자들 시복 감사 미사가 로마의 예수 성당에서 봉헌되었다. 한기근 신부는 7월 7일 뮈텔 주교가 집전한 미사에서 차부제(次副祭)86)를 맡았고, 7월 8일 드망즈 주교가 집전한 미사에서도 차부제를 담당하였다.87) 그리고 7월 9일 전교성 성장 판롯숨(Van Rossum) 추기경이 집전한 미사에 참석하였다. 7월 8일의 미사 강론은 드망즈 주교가 프랑스어로 하였기에 내용 파악에 문제가 없었다.88) 7일과 9일의 미사 강론은 예수회 신부들이 이탈리아어로 하였지만 라틴어89)와 프랑스어 단어들이 많이 섞여 있었고 한국에 관한 내용이었기에 한기근 신부는 내용 파악에 어려움이 없었다.90)

 

이후 한기근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를 향해 출발한 뮈텔 주교를91) 비롯하여 시복식에 참석하였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들 대부분이 떠났지만 파리 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에 남았다. 그리고 성 요왕 대성당,92) 성 마리아 대성전,93) 성 아릭수 성당,94) 성 요왕 라테라노 대성전, 성제(聖梯) 성당, 성 노렌조 성당, 천신들의 성모 성당, 성 요왕과 성 바오로 성당 등 로마의 많은 성당들을 방문하였는데 당시 로마에는 193개의 성전 · 성당이 있었다.95) 성 바오로 대성전은 그의 본명 주보성인의 성전이기에 찾아가 미사를 드리고자 하였으나 숙소인 파리 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에서 거리가 멀어 포기하였다. 자동차로 왕복하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대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성 바오로의 트리폰타나(세 샘)’ 성지를 방문하였다.96) 또한 기낭 신부와 함께 성 갈리스도 카타콤바(LE CATACOMBE DI SAN CALLISTO)97) 성지를 방문하여 성녀 세실리아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98) 에마르(Eymard, Peter Julian, 1811~1868) 신부의 시복식과 성체 강복에도 참가하였는데 조선 치명자들 시복식 때보다 참석자들이 많았다.99)

 

바티칸 박물관과 바티칸 도서관도 방문하였는데 도서관에서는 약 40년 전 로마의 한 성당 중수 때 기부한 한국 신자들의 성과 세례명이 기록된 자료도 볼 수 있었다.100) 원산교구의 선교를 맡고 있던 베네딕도회의 성 안셀모 신학교도 여러 번 방문하였는데 방학 중이라 학생들을 만나지는 못하였다.101) 전교 박람회도 돌아보았는데, 한국에서 보낸 물품들이 청국관 끝에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었고,102) 관람객도 순례자들도 손꼽을 정도였다.103)

 

오랜 항해와 시복식 참가 등으로 피곤이 겹쳐 3일 동안 아팠던104) 한기근 신부는 7월 24일 로마를 출발하였다.105) 파리를 향해 가는 도중에 있는 성지들을 방문하고자 먼저 아시시(Assisi)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 관련 사적지들을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가 기록된 《꽃송이》106)를 언급하였다.

 

 

4. 프랑스의 성모 발현지들과 성인들의 생가 방문

 

이탈리아 아시시를 출발하여 플로렌스를 거쳐 7월 29일 한기근 신부는 안남(安南)과 라오스(Laos)에서 선교하던 두 명의 신부와 함께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의 라 무르(La Mure)에 도착하였다. 이후 10월 9일까지 약 70일 동안 프랑스에 머무르면서 1925년에 시성 · 시복된 프랑스인 성인성녀 · 복자들의 생가 등 순례, 프랑스의 성모 발현지들 방문,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를 비롯하여 파리의 성당 등을 찾아보았다. 그는 “주의 발현, 성모의 발현, 유명한 성인성녀를 많이 주는” 것은 천주가 베푸는 은혜라고 역설하였다.107)

 

프랑스에서 한기근 신부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라 무르에 있는 복자 에마르의 생가였다. 한기근 신부는 방명록에 “텬쥬 강생 一九二五년 七월 二十九일에 조선 경성교구 바오로 한 신부는 조선인 모든 신품과 모든 잡지 독자와 및 십여만 명 조선인 교우들을 대표하여 복자 베드로 유리오 에마르의 탄생하시고 또한 거룩히 사시고 거룩히 돌아가신 이 집을 참배하였노라.”라고 한국어로 쓰고 서양어로 간략하게 번역하였다.108) 한기근 신부는 7월 12일 로마에서 거행된 에마르 신부의 시복식에 참가했었다.109)

 

에마르 복자에 이어 한기근 신부는 1925년 5월 17일에 시성된 소화 데레사(Thérèse, Marie Françoise, 1873~1897) 수녀와110) 5월 31일에 시성된 비안네(Vianney, Jean Baptiste Marie, 1786~1859) 신부111)의 사적지를 찾았다. 비안네 성인은 한기근 신부가 성직자였기에, 소화 데레사 성녀는 《경향잡지》에 연재할 만큼 한국 천주교회의 관심이 큰 성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로 가는 길에 있었던 아르스(Ars)의 성당을 방문한 한기근 신부는 비안네 신부가 사용했던 “헤어지고 검소한 수단, 쓰시던 갓, 다른 의복, 숟갈, 그릇” 등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오는 고해자들에게 매일 10~18시간 고해성사를 주었다는 사실에 특히 감동하였다.112) 자신이 신부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소화 데레사 성녀가 살았던 리지외(Lisieux)의 생가 · 수녀원 · 성당 · 묘소는 기낭 신부와 함께 방문하였다.113) 그리고 데레사 성녀가 공부했던 베네딕도 수녀원의 방명록에 국한문으로 기록하였는데, 기낭 신부는 한글로 방명록을 작성하였다.114) 소화 데레사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관심은 《경향잡지》에 약 6년 동안 성녀의 생애, 기도문, 편지 등을 수록할 정도였다.115) 관련 사진도 1925년에 14장, 1926년에 3장, 1927년에 1장 등 18장이나 수록하였다. 같은 기간 시복식 관련 사진은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하여 8장이었다.

 

1925년에 시성 · 시복된 3명의 프랑스 성인과 복자의 사적지를 찾았던 한기근 신부는 프랑스의 4대 성모 발현지116) 중 라 살레트(La salette), 루르드, 파리를 방문하였다. 《경향잡지》에 ‘라 살렛 지방에 성모 발현’, ‘성모가 라 살렛 산상에 발현하사 막시민과 멜라니아에게 훈계하시던 형상이라’, ‘성모 라 살렛 산에 발현하였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는 형상’이라는 제목으로 세 장의 사진이 수록되었는데117) 자동차로 가기에도 매우 어렵고 위태로운 이곳을 방문한118) 한기근 신부가 가져온 것들이라 생각된다. 한기근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파리의 성모 발현지 ‘성 원선시오 수녀원 성당’도 찾아가 한참 동안 기도하였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모시는 ‘성모 무염 원패’가 이곳에 발현한 성모상을 모본으로 만든 것이라 설명하였다.119)

 

루르드(Lourdes)의 성모 발현지 마사비엘 동굴(Grotte de Massabielle)도 방문한120) 한기근 신부는 《루르드 성모 역사》121)를 통해 믿음의 눈으로만 보았는데 직접 보니 즐겁고 감동적이라고 하였다.122) 루르드 성전 안에 한국 천주교회의 주교와 신부의 표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갔던 그는 대제대 오른쪽 제대들 중 한 제대 간에서 리델(Ridel, Félix Clair, 李福明, 1830~1884), 드게트(Deguette, Victor Marie, 崔鎭勝, 1848~1889), 블랑(Blanc, Marie Jean Gustave. 白圭三, 1844~1890) 등 세 성직자들이 기록한 옥석판을 찾았다. 1875년에 큰 풍파를 만난 세 성직자가 살아나면 루르드 성전에 옥석판을 바치겠다고 허원(許願)한 것을 실행한 것이었다. 석판 첫 줄에는 ‘성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라는 말을 라틴어로 “AVE MARIA GRATIA PLENA”라 기록하고, 두 번째 줄에는 한문으로 “아리마복이신(亞利瑪福爾申)”이라고 기록하고, 다음 줄부터는 성모께 허원하고 은혜받은 사정, 연도, 직책, 이름을 기록하였다. 석판의 3~11줄에 라틴어로 기록된 내용은 “죠션 반도 젼교들이 무염 동녀 마리아의 보호심으로 바다의 험악 위험 즁에셔 살아나셔 이러 은혜를 긔억고 감사 표로 이 옥셕판을 루드드 셩뎐에 두게 여 허원을 시엿더라. 一八七六년. 죠션 감목 비릭스 리쥬교, 전교사 베드루 신부, 전교사 요왕 신부”라고 《경향잡지》에 번역 수록되었다.123) 그리고 14~16줄에 리델, 드게트, 블랑 선교사의 이름, 석판의 오른쪽에는 “성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 왼쪽에는 “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124)

 

한기근 신부가 프랑스의 성모 발현지들을 찾은 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성모 신심과 관계가 있다. 창설 직후부터 한국 천주교회에는 성모 공경이 활발하였고, 1836년경에는 매괴회(玫瑰會)가 설립되었다.125) 1838년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성모 마리아’를 조선 교회의 주보로 정해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o XVI, 1765~1846 : 1831~1846 재위)가 성 요셉을 주보로 함께 모실 것을 조건으로 1841년에 ‘성모무염시잉모태(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승인하였다.126) 1887년 간행된 《한국 교회 지도서》에는 성모 성심회 · 매괴회가 교회의 공식적인 신심회로 승인되었다.127)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깊은 성모 신심이 한기근 신부의 성모 발현지 방문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한기근 신부는 시복식을 향해 출발하면서 더위가 극심하여 선객 중에 죽는 사람도 간혹 있다고 한다며 무사히 왕반(往返)할 수 있기를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였다.128) 항해 중 선객 1명이 사망한 후에는 자신의 건강에 이상 없음을 “주 성모께 감사”하였고,129) 긴 항해 후 마르세유에 도착해서는 “누만리 해로를 무사 발섭함은 주, 성모의 특은”이라고 하였다.130) 또한 무사 귀국하기를 마르세유 호위 성모 성당의 성모께 기도하였고,131) 귀국 후에는 무사히 왕반함을 “주 대전에 감사하며, 바다의 별이신 성모께 사례”하였다.132) 한기근 신부는 예수 성심이 발현한 빠레르 모니알(Paray le Monial) 성지에도 가고 싶었으나 여비 때문에 포기하였다.133)

 

8월 2일 파리에 도착한134) 한기근 신부는 9월 28일까지135)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겸 신학교의 3층136) 48번방에 머물렀다. 본부 겸 신학교는 한국을 포함하여 동양 선교지들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공부하고 선교의 꿈을 키운 곳이었다. 어떤 방에는 “이 방은 아무 치명복자가 거처하시던 방이라”고 새긴 대리석판이 벽에 붙어 있었는데 한국에서 순교한 주교와 신부가 사용했던 방에도 같은 문구의 대리석판이 있었다. 한국에서 순교한 주교와 신부들의 물건(충청도 공주 마곡사에서 찾은 성물과 안성 미리내 산에서 얻은 성작)도 볼 수 있었다.137) 한기근 신부가 본부 겸 신학교에 머무는 동안 두 번의 선교사 파견식이 거행되었다. 9월 14일 선교사 13명과 9월 21일 선교사 10명의 파견식에 모두 참석하였던 한기근 신부는 2시간여 동안 진행된 예식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였다.138)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도 같은 의식을 거쳤을 것이기에 감동스러웠다. 9월 21일 파견식의 주인공 10명 중 2명의 선교사가 한국으로 파견되었다.139)

 

파리에 머무는 동안 한기근 신부는 자신들의 성당이 없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겸 신학교의 성당을 빌려 드리는 아르메니아 예절 대미사에 여러 번 참석하였다.140) 그리고 파리의 많은 성당들을 방문하고 그 느낌을 전했다. 파리 성모 성당은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넓다고 하였으며, 파리 승전성모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도 조직되어 있는 성모 성심회 본부라고 언급하였다. 조선 복자들의 3일 기도가 거행되었던 성 방지거 사베리오 성당을 비롯하여 성 슐피스 성당, 성녀 막달레나 성당, 성 디니오시오 성당도 방문하였다. 예수성심 성당은 파리 시가 눈 아래에 펼쳐 있어 종현 성당에서 경성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큰 성당에는 각국 말 고해소가 있는데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 · 중국어 등 동양 말 고해소가 없는 것은 서양에 동양 교우가 많지 않은 증거라고 하였다.141)

 

한기근 신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기차로 여행하면서 도시는 물론 시골에도 가득한 성당들을 부러워하였다. 교우가 많고 열심이기 때문이라며 한국에도 각처에 성당이 가득하기를 소망하였다.142) 《조선농민》에 실린 〈세계 각국의 전원 인상기〉에도 “농촌에 있는 사람으로서 천주교 믿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래서 교회 뾰족집이 한 10리에 하나씩은 있다. 일요일이면 모두 교회로 모이는 것도 퍽도 부럽다.”고 하였다.143)

 

 

5. 팔레스티나 성지 순례

 

9월 28일 한기근 신부는 팔레스티나(Palestina) ‘성지 조배’를 위해144) 베쉘(Béchel, Emile) 신부145)와 함께 파리에서 마르세유행 기차에 탑승하였다.146)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 마르세유 대표부에서 팔레스티나행 배를 기다린 지 10일 만인147) 10월 9일 앙드레 레봉(Andre Lebon) 호에 승선하였다. 10월 15일 포트사이드에 도착하였고,148) 이어 하이파(Haifa)행 기차에 탑승하여 수에즈 운하를 건너고 간다라(Kantara East) 정거장에서 기차를 갈아탄 후 10월 16일 하이파에 도착하였다.149) 하이파의 갈멜(Carmel) 수도원150) 옆에 마련되어 있는 성지 참배자들을 위한 여관에서 하루를 지낸151) 한기근 신부는 10월 17일 팔레스티나의 나자렛(Nazareth)에 도착하였다.152) 이후 10월 26일까지 10일 동안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이탈리아 26일, 프랑스 70일과 비교하여 머문 기간은 짧았지만, 〈로마여행일기〉는 이탈리아 7회, 프랑스 11회보다 많은 14회 분량을 기록하였다. 팔레스티나에 대한 그의 감동이 컸고,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내용이 많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팔레스티나를 “예수의 기념적 자취가 있는 예루살렘과 그 근처”,153) “천주 진교의 발원지, 예수가 탄생하고 장성하고 많은 성적(聖蹟)을 행하고 전교하고 수난 때에는 성혈을 흘리고 죽고 묻힌 가장 거룩한 성지”154)라고 설명한 한국 천주교회는 《보감》과 《경향잡지》에 종종 팔레스티나 소식을 전하였다.155)

 

팔레스티나를 그리스도교 성지로 순례한 첫 한국인은 노정일(盧正一)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고 예루살렘을 성지 순례하여156) “구미 각국과 유대의 성지 등 근동 각지를 답파한 첫 한국인”이었다.157) 1921년 5월 9일에 귀국한158) 그는 5월 24일 평양 기독교 청년회 주최의 강연회에서 ‘성지 순례의 소감’이라는 제목으로,159) 5월 31일 중앙 기독교 청년회에서는 ‘성지 순례의 실감(實感)’이란 연제로 강연하였다.160) 《개벽》에는 〈예루살렘 성지의 순례여행〉을 포함하여 노정일의 기행문을 연재한다고 하였는데 기행문 연재가 3회로 중단되어161) 예루살렘 성지 순례 내용은 알 수 없다.

 

〈로마여행일기〉는 팔레스티나를 성지 순례한 한국인의 첫 기록이다. 한기근 신부가 팔레스티나를 성지 순례한 것은, 팔레스티나가 천주교의 발원지이고 예수가 탄생 및 성장하고 많은 성적(聖蹟)을 행하며 전교하고 죽고 묻힌, 가장 거룩한 성지이기 때문이었다.162) 천주교회는 팔레스티나 성지 주관 권리 되찾기를 희망하였고,163) 성지 참배를 장려하였다.164)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천주교 성직자였기에 또한 4복음서를 번역하였기에 팔레스티나는 한기근 신부에게 더욱 의미 있고 방문하고 싶은 장소였을 것이다. 한기근 신부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역본 복음서들의 한글 번역에 참여하였고,165) 뮈텔 주교와 함께 4복음서의 번역 원고를 교열하였다.166) 이 번역 원고는 1910년 12월 한국 천주교회의 첫 한글 4복음서《셩경》(四史聖經)으로 성서 활판소에서 간행되었다.167) 1922년에 성서 활판소에서 간행된 《종도행전》(宗徒行傳)도 한기근 신부 번역이었다.168) 따라서 그가 번역한 4복음서와 《종도행전》에 언급된 장소들을 순례한다는 것은 한기근 신부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마르세유로 항해 중 크레타(Creta)섬을 멀리 바라보면서도 《종도행전》과 바오로의 편지에 언급된 곳이라며 감격할169) 정도였다.

 

기대감과 더불어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1291년 십자군이 떠나고 1516년부터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다가 1917년부터 영국이 군부 · 위임 통치하고 있던170) 팔레스티나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많아 성지 순례에 위험이 많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171) 그의 불안감은 예루살렘을 성지 순례하고 온다며 포트 사이드 항구에서 승선한 신부들을 만난 후 해소되었다.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동편의 ‘레위니옹(Réunion)’섬과 ‘모리셔스(Mauritius)’섬에서 전교하던 두 신부는 예루살렘에 여러 수도회가 있고 성지 순례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다고 하였다.172) 한기근 신부가 도착하였을 때 팔레스티나는 위험하지 않았고,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중이었으며, 33개의 수도회 · 수녀회가 성당들을 건립하고 학교 · 병원 · 기숙사 · 고아원 등을 운영하고 있었다.173)

 

성모와 성 요셉의 고향, 예수가 강잉(降孕) · 장성 · 생활한 나자렛에서 성모영보성전(Basilica of the Annunciation), 유년예수성전(Basilica of Jesus the Adolescent), 성모전율경당(Church of Our Lady of the Fright), 그리스도의 식상(食床) 등을 찾아본 후 한기근 신부는 카사노바(Casa Nova)에서 머물렀다.

 

카사노바는 교황이 팔레스티나 성지 순례를 장려하기 위해 각 성지에 여관을 마련하게 하고 무료로 유숙하게 한 여관이었다. 예루살렘에는 8일, 나자렛에는 3일, 베들레헴, 가파르나움, 그 외 각 성지에는 1일씩 무료 유숙할 수 있었는데 모두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한기근 신부는 프란치스코회가 팔레스티나 성지를 지키면서 순교한 이들도 있어 공이 많다고 설명하였다.174) 김상원 신부에 의하면, 팔레스티나 성지의 순례자 숙소는 성지 순례가 권장되던 비잔틴 시기부터 운영되었는데 대부분 수도원 내의 손님방(guesthouse)이었다. 1217년부터 팔레스티나 성지를 관리하였던 프란치스코회는 1291년 십자군이 떠난 후에도 성지를 지키려고 남았다. 그리고 오스만 터키가 쇠퇴하면서 성지 순례자가 증가하자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자국의 수도원을 건립하였고, 프란치스코회도 순례자를 위한 새로운 숙소를 마련하고 ‘Casa Nova’(새 집)라고 불렀다. 이후 ‘카사노바’는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순례자 숙소를 의미하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175)

 

10월 18일 나자렛을 출발한 한기근 신부는 갈릴레아 가나(Cana in Galilee) 촌176)을 방문하고 티베리아(Tiberias)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여러 번 강론하고 많은 영적(靈蹟)을 행한 제네사렛 호수에서 막달라 · 벳사이다 등 복음서에 기록된 마을들을 찾았는데 가파르나움(Capernaum) 외에는 흔적도 없었다.177) 티베리아 카사노바에서 하루를 묵은 한기근 신부는 10월 19일 예루살렘에 도착하여178) 예루살렘 카사노바179)의 27호 방을 배정받았다.180)

 

십자군 때까지는 천주교에서 팔레스티나에 성전들을 건축하고 소유하였는데,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떠나고 이슬람교도들이 팔레스티나를 소유하면서 예수성묘(무덤)성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성전을 헐어 버렸다.181) 한기근 신부는 예루살렘의 예수성묘(무덤)성전(Basilica of the Holy Sepulcher)을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성전이라고 하였다. 이 성전도 천주교회가 건축하여 천주교회 소유였는데 한기근 신부가 방문하였을 때는 천주교회와 동방 정교회들(그리스정교회 · 아르메니아정교회 · 곱트정교회), 그리고 이슬람교회가 공동 소유하고 있었다.182) 그래서 예수의 성묘(무덤), 예수가 십자가상에 못 박히시던 자리, 예수가 탄생하신 자리는 누구든지 참배하고 구경할 수 있었지만 미사나 예절은 소유권을 가진 교파에서만 할 수 있었다.183)

 

4세기부터 교의 신학과 전례에서 의견이 달랐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정치 · 경제 · 사회적으로도 분쟁이 컸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1054년부터 본격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고, 예수성묘(무덤)성전 내의 소유권과 관할권은 1757년 대강 마련되었고, 1852년에 법률상으로 확정되었다.184) 그리하여 여러 교파가 소유권을 갖고 있었던 예수성묘성전에는 이슬람교 순사들이 성전 정문간 안에 밤낮 유숙하며 출입을 통제하고, 교파들 간에 일어나는 시비를 판결하였다.185) 또한 예수가 수난 전에 ‘건립 성체 하시던 집’은 이슬람교인 소유가 되어 천주교 신자가 참배하려면 입장료를 내고 신을 벗고서야 들어가 참배할 수 있었다.186) 예루살렘의 ‘고교 성전’(대성전) 터에는 십자군 때 성모자헌성전이 건축되었는데 그 후 이슬람교인들이 모스크 오말(Mosque Omar)로 바꾸어 놓아 입장료와 덧신세 등을 주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187) 예수의 발자취가 박힌 돌이 있는 곳에도 들어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했고,188) 성지 주일 날 예수가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던 금문(金門, porta aurea)은 이슬람교인 소유가 되어 들어갈 수 없었고,189)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자리도 그리스정교회 소유였기에 미사나 예절은 못하고 참배만 하였다.190) 나자렛 성지만 천주교회가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191)

 

한기근 신부는 예수성묘(무덤)성전 외에도 성모선종성전, 엑세호모성전, 구세주성전, 오주예수의임종성전 등 예루살렘의 중요한 성당은 거의 참배하며 기도하였고, 갈릴래아 사람들아 교당(Viri Galilaei)과 내가 천지를 조성하신 경당도 방문하였다.192)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세웠던 갈바리아 산,193)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고 우시던 자리194)를 찾았고, 각국 언어 ‘천주경’ 판들이 있는 ‘하늘에 계신 문원(門院)’도 방문하였는데 동양 언어 중에서는 한문 천주경이 있을 뿐이었다.195) 요한복음 5장 1~16절이 각국 언어로 붙어 있는 희랍 교회 신학원의 면양못(Pool of Bethesda) 옆집 벽 위에서는 한국어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인이 철필로 쓴 것을 가져다 샤르즈뵈프(Chargeboeuf, Etienne, 1890~1920) 신부가 붙여 놓은 것이었다.196) 또한 예수가 건립 성체하고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실 때 건넜던 세드론 시내(Valley of Kidron), 예수가 나자로를 부활시킨 베타니아(Bethany), 예수가 성지 주일 날에 왔던 베파제(Bethphage),197) 그리고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굴 · 성부 안나 성전198)을 참배한 한기근 신부는 10월 26일 팔레스티나 성지 순례를 마무리하고 포트사이드로 출발하였다.199)

 

팔레스티나의 중요한 성지는 모두 참배하였다지만, 시간과 여비 때문에 다볼(Tabor) 산은 바라만 보고 그 산 밑으로 지나갔고, 산 중에 있는 성 요한 세자의 집터도 참배하지 못하였고, 요르단강과 여리고도 멀리서 바라보았다.200) 팔레스티나로 가기 위해 파리에서 떠날 때 고베 행 배표를 구입하였던 한기근 신부는, 당시 동양으로 가는 배가 2주일마다 있었으므로 시간과 여비가 충분했다면 팔레스티나에 더 머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가 있고 할 수가 있다면 팔레스티나 성지를 다시 여행하고 그 여행 일기도 쓰고 싶다며 아쉬움과 함께 〈로마여행일기〉를 마무리하였다.201)

 

 

6. 맺음말

 

〈로마여행일기〉는 프랑스의 파리 · 라 무르 · 리지외 · 라 살레트 · 루르드 · 아르스, 이탈리아의 로마 · 아시시 · 플로렌스, 그리고 팔레스티나의 성지 · 성전들을 순례한 기록이다. 4복음서와 《종도행전》을 번역할 정도로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어려움이 없었던 한기근 신부는 조선 치명자들의 시복식에 한국인 성직자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첫 여정으로 로마에 도착하여 조선 치명자들 시복식에 참가하였고, 시복식 후 감사 미사에 참가하였으며, 이어 로마의 많은 성당들을 참배하였고 카타콤바를 방문하였다. 두 번째 여정은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비안네 신부, 소화 데레사 수녀, 에마르 신부의 생가 등을 순례하였는데, 조선 치명자들이 시복된 1925년에 시성 · 시복된 이들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겸 신학교도 복자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동양 선교를 목적으로 창설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 순교한 이들이 선교를 준비하며 생활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라 살레트 · 루르드 · 파리 등 성모 발현지들을 방문한 것은 한기근 신부의 성모 신심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의 깊은 성모 신심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많은 성당들을 참배하면서, 도시는 물론 시골에도 가득한 성당들을 바라보면서, 비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천주교 성직자 한기근 신부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이어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10일 동안 여행하였던 팔레스티나는 한기근 신부에게 최고의 성지 순례지였다. 4복음서와 《종도행전》에 언급된 장소들을 직접 찾아가 본다는 것은 감동과 감격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 베들레헴 · 나자렛에서 예수와 성모와 사도들의 자취를 확인하고 기도하였으며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가 방문하였을 때 팔레스티나의 많은 성지들은 여러 교파가 공동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참배는 할 수 있지만 미사나 예절은 할 수 없는 곳이 있었고, 입장료를 내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모스크로 바뀌어 있는 성지도 있었기에 안타까웠다. 이탈리아 ·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티나에서도 시간과 비용 때문에 가지 못한 곳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한기근 신부는 천주교회의 중요한 성지들을 참배하고 〈로마여행일기〉로 기록하였다. 〈로마여행일기〉는 비 그리스도교 문화권인 한국의 천주교회 성직자가 기록한 첫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기이다.

 


참고문헌

 

한기근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황주본당에서 보낸 편지들 :

한기근 신부→뮈텔 주교, 1906년 9월 21일, 적은동 / 한기근 신부→뮈텔 주교, 1907년 2월 12일, 적은동 / 한기근 신부→뮈텔 주교, 1907년 8월 7일, 적은동 / 한기근 신부→뮈텔 주교, 1907년 9월 21일, 적은동 / 한기근 신부→뮈텔 주교, 1910년 2월 11일, 적은동 / 한기근 신부→뮈텔 주교, 1910년 12월 21일, 적은동 / 한기근 신부→뮈텔 주교, 1911년 8월 1일, 적은동

한기근 신부가 드브레 주교에게 보낸 편지들 :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5월 18일, 고베(오전 9시)(《교회와 역사》 449호, 2012년 10월, 41~42쪽) /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8쪽)

 

1. 자료

 

《가톨릭신문》, 《개벽》, 《경향잡지》, 《교회와 역사》, 《동아일보》, 《드망즈주교일기》, 《매일신보》, 《뮈텔주교일기》, 《부산일보》, 《시대일보》, 《신한민보》, 《朝鮮新聞》, 《조선총독부관보》, 《중외일보》, 《한겨레》, 《황성신문》,

 

2. 단행본

 

김정환, 《뮈텔일기 연구》, 내포교회사연구소, 2015.

미조 리베 지음, 《착한 목자 조셉 뷜토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7.

민영환 지음, 조재곤 편역, 《해천추범》, 책과 함께, 2007.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하, 분도출판사, 

1980.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주교일기》 7(1921~1925),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허동현, 《건국 · 외교 · 민주의 선구 장면》, 분도출판사, 1999.

 

3. 연구논문

 

구사회, 〈대한제국기 주불공사 김만수의 세계기행과 사행록〉, 《동아인문학》 29, 동아인문학회, 2014.

———, 〈근대전환기 조선인의 세계 기행과 문명담론〉, 《국어문학》 61, 국어문학회, 2016.

김나원, 〈한국 근대 초기 기독교 삽화 연구〉, 홍익대 석사학위논문, 2013.

김도형, 〈한국 근대 旅行券(旅券)제도의 성립과 추이〉, 《한국근현대사연구》 77, 한국근현대사학회, 2016.

김정숙, 〈로마의 시복식과 서울의 시복식〉, 《빛》 376호, 2014년 8월, 대구대교구(http://www.lightzine.co.kr/last.html?y=2014).

김정환 · 유단비, 〈식민지 조선에서 사진의 대중화 과정에 관한 연구−1920~30년대 신문 담론을 중심으로−〉, 《인문콘텐츠》 35, 인문콘텐츠학회, 2014.

김창원, 〈근대 개성의 지리적 배치와 개성상인의 탄생〉, 《국제어문》 64, 국제어문학회, 2015.

윤선자,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와 만국전교박람회〉, 《교회사학》 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

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2010(2판), 2017(2판 4쇄).

조현범, 〈제4장 순교복자의 탄생과 교회의 변화〉,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차혜영, 〈3post시기 식민지 조선인의 유럽 항로 여행기와 피식민지 아시아 연대론〉, 《서강인문논총》 47,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천주공교회 신부 韓基根, 〈세계각국의 田園印象記−恐獨病에 마음 못놋는 佛蘭西의 전원〉, 《조선농민》 제3권 제8호, 1927년 8월 10일.

홍미정,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와 시온주의 프로젝트〉, 《한국이슬람학회논총》 25-2, 한국이슬람학회, 2015.

 

……………………………………………………………

 

1) 1910년 9월 30일 발표된 일제의 ‘조선총독부지방관제’에서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쳐, 일제강점기에는 이 이름이 사용되었고, 1945년 광복과 함께 경성부는 서울시로 개칭되었다.

 

2) 《경향잡지》 565호, 1925년 5월 15일, 〈한 신부, 로마를 향하여 떠나면서〉, 198쪽 ; 566호, 1925년 5월 31일, 〈로마여행일기〉 (1), 225쪽.

 

3) 《경향잡지》 579호, 1925년 12월 15일, 〈회보 : 한 신부 귀국〉, 540쪽 ; 615호, 1927년 6월 5일, 〈로마여행일기〉 (39), 255쪽. 〈로마여행일기〉에는 ( ) 안에 호 수가 없는데 본고는 이해 증진을 위해 각주에 호 수를 첨부하였다.

 

4) 차혜영, 〈3post시기 식민지 조선인의 유럽 항로 여행기와 피식민지 아시아 연대론〉, 《서강인문논총》 47,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27쪽.

 

5) 《동아일보》 1921년 12월 15일(1) · 12월 16일(2) · 12월 17일(3) · 12월 18일(4) · 1922년 1월 30일(1) · 1월 31일(2) · 2월 1일(3) · 2월 2일(4) · 2월 3일(5) · 2월 4일(6) · 2월 5일(7) 자에 연재되었다.

 

6) 《개벽》 1922년 3월~5월.

 

7) 《동아일보》 1926년 7월 17일(1) · 20일(2) · 26일(3) · 27일(4) · 31일(5), 8월 2일(6) · 3일(7) · 7일(8) · 9일(9).

 

8) 575호(1925.10.15.)~580호(1925.12.15.), 584호(1925.2.28.), 586호(1926.3.31.), 587호(1926.4.15.), 597호(1926.9.15.), 604호(1926.12.31.)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일본 4회(566 · 567 · 568 · 569호), 항해 약 4회(570 · 571 · 572 · 173호), 이탈리아 7회(573 · 574 · 581 · 582 · 583 · 585 · 588호), 프랑스 11회(588 · 589 · 590 · 591 · 592 · 593 · 594 · 595 · 596 · 598 · 599호), 팔레스티나 14회(600 · 601 · 602 · 603 · 605 · 606 · 607 · 608 · 609 · 610 · 611 · 612 · 613 · 614호), 귀국항로 1회(615호) 분량이다.

 

9) 《경향잡지》 581호, 1926년 1월 15일, 〈잘 다녀왔습니다〉, 3쪽.

 

10) 근대주의의 도전에 직면한 천주교회가 모든 성직자들에게 요구한 것. 이에 대해서는 윤선자, 〈한말 ·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와 근본주의〉, 《한국종교연구》 10,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2008, 1~6쪽 참조.

 

11) 《경향잡지》 566호, 1925년 5월 31일, 〈회보 : 한 신부 발정시의 감상〉, 230쪽.

 

12)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이렇게 표기하였으므로(《경향잡지》 565호, 1925년 5월 15일, 〈논설 : 로마를 향하여 떠나면서〉, 198 · 202쪽 ; 566호, 1925년 5월 31일, 〈회보 : 한 신부 발정 시의 감상〉, 230쪽 ;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1 · 398쪽 등) 본고는 이에 따르고자 한다.

 

13) 1924년 12월 24일 성년은 시작되었다(《경향잡지》 559호, 1925년 2월 15일, 〈회보 : 로마에 성년 시작〉, 67쪽).

 

14) 《경향잡지》 565호, 1925년 5월 15일, 〈논설 : 로마를 향하여 떠나면서〉, 198쪽.

 

15)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 포함.

 

1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주교일기》 7(1921~1925),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89쪽의 각주 139.

 

17) 《뮈텔주교일기》 1924년 9월 29일.

 

18) 《경향잡지》 552호, 1924년 10월 31일, 〈논설 : 명년에 거행될 복자 반포의 희소식〉, 457쪽.

 

19) 《뮈텔주교일기》 1925년 3월 17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3월 17일 ; 《경향잡지》 562호, 1925년 3월 31일, 〈논설 : 양위 주교 로마 행차〉, 121~122쪽.

 

20)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2월 11일.

 

21) 《朝鮮新聞》 1925년 3월 17일 자, 〈虐殺史を繙き尊く悲しき殉敎者の血, 今度表彰される鮮人 基督敎信者〉.

 

22) 《매일신보》 1925년 3월 10일 자, 〈暴政下에 희생된 순교자의 遺骨, 일분은 천주교당에 두고 일분은 로마 왕궁에 보내〉.

 

23) 《동아일보》 1925년 3월 19일 자, 〈天主敎 殉敎者 表彰式, 오는 륙월 로마에서 열리는, 조선서도 네 명이 참가할 터〉.

 

24) 이에 대해서는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의 제4장 ‘1920년대 일제의 기독교 회유정책과 천주교회의 조응’ 참조.

 

25)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0월 15일 자, 〈외국 여권 규칙〉.

 

26) 김도형, 〈한국 근대 旅行券(旅券)제도의 성립과 추이〉, 《한국근현대사연구》 77, 한국근현대사학회, 2016, 45쪽.

 

27) 《경향잡지》 548호, 1924년 8월 31일, 〈조선 성교회의 현상〉, 380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부록)》, 〈9 · 3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통계(1789~1983)〉, 324쪽 ; 《뮈텔주교일기》 1924년 6월 15일.

 

28) 《뮈텔주교일기》 1913년 5월 11일.

 

29) 《경향잡지》 562호, 1925년 3월 31일, 〈논설 : 양위 주교 로마 행차〉, 124쪽.

 

30) 《뮈텔주교일기》 1925년 4월 30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5월 3일.

 

31) 《경향잡지》 565호, 1925년 5월 15일, 〈논설 : 로마를 향하여 떠나면서〉, 198쪽.

 

32) 《경향잡지》 565호, 1925년 5월 15일, 〈별보 : 기쁜 소식〉, 193쪽. 

 

33) 1884년 7월 10일 페낭(Penang) 신학교에 도착하였다가 건강 때문에 그해 12월 10일 페낭을 출국한(김정환, 《뮈텔 일기 연구》, 내포교회사연구소, 2015, 179~180쪽 ‘<표 22> 페낭 신학교 신학생 현황’ 참조) 이후 40여 년 만에 해외로 내딛는 발걸음이었다.

 

34)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5월 18일, 고베(《교회와 역사》 449호, 2012년 10월, 41~42쪽 ; 《경향잡지》 1925년 5월 31일, 〈로마여행일기〉 (1), 225~230쪽 ; 566호, 1925년 5월 31일, 〈회보 : 한 신부 발정시의 감상〉, 230쪽 ; 568호, 1925년 6월 30일, 〈로마여행일기〉 (3), 271~272쪽 ; 569호, 1925년 7월 15일, 〈로마여행일기〉 (4), 303쪽.

 

35)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5월 22일, 상하이(《교회와 역사》 450호, 2012년 11월, 41~42쪽) ; 《경향잡지》 570호, 1925년 7월 31일, 〈로마여행일기〉 (5), 326쪽.

 

36) 민영환 지음, 조재곤 편역, 《해천추범》, 책과 함께, 2007, 27쪽 · 34쪽 · 51쪽 · 62쪽 · 160쪽 · 206쪽.

 

37) 구사회, 〈대한제국기 주불공사 김만수의 세계 기행과 사행록〉, 《동아인문학》 29, 동아인문학회, 2014, 82~83쪽 ; 구사회, 〈근대 전환기 조선인의 세계기행과 문명 담론〉, 《국어문학》 61, 국어문학회, 2016, 87쪽.

 

38) 《뮈텔주교일기》 1908년 10월 24일~11월 15일.

 

39) 김정환, 《뮈텔일기 연구》, 내포교회사연구소, 2015, 164쪽.

 

40) 《신한민보》 1911년 11월 27일 자, 〈압록강 철교 준공〉.

 

41) 김창원, 〈근대 개성의 지리적 배치와 개성상인의 탄생〉, 《국제어문》 64, 국제어문학회, 2015, 40쪽.

 

42) 김정환, 《뮈텔일기 연구》, 167쪽.

 

43) 압록강 철교가 개통된 지 한 달여 만인 1911년 12월 11일부터 이듬해 해방기까지 압록강 철교를 폐쇄하였다.(《매일신보》 1911년 12월 10일 자, 〈압록강 철교 폐쇄〉) 이후에도 상황은 같았으니 1922년에도 압록강이 결빙되어 11월부터 개폐를 중지하였다가 이듬해 4월 1일부터 재개하였다(《매일신보》 1923년 3월 31일 자, 〈압록강 철교의 개폐 개시〉).

 

44) 《동아일보》 1925년 1월 10일, 〈西伯利亞鐵道 復舊 準備 完了〉 ; 《동아일보》 1925년 1월 23일, 〈歐亞철도 연락〉.

 

45) 《부산일보》 1925년 5월 17일, 〈시베리아철도에 대하여〉.

 

46) 《경향잡지》 570호, 1925년 7월 31일, 〈로마여행일기〉 (5) ; 571호, 1925년 8월 15일, 〈로마여행일기〉 (6) ; 572호, 1925년 8월 28일, 〈로마여행일기〉 (7).

 

47)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87~397쪽.

 

48) 봉천교구에서 선교하였고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있었는데 마르세유에 와 있었다. 만주에 있을 때 두 번 경성을 방문하였기에 한기근 신부와 안면이 있었다(《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7쪽).

 

49)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8쪽.

 

50)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8쪽) ; 장면, 〈친필연보〉, 30쪽 ; 허동현 지음, 《건국 · 외교 · 민주의 선구 장면》, 분도출판사, 1999, 47 · 52~53쪽.

 

51) 《경향잡지》 552호, 1924년 10월 31일, 〈논설 : 조선 치명자들이 복자로 반포되는 예절에 참예하러 갈 조선교우는 1인도 없을까〉, 462~463쪽.

 

52) 1924년 5월 1일 현재 99,123명(《경향잡지》 548호, 1924년 8월 31일, 〈조선 성교회의 현상〉, 380쪽).

 

53) 《경향잡지》 562호, 1925년 3월 31일, 〈논설 : 양위 주교의 로마행차〉, 124~125쪽.

 

54) 《동아일보》 1925년 9월 4일, 〈물가와 노임의 반대 추세에 鑑하여〉.

 

55) 《경향잡지》 566호, 1925년 5월 31일, 〈회보 : 장면 씨로 대표자 선거〉, 231~232쪽.

 

56) 장면, 〈친필연보〉, 30쪽 : 허동현 지음, 《건국 · 외교 · 민주의 선구 장면》, 47 · 52~53쪽.

 

57) 《경향잡지》 566호, 1925년 5월 31일, 〈회보 : 교황폐하께 강복을 구함〉, 231쪽.

 

58)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4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7월 4일 ; 한기근→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8쪽) ;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402쪽.

 

59) 본고에서 언급하는 성당 · 성지에 대한 표기가 여러 가지인데 본고는 〈로마여행일기〉에 기록된 대로 표기한다.

 

60)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5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7월 5일.

 

61)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8~399쪽.

 

62) 《뮈텔주교일기》 1925년 2월 16일 ; 《경향잡지》 560호, 1925년 2월 28일, 〈회보 : 진신부주법국 여행〉, 82쪽. 1926년 9월 12일 용산신학교로 돌아왔다(《경향잡지》 598호, 1926년 9월

30일, 〈회보 : 진신부 환귀〉, 424쪽).

 

63) 《경향잡지》 571호, 1925년 8월 15일, 〈별보 : 조선 치명 복자 시복식 반포와 고유서〉, 362~368쪽.

 

64)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8쪽.

 

65)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9쪽.

 

66) 한기근 신부는 ‘상본’이라 하였는데(《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8쪽), 초상화를 그린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림’이라고 칭하겠다.

 

67) 한기근→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8쪽) 장면은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다(《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5일 ; 김정숙, 〈로마의 시복식과 서울의 시복식〉, 《빛》 376호, 2014년 8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 http://www.lightzine.co.kr/ last.html?y=2014).

 

68) 이 그림은 《경향잡지》 572호, 1925년 8월 30일, 385쪽에 ‘시복일에 베드로 성당 성 베드로 어좌 제대 위에 걸어놓았던 79위 치명자 성상’이라는 제목으로 수록.

 

69) 조현범, 〈제4장 순교복자의 탄생과 교회의 변화〉,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286~287쪽.

 

70) 《타벨라》 1925년 2월 9일 : 《교회와 역사》 453호, 2013년 2월, 12쪽. 

 

71) 한기근→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9쪽) ; 김정숙, 〈로마의 시복식과 서울의 시복식〉, 《빛》 376호, 2014년 8월, 천주교 대구대교구(http://www.lightzine.co.kr/last.html?y=2014).

 

72) 《경향잡지》 570호, 1925년 7월, 〈회보 : 시성식과 라디오〉.

 

73) 교황 참석 사진이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9쪽에 ‘조선 치명자 시복일 저녁 예절에 교황 폐하께옵서 운좌를 타시고 베드로 대성당에 임하시는 광경’이라는 제목으로 게재.

 

74)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5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7월 5일 ; 한기근→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7쪽) ; 《경향잡지》 571호, 1925년 8월 15일, 〈회보 : 조선 복자 시복식에 민 주교께서 강복 거행〉, 353쪽 ;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9~400쪽.

 

75)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5일.

 

76)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7월 5일.

 

77) 김정환 · 유단비, 〈식민지 조선에서 사진의 대중화 과정에 관한 연구 - 1920~30년대 신문담론을 중심으로 - 〉, 《인문콘텐츠》 35, 인문콘텐츠학회, 2014, 124 · 132쪽.

 

78) 1925년 말 현재 《경향잡지》의 구독자는 수백 명을 증가시켜야 6,000명이 된다고 하였다(《경향잡지》 581호, 1926년 1월 15일, 〈잘 다녀왔습니다〉, 5쪽).

 

79) 《시대일보》 1925년 8월 25일 자, 〈張氏 兄弟 錦衣 歡迎, 미국 뉴욕서 대학을 마치고〉.

 

80) 《동아일보》 1925년 9월 30일 자, 〈치명자 시복식〉.

 

81) 《시대일보》 1926년 3월 4일 자, 〈前丙寅 天主敎徒의 虐殺과 羅馬의 《謚福式》 - 대교주의 영예로운 신분으로 조선서 참렬한 민 교주는 귀임, 虐殺 事實 調査 蒐輯 中〉.

 

82) 상소문의 내용은 《경향잡지》 566호, 1925년 5월 31일, 〈회보 : 상소문〉, 231쪽에 실려 있다.

 

83) 《경향잡지》 572호, 1925년 8월 30일, 〈강복증서〉, 386쪽 ; 574호, 1925년 9월 30일, 〈회보 : 교황강복증서 수여식〉, 425쪽.

 

84)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6일 ;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8쪽 ;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402~403쪽.

 

85) 《경향잡지》 573호, 1925년 8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403쪽. 기념사진은 조현범, 〈제4장 순교복자의 탄생과 교회의 변화〉,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290쪽에 수록되어 있다.

 

86) 사제품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로 부제품 전에 받는 대품(大品 :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 중 하나로 1972년까지 존재.

 

87)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7 · 8일.

 

88) 뮈텔 주교가 감준하여 1910년 6월 성서 활판소에서 간행된 그림 교리서 《요리강령》은 프랑스 파리 본느 출판사(Bonne Press)에서 출판한 프랑스어 책을 한기근 신부가 번역한 것이다(김나원, 〈한국 근대 초기 기독교 삽화 연구〉, 홍익대 석사학위논문, 2013, 41쪽).

 

89)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역본 복음서를 번역하였다. 각주 167 참조.

 

90)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9일 ; 한기근→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7쪽).

 

91) 《뮈텔주교일기》 1925년 7월 10일.

 

92) 《경향잡지》 582호, 1926년 1월 31일, 〈로마여행일기〉 (12), 38쪽에 사진 ‘로마부에 성 요왕 대성당’ 수록.

 

93) 《경향잡지》 583호, 1926년 2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2), 62쪽에 사진 ‘로마부에 성 마리아 대성당’ 수록.

 

94) 《경향잡지》 583호, 1926년 2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2), 60~61쪽.

 

95) 《경향잡지》 574호, 1925년 9월 30일, 〈로마여행일기〉 (9), 419쪽.

 

96) 《경향잡지》 581호, 1926년 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0), 19쪽.

 

97) 2010년까지 확인된 로마의 카타콤바는 51개인데, 갈리스도 카타콤바에 2011년 8월 살레시오회의 한국인 신부가 상주(《경향신문》 2011년 12월 1일 자, 〈천국, 영원한 삶 소개에 보람〉 ; 《한겨레》 2011년 12월 7일 자, 〈참수 순간에도 신앙 고백한 ‘동굴 속 성녀’〉).

 

98)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8쪽) ; 《경향잡지》 583호, 1926년 2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2), 61~63쪽.

 

99)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8쪽).

 

100) 《경향잡지》 581호, 1926년 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0), 18쪽.

 

101) 《경향잡지》 582호, 1926년 1월 31일, 〈로마여행일기〉 (11), 39쪽.

 

102)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한 신부, 〈로마여행일기〉, 403쪽 ; 윤선자,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와 만국전교박람회〉, 《교회사학》 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 참조.

 

103) 한기근→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13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38쪽).

 

104)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7월 21일, 로마(《교회와 역사》 451호, 2012년 12월, 40쪽).

 

105) 《경향잡지》 585호, 1926년 3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3), 107쪽.

 

106) 류 류시아노 프란치스코, 《성 방지거 오상의 꽃송이》, 1892년(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07) 《경향잡지》 589호, 1926년 5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5), 200쪽.

 

108) 《경향잡지》 588호, 1926년 4월 30일, 〈로마여행일기〉 (14), 180~182쪽.

 

109) 각주 98 참조.

 

110) 《경향잡지》 566호, 1925년 5월 31일, 〈예수의 소화〉, 238쪽.

 

111) 《경향잡지》 571호, 1925년 8월 15일, 〈회보 : 성요안 세자, 마리 비안네〉, 354쪽.

 

112) 《경향잡지》 590호, 1926년 5월 31일, 〈로마여행일기〉 (16), 221~223쪽.

 

113) 《경향잡지》 598호, 1926년 9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3), 422~423쪽.

 

114) 《경향잡지》 599호, 1926년 10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4), 439쪽.

 

115) 〈로마여행일기〉의 연재가 시작된 566호(1925년 5월 31일)부터 641호(1928년 7월 15일)까지 ‘예수의 소화’라는 제목으로 소화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을 번역하여 게재하고, 이어 641호~660호(1929년 4월 30일)까지 ‘예수의 소화, 교훈과 감상’, 661호(1929년 5월 15일)에 ‘예수의 소화, 성녀 데레사의 만든 기구문’, 663호(1929년 6월 15일)부터 696호(1930년 10월 31일)까지 ‘예수의 소화, 서간(초록)’, 697호(1930년 11월 15일)부터 704호(1931년 2월 28일)까지 ‘예수의 소화, 그 별세 후’라는 제목으로 5년 9개월 동안 수록.

 

116) 1830년 11월 27일 파리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한기근 신부는 ‘원선시오 수녀원’이라 표기) 성당, 1846년 9월 16일 라 살레트, 1858년 2월 11일 루르드, 1871년 1월 17일 퐁멩(pontmain)(《가톨릭신문》 2011년 8월 14일, 〈성모 발현과 그 메시지들〉).

 

117) 《경향잡지》 589호, 1926년 5월 15일, 202쪽 ; 590호, 1926년 5월 31일, 223쪽 ; 591호, 1926년 6월 15일, 252쪽.

 

118)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8월 10일, 파리(《교회와 역사》 452호, 2013년 1월, 37쪽) ; 《경향잡지》 589호, 1926년 5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5), 201~206쪽.

 

119) 《경향잡지》 593호, 1926년 7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9), 298쪽.

 

120) 《뮈텔주교일기》 1925년 8월 15일 ;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8월 24일, 파리(《교회와 역사》 452호, 2013년 1월, 38쪽).

 

121) 김한수, 《루르드 성모 역사》, 명치천주당, 1923. 542쪽 분량이고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22) 《경향잡지》 596호, 1926년 8월 31일, 〈로마여행일기〉 (22), 372쪽.

 

123) 《경향잡지》 595호, 1926년 8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1), 346쪽.

 

124) 세 번째 줄부터 11번째 줄에 “COREANE PEMINSVLE MISSIONARII / DE ANGVSTIIS / ET PERICVLIS IN MARI GRAVISSIMIS / IMMACVLATAE MARIAE VIRGINIS / AVXILO EREPTI / TANTI BENEFICII MEMORES / IN BASILICA LAPVRDENSI / EX VOTO / LAPIDEM HVNC IN SIGNVM / PONI CVRAVERVNT / MDCCCLXXVI”. 필자는 루르드 거주 중인 이 데레사 씨에게 이 석판 사진 촬영을 부탁하여 2017년 7월에 입수하였다. 이 데레사 씨께 감사드린다.

 

125) 방상근, 〈매괴회〉, 《교회와 역사》 257호, 1996년 10월, 7~12쪽.

 

126)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 《한국천주교회사》 하, 분도출판사, 1980, 136쪽.

 

127) 방상근, 〈성모성심회〉, 《교회와 역사》 263호, 1997년 4월, 8~12쪽.

 

128) 《경향잡지》 565호, 1925년 5월 15일, 〈논설 : 로마를 향하여 떠나면서〉, 199~202쪽.

 

129)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2 · 395쪽.

 

130)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7쪽.

 

131) 《경향잡지》 599호, 1926년 10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4), 441쪽.

 

132) 《경향잡지》 581호, 1926년 1월 15일, 〈잘 다녀왔습니다〉, 4쪽.

 

133) 《경향잡지》 589호, 1926년 5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5), 200~201쪽.

 

134) 《뮈텔주교일기》 1925년 8월 7일 ; 《경향잡지》 591호, 1926년 6월 16일, 〈로마여행일기〉 (17), 250쪽.

 

135)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9월 28일, 파리(《교회와 역사》 452호, 2013년 1월, 38~39쪽) ; 《경향잡지》 599호, 1926년 10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4), 440쪽.

 

136) 《경향잡지》 571호, 1925년 8월, 352쪽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와 설명〉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실렸다.

 

137) 《경향잡지》 591호, 1926년 6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7), 252쪽.

 

138) 《뮈텔주교일기》 1925년 9월 14 · 21일 ; 《드망즈주교일기》 1925년 9월 21일 ; 《경향잡지》 592호, 1926년 6월 30일, 〈로마여행일기〉 (18), 273쪽 ; 미조 리베 지음, 《착한 목자 조셉 뷜토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7, 62~63쪽.

 

139) 1925년 11월 13일 한국에 도착한 베르트랑(Bertrand, Jules, 1897~?) 신부와 몰리마르(Molimard, Joseph, 1897~1950) 신부이다(《경향잡지》 578호, 1925년 11월 30일, 〈회보 : 새 신부 양위 도착〉, 520쪽).

 

140) 《경향잡지》 591호, 1926년 6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7), 253쪽.

 

141) 《뮈텔주교일기》 1925년 8월 11 · 12 · 15일 ; 《경향잡지》 593호, 1926년 7월 15일, 〈로마여행일기〉 (19), 295~297쪽.

 

142) 《경향잡지》 581호, 1926년 1월 15일, 〈잘 다녀왔습니다〉, 5쪽 ; 588호, 1926년 4월 30일, 〈로마여행일기〉 (14), 182쪽.

 

143) 천주공교회 신부 한기근, 〈세계 각국의 田園印象記−恐獨病에 마음 못놋는 佛蘭西의 전원〉,《조선농민》 제3권 제8호, 1927년 8월 10일.

 

144) 《경향잡지》 577호, 1925년 11월 15일, 〈회보 : 한 신부 소식〉, 498쪽.

 

145) 1925~1927 예루살렘 카사노바의 숙박록에 한기근 신부 바로 위에 같은 날 도착, 국적 프랑스, 종교 가톨릭으로 기록되어 있다.

 

146) 한기근 신부→드브레 주교, 1925년 9월 28일, 파리(《교회와 역사》 452호, 2013년 1월, 38~39쪽) ; 599호, 1926년 10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4), 440쪽.

 

147) 《경향잡지》 599호, 1926년 10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4), 440~442쪽.

 

148) 《경향잡지》 577호, 1925년 11월 15일, 〈회보 : 한 신부 소식〉, 498쪽 ; 600호, 1926년 10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5), 463쪽.

 

149) 《경향잡지》 601호, 1926년 1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6), 488쪽.

 

150) 천주교회 최고(最古)의 수도원으로 한기근 신부가 방문하였을 때 본래의 수도원은 터만 남아 있었고, 그 옆에 1836년에 복원한 수도원(Monastery of Our Lady of Mount Carmel)이 있었다(《경향잡지》 601호, 1926년 1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6), 488~489쪽 ; 김상원 신부 제공 자료).

 

151) 《경향잡지》 601호, 1926년 1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6), 489쪽.

 

152) 《경향잡지》 602호, 1926년 11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7), 511쪽.

 

153) 《경향잡지》 552호, 1924년 10월 31일, 〈회보 : 팔레스티나 성지에 두 성전 축성〉, 476~477쪽.

 

154) 《경향잡지》 600호, 1926년 10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5), 463쪽.

 

155) “팔레스티나 살드 촌 희랍교인 1,500여 명이 희랍교를 버리고 성교회에 돌아온”(《보감》 109호, 1909년 제3권, 〈천주교회보 : 졸단 향측(向側)〉, 35쪽) ; “팔레스티나에 있는 갈멜산 수도원 소유지가 위태하게”(《경향잡지》 353호, 1916년 7월 15일, 〈천주교회보 : 곳듸 전하의 약전〉, 353쪽) ; “팔레스티나와 아라비아 사람들”(《경향잡지》 342호, 1916년 1월, 〈잡지의 잡지 : 시내산〉, 40쪽).

 

156) 《동아일보》 1921년 5월 28일 자, 〈7년 만에 한양성에〉 ; 《매일신보》 1921년 5월 28일 자, 〈猶太의 聖地까지 踏破한 조선 사람의 노정일 씨〉 : 《신한민보》 1921년 7월 14일 자, 〈노정일 씨의 필업 귀국〉 ; 《개벽》 19호, 1922년 1월 10일, 문학사 노정일, 〈세계일주 산 넘고 물 건너〉.

 

157) 《매일신보》 1921년 5월 28일, 〈猶太의 聖地까지 踏破한 조선 사람의 노정일 씨〉.

 

158) 《동아일보》 1921년 5월 19일 자, 〈노정일 군 환영회〉 ; 5월 28일 자, 〈7년 만에 한양성에〉.

 

159) 《동아일보》 1921년 5월 28일 자, 〈평양 기독교 청년회 강연회 : 성지 순례의 소감(노정일)〉.

 

160) 《매일신보》 1921년 6월 2일 자, 〈蟬聲의 獨唱으로 제이일의 노정일 씨 강연회장에서〉.

 

161) 《개벽》 19호 · 20호 · 21호에는 필자가 노정일로 표기되어 있는데, 22호(1922년 4월 1일)부터 26호(1922년 8월 1일)는 필자가 “엠.에(M.A), 一愚”로 되어 있다.

 

162) 《경향잡지》 600호, 1926년 10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5), 463쪽.

 

163) 《경향잡지》 574호, 1925년 9월 30일, 〈로마여행일기〉 (9), 418쪽.

 

164) 《경향잡지》 600호, 1926년 10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5), 464쪽.

 

165) 한기근→뮈텔, 1906년 7월 7일, 8월 12일, 9월 21일, 1907년 2월 12일, 적은동.

 

166) 1910년 6월 1일 마태오복음의 교열이 끝났고, 7월 7일 4복음서의 교열 작업이 마무리되었다(《뮈텔주교일기》 1910년 6월 1일, 7월 7일).

 

167) 한기근 신부는 인쇄된 《사사성경》을 뮈텔 주교로부터 1910년 12월에 받았고(한기근→뮈텔, 1910년 12월 21일, 적은동), 오자(誤字)가 있는 부분을 교정하여 1911년 8월 뮈텔 주교에게 보냈다(한기근→뮈텔, 1911년 8월 1일, 적은동).

 

168) 1책 123쪽 분량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도서관 · 행주성당 소장.

 

169)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7쪽.

 

170) 영국이 1917년 12월~1920년 7월 군부통치, 1920년 7월~1948년 5월 위임통치(홍미정,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와 시온주의 프로젝트〉, 《한국이슬람학회논총》 25-2, 한국 이슬람학회, 2015, 114쪽).

 

171) 《경향잡지》 600호, 1926년 10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5), 464쪽.

 

172) 《경향잡지》 573호, 1925년 9월 15일, 〈로마여행일기〉 (8), 396~397쪽.

 

173) 《경향잡지》 600호, 1926년 10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5), 464쪽.

 

174) 《경향잡지》 600호, 1926년 10월 30일, 〈로마여행일기〉 (25), 464쪽.

 

175) 2018년 10월에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한 김영권 신부께 부탁하여, 한기근 신부의 예루살렘 카사노바 숙박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예루살렘 거주 김상원 신부(작은 형제회)께서는 한기근 신부의 숙박 기록을 찾아주셨고, 필자의 문의사항들에도 친절하게 답해 주셨다. 두 신부님께 감사드린다.

 

176) 프란치스코회에서 1883년에 기념 성당 건립(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2010(2판), 2017(2판 4쇄), 195~198쪽).

 

177) 《경향잡지》 603호, 1926년 12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8), 534~537쪽 ; 605호, 1927년 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9), 7~8쪽.

 

178) 《경향잡지》 605호, 1927년 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9), 8쪽.

 

179) 김상원 신부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카사노바’는 1847년에 건립되었고, 1910년에 건물이 확장되어 오늘날 200여 침대 규모이다. 현 주소는 Casa Nova in Jerusalem, CASANOVA STREET, NEW GATE, P.O.B. 1321, 9101301 JERUSALEM ISRAEL.

 

180) 한기근 신부의 예루살렘 숙박 기록은〈1925~26, 1927 Casa-Nova〉라고 표기한 노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숙박 기록의 2924번째 방문자로 “세례명은 Paulo, 성은 Han, 국적은 Coreanus, 종교는 Catholique, 방 번호는 35, 숙박 일수는 22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방 번호와 숙박 일수는 카사노바 측에서 기록하였으리라 생각되는데 착오가 있다.

 

181) 《경향잡지》 603호, 1926년 12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8), 535쪽.

 

182) 《경향잡지》 605호, 1927년 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9), 9쪽. 한기근 신부가 보았던 이 성당은 1927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48쪽).

 

183) 《경향잡지》 606호, 1927년 1월 31일, 〈로마여행일기〉 (30), 32쪽.

 

184) 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49~50쪽.

 

185) 《경향잡지》 605호, 1927년 1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9), 9쪽.

 

186) 《경향잡지》 607호, 1927년 2월 15일, 〈로마여행일기〉 (31), 55쪽.

 

187) 《경향잡지》 609호, 1927년 3월 15일, 〈로마여행일기〉 (33), 107쪽.

 

188) 《경향잡지》 610호, 1927년 3월 31일, 〈로마여행일기〉 (34), 131쪽.

 

189) 《경향잡지》 608호, 1927년 2월 28일, 〈로마여행일기〉 (32), 80쪽. 성문은 1530년 터키군에 의해 봉쇄되었고, 1540년 슐레이만에 의해 성벽이 보수되면서 완전히 폐쇄되었다(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28쪽).

 

190) 《경향잡지》 613호, 1927년 5월 15일, 〈로마여행일기〉 (37), 213~214쪽.

 

191) 《경향잡지》 603호, 1926년 12월 15일, 〈로마여행일기〉 (28), 535쪽.

 

192) 《경향잡지》 607호, 1927년 2월 15일, 〈로마여행일기〉 (31), 55쪽 ; 608호, 1927년 2월 28일, 〈로마여행일기〉 (32), 81~82쪽 ; 610호, 1927년 3월 31일, 〈로마여행일기〉 (34), 130~132쪽 ; 611호, 1927년 4월 15일, 〈로마여행일기〉 (35), 156쪽.

 

193) 《경향잡지》 606호, 1927년 1월 31일, 〈로마여행일기〉 (30), 33쪽.

 

194) 《경향잡지》 610호, 1927년 3월 31일, 〈로마여행일기〉 (34), 132쪽. 이곳에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1955년 성당(Dominus Flevit Church)을 건립하였다(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85쪽).

 

195) 《경향잡지》 611호, 1927년 4월 15일, 〈로마여행일기〉 (35), 155쪽. 한글 ‘주님의 기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식 후 예루살렘을 성지 순례한 부산교구 초대 교구장 최재선(崔再善, 요한, 1912~2008) 주교가 기증(김상원 신부의 블로그 : blog.daum.net/terrasanta/17464774). 2008년 12월경 한국의 개신교 목사가 개신교용 기도문으로 바꿔서, 2009년 천주교용 기도문 타일판이 다른 쪽 벽면에 걸렸다(정양모 · 이영헌,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88쪽).

 

196) 《경향잡지》 608호, 1927년 2월 28일, 〈로마여행일기〉 (32), 83쪽.

 

197) 《경향잡지》 612호, 1927년 4월 30일, 〈로마여행일기〉 (36), 179~180쪽.

 

198) 《경향잡지》 613호, 1927년 5월 15일, 〈로마여행일기〉 (37), 213~214쪽 ; 614호, 1927년 5월 31일, 〈로마여행일기〉 (38), 230쪽.

 

199) 《경향잡지》 614호, 1927년 5월 31일, 〈로마여행일기〉 (38), 232쪽.

 

200) 《경향잡지》 614호, 1927년 5월 31일, 〈로마여행일기〉 (38), 232쪽.

 

201) 《경향잡지》 615호, 1927년 6월 15일, 〈로마여행일기〉 (39), 255쪽. 

 

[교회사 연구 제53집, 201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윤선자(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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