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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다블뤼의 기해박해 서술 연구: 기해일기 보완 작업과 그 내용을 중심으로

103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5-22

다블뤼의 기해박해 서술 연구


 - 《기해일기》 보완 작업과 그 내용을 중심으로 -

 

 

국문 초록

 

다블뤼 주교의 기해박해에 대한 인식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드러난다. 박해가 조선 천주교회에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신자들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순교가 교회 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블뤼는 기해박해 관련 순교자에 대해 서술할 때 기존에 있던 자료를 참조하였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면서 추가 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이 중에는 최양업 신부가 앞서 수집한 자료들도 포함되었다. 물론 다블뤼가 추가로 수집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 아마도 구술 증언을 기록한 자료로 추정한다.

 

다블뤼는 《순교자 약전》을 저술하면서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에 대해 명단과 간략한 약력 소개만 하였다. 하지만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를 보면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에 대해 보완하여 서술한 부분이 있다. 《순교사 비망기》가 보완한 부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동정 순교자들의 경우 이미 알려진 순교 과정보다는 동정을 지키고자 노력한 과정에 더 주목하였다. 또한 순교자들이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킨 강한 열의와 용기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리고 《기해일기》에 순교 사실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경우 다블뤼가 이를 밝혀내어 추가 서술하였다. 끝으로 다블뤼는 신자들에게 직접 들은 구술 증언을 반영하여 《기해일기》의 내용을 보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에 나온 기해박해 순교자 기록은 《기해일기》와 그 주변 자료에 바탕을 두었으나, 그와 최양업이 추가 수집한 구술 증언 자료의 비중도 적지 않았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순교사 비망기》는 기존에 나온 《기해일기》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담았다. 또한 그가 기존에 저술한 《순교자 약전》의 내용을 더 보충하였다고 볼 수 있다.

 

 

1. 머리말

 

다블뤼(Daveluy) 주교가 한국천주교회사 기록을 다수 작성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베르뇌 주교로부터 한국천주교회사 서술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Notice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이하 순교자 약전)》1)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Note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이하 순교사 비망기)》2)를 저술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발송하였다. 이 중 《순교사 비망기》는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를 저술하는 데 필요한 기본 자료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다블뤼는 기존에 나온 여러 순교 기록들과 함께 그가 새로 수집한 증언과 자료들을 토대로 이러한 교회사 관련 자료들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블뤼의 교회사 기록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참조한 기존의 순교 기록과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다블뤼가 조선에 입국한 시기와 가장 가까우며 나중에 순교자 시복 수속에 큰 영향을 준 기해박해 관련 기록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우선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서술하면서 참조한 자료 목록에 대한 조사는 기존 연구에서 밝혀 놓은 바가 있다.3) 이 연구 성과는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를 비롯한 그가 저술한 자료들이 달레의 저술에 주요 자료가 되었음을 밝히면서 다블뤼를 《한국천주교회사》의 공동 저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블뤼가 《순교사 비망기》를 쓴 과정도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였다. 그러나 《순교사 비망기》가 담고 있는 자세한 내용에 대한 분석은 미흡하다. 한편 기해박해 관련 자료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고 이를 비교 분석한 연구 성과도 있다.4) 이 연구 성과는 기해박해와 관련된 교회 측 자료와 조선 측 관찬 자료까지 모두 찾아서 분석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다블뤼의 기록에 대해서는 《순교자 약전》은 별도의 자료로 소개하면서 《순교사 비망기》에 대해서는 달레의 저술에 포함하여 소개하였다. 《순교사 비망기》가 달레의 책에 주요 자료가 되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중심으로 저술하다 보니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는 상대적으로 적게 언급되었으며, 상세히 분석하지 못한 한계도 있다. 특히 기해박해에 대한 조선 교회 측 주요 자료인 《기해일기》와 다블뤼의 기록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도 미흡하다. 또한 《기해일기》 그 자체만을 다룬 연구 성과도 있다.5) 이 연구 성과는 《기해일기》의 형성과 구조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였으며, 페레올 주교의 불역본 증보판과도 비교 분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블뤼의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에 나온 기해박해 서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분석을 하지는 않았다.

 

이제 다블뤼 주교가 《순교사 비망기》와 《순교자 약전》에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다블뤼가 기해박해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졌으며, 교회사 연구와 저술을 위해 접했던 자료와 교회사 서술을 한 과정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이어서 다블뤼가 《기해일기》를 비롯한 다른 기해박해 자료보다 새로 서술한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2. 다블뤼의 기해박해 인식과 검토 자료

 

다블뤼 주교는 베르뇌 주교의 지시에 따라 1856년부터 정식으로 순교자 행적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전에 최양업 신부가 했던 작업을 이어받았으며 그가 수집한 자료들도 넘겨받았다.6) 다블뤼는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시기부터 그가 지낸 최근 시대의 교회사와 교회 인물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중 다블뤼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일어났으며 자신의 동료 선교사가 순교한 기해박해에 대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특히 순교자 행적 수집 과정에서 그러한 인식을 지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기해박해에 대해 나온 기존 자료들을 접하고 새로운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이다. 이제 기해박해에 대해 가진 다블뤼의 인식과 그가 접한 기록에 대해 파악해 보고자 한다.

 

1) 다블뤼의 기해박해에 대한 인식

 

다블뤼는 그가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와 서술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기 전부터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와 순교자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미 조선에 입국한 이후부터 입국 전에 일어났던 기해박해에 대한 나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인식은 그가 1847년 10월에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드러나 있다.

 

《전교회연보》에서 지면을 할애하는데 너무 인색하지 않았다면, 부모님께서는 지난해 주교님이 보낸 1839년도 순교자들의 상세한 행적을 통해서 조선의 가장 아름다운 경이로움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행적에는 참으로 매우 아름다운 내용을 담은 대목들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한 해, 또한 몹시 크나큰 고통의 한 해였습니다. 박해에 기근까지 겹쳐 만일 하느님이 당신의 강력한 손으로 작은 무리를 지켜주시고 남겨놓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교우들 모두가 소멸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까지도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길이 기억될 그때의 일들을 매일 조금씩 듣게 됩니다. 그 교우 중 많은 수가 어떻게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여전히 의아스러울 정도입니다.7)

 

조선에 입국한 지 2년이 지난 시점에 보낸 편지 안에서 다블뤼는 박해의 어려움을 겪어낸 신자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박해의 상황을 들으면서 느꼈던 바를 서술하였다. 여기서 다블뤼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는 상황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박해가 조선 천주교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했으며, 박해 이후 교우들의 신앙심이 더 굳건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다블뤼는 기해박해 관련 기사가 《전교회연보 Annales de la Propagation et Foi》8)에 게재되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이 편지를 작성하였다. 이 당시 페레올 주교는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발송하였다. 1846년 9월 22일에 발송한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가 수집한 1839년 박해 동안의 몇몇 순교자들의 행적 Actes de quelques martyrs coréens durant la persécution de 1839, recueillis par Charles Hien et Thomas Y〉9)과 김대건 신부와 병오박해 순교자 약전의 형식을 가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6년 11월 3일 자 서한〉10)이 그가 발송한 자료이다.11) 페레올은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전교회연보》에 자신이 보낸 순교 이야기가 게재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12) 그런데 발송한 자료 중에서 병오박해 순교자 약전 형식을 가진 서한만 1847년 《전교회연보》 115호에 실렸다.13)

 

다블뤼가 편지에 언급했던 기해박해 관련 보고서가 《전교회연보》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페레올의 편지를 통해 조선 천주교회의 박해 실상이 유럽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박해를 이겨낸 조선 신자들의 삶이 자신의 가족은 물론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기해박해에 대한 다블뤼의 인식은 그가 저술한 《순교사 비망기》 안에도 있다.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 이후 《순교사 비망기》의 말미에 기해박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신자들이 목자들과 뛰어난 지도자들 대부분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순간에만 흔들렸다. 다른 한편으로 공공의 여론은 박해의 끝에 온 조정의 은사를 알아차리기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평판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야만스럽고 잔인한 방법으로 신자를 몰아세운 가족들은 잔혹한 평판과 악명만을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마침내 그리스도교 교리는 이교인들 대부분에게 상세히 퍼져 나갔다. 재판관, 관리, 포졸, 감옥과 법정에서 만난 도적이나 범죄자들인 죄수들도 우리 성교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신자들 집에서 압수한 책을 읽고 그리스도교 진리를 고백하였으며 몇몇 사람들은 높이 찬양하였다. 간수들과 형리들은 형을 면하게 할 수 없었기에 신자 죄수들을 혹독하게 고문하였으나 모두 이들을 불쌍히 여겼다. 좋은 믿음, 신중함, 인내, 자선 그리고 우리 신자들이 부름을 받은 모든 곳에서 보여 준 덕들이 큰 조각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 대박해로부터 공공의 여론이 우리에게 친근히 대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피에 의해 풍요로워진 땅 위에 매년 점점 더 빛나는 더 청명한 날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14)

 

다블뤼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저술하고 난 후, 박해가 교회 공동체에 타격을 주기는 했지만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고 파악하였다. 도리어 박해로 인하여 천주교 교리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었다고 서술하였다. 신자들이 감옥에서 만난 죄수들과 포졸들 역시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천주교가 전파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비록 교회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박해로 인해 결코 무너지지 않았으며 궁극적으로 승리하였음을 선언하였다. 이는 10년 전에 부모에게 쓴 편지와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라도 더 상세하고 극적인 표현을 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와 《순교사 비망기》를 통하여 기해박해에 대해 자신이 가진 인식을 표현하였다. 이 두 문건 안에 공통적으로 드러난 다블뤼의 인식은 박해가 조선 천주교회에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신자들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박해와 이로 인한 순교가 교회 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는 다블뤼만이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인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블뤼가 직접 작성한 서한을 통해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와 더불어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바와 같이 조선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전교회연보》를 통해 유럽에 널리 전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영적 물적 후원이 더 오기를 바라면서 박해가 교회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 다블뤼가 접한 기해박해 관련 자료

 

《순교사 비망기》를 저술하기 전에 다블뤼가 접했던 기해박해 관련 기록은 무엇일까? 다블뤼가 교회사 저술을 위해 접할 수 있었던 자료는 풍부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누이인 테레즈 수녀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각각 드러나 있다.

 

대목구에서는 이제 나를 조금 쉬게 해주려고 그런 것 같은데, 내가 맡은 일은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래로 오늘날까지의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에 관한 작업입니다. 그래요, 매우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자료가 그다지 많지 않아요. 나는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자료 모음집이 만들어지리라 기대합니다.15)

 

올봄부터 저는 이 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역사와 우리의 수많은 순교자들과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일까지 추가로 떠맡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계속되는 박해로 완전한 자료를 갖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적고 또 상당수는 발견되지 않고 있어요.16)

 

이 편지에서 다블뤼는 순교자 자료 수집과 역사 편찬을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해보니 자료가 부족하다는 토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그가 신자들을 만나면서 수집한 증언 자료를 얻기 전에는 제한적 자료만을 접하였을 것이다. 기해박해 순교자와 관련해서 주로 《기해일기》와 그 주변 자료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가 접한 《기해일기》와 그 주변 자료의 형태는 무엇일까?

 

《기해일기》는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가 바탕 자료이었으며, 한글로 나온 원본 이외에 페레올의 프랑스어 번역 증보판과 이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라틴어 번역본이 있다. 다블뤼가 이 기록들을 모두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필사본 형태로 조선 신자들 사이에 전해진 한글본 《기해일기》를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성을 더하기 위해 한글보다는 그에게 더 익숙하였던 프랑스어나 라틴어 번역본을 참조하였을 것이다.17) 실제로 다블뤼는 《순교자 약전》에서 페레올 주교의 프랑스어 번역 증보판을 접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페레올 주교께서 1839년의 박해에 관한 문서를 보내셨기에 나는 그 부분에 해당하는 글을 다시 옮겨 적지 않는다. 프랑스에 발송한 약전은 근본적으로 원본과 다르지 않다. 나는 명단만 베끼게 할 것이고 필요한 부분에 몇 가지 소견을 붙이도록 할 것이니, 내가 이곳에서 빼놓은 사항들은 고의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18)

 

이를 통해 다블뤼가 페레올의 번역본을 검토하였으며,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비교하고 필요한 내용을 취사 선택하여 새로이 순교자 전기를 서술한 사실을 알 수 있다.19)

 

교회사와 순교자 행적 연구 및 서술을 담당한 지 2년 후에 다블뤼는 《순교자 약전》 저술을 마무리하고 이를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발송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1858년에 부모에게 보낸 편지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두 배로 할당된 작업을 해야 했어요. 조선의 순교자들의 역사와 조선 교회사 집필 작업이 마무리될 수 있기를 기다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순교자들의 생애를 뽑아내어 교황 성하께 제출해서 경애하올 그 신앙 증거자들에 대한 성교회의 재판을 요청할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집필 작업이 이제는 더디고 고단합니다만, 우리의 영웅적인 교우들이 중재해 주는 힘에 기대서 저는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선별집은 150명이 넘는 순교자들의 생애를 모은 것이며, 이 묶음을 올해 보내기로 되어있습니다. 조선 천주교회사 집필 작업도 진전이 있습니다. 기대했던 자료들을 거의 모두 수집했으니 이제 그것들을 보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확인할 인물들이 사는 장소가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 작업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마련해 주신다면 그 작업도 끝을 보겠지요.20)

 

교장 신부님, 순교자 역사책을 올해에 보내드릴 수 없어서 갑사의 주교님은 올해 시복시성 수속의 도입 부분이 될 형식에 따른 로마에 보이기 원하는 순교자 선집을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주교님은 의심 없이 이러한 말을 당신에게 했습니다. 그러나 해당 작업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제 손으로 직접 쓰고 당신에게 보낸 이 선집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합니다. 360명의 순교자와 저의 순교자 명단에 있는 몇몇 이름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들 중에서 선택하여 선집을 만들었으며 이번 여름이 오기 전에 다시 기록을 하였습니다. 저는 신뢰성을 담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다른 방면에서 추가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담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는 새로운 증언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매우 잘 알려진 순교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까지 여러 지방에서 어떤 답변도 들을 수 없었던 순교자들의 이름도 기록해 두었으니 이에 대한 답신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21)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블뤼는 자료 부족을 토로했던 전 해의 편지와 달리 기대했던 자료들을 거의 모두 수집하였다고 서술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수집한 자료가 무엇인지 상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비록 순교자 역사 전반에 대한 책을 보내기는 어렵기는 하지만 로마 교황청 시복시성 수속에 필요한 순교자 약전을 선정하여 발송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약전에 수록할 순교자를 선정한 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수집한 순교자의 명단이 아직 불완전하며 보완할 점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고백을 하였다.

 

한편 다블뤼는 그가 쓰고 발송한 《순교자 약전》에서 페레올 주교가 다루지 않은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페레올 주교께서 1839년의 박해에 관한 문서를 보내셨기에 저는 그 부분에 해당하는 글을 다시 옮겨 적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 발송한 약전은 근본적으로 원본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명단만 베낄 것이고 필요한 부분에 몇 가지 소견을 붙일 것이니, 제가 이곳에서 빼놓은 사항들은 고의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여러분의 문서와 확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시에 지방의 모든 순교자들의 약전은 발송되지 않았으므로 제가 그때 빠진 부분을 채웠습니다. 주교님께서 서울의 순교자들 가운데 몇 분의 약전이 발송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시니 제가 여기에 그들의 약전을 넣는데, 만일 여러분의 것과 중복이 된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22)

 

다블뤼는 페레올이 증보 번역한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뿐만 아니라 자신이 행적을 수집한 지방 순교자들의 이야기도 약전에 게재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기해일기》에도 페레올의 편지에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순교자 약전》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보낸 편지에서 기존 기록에 없는 것을 보충한다고 보고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도 다블뤼가 《순교자 약전》을 저술하면서 서울 지역 순교자 77명에 지방 순교자 21명을 포함하여 총 98명의 순교자들의 기록을 실었다고 파악하였다.23)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다블뤼가 기존에 나온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기해일기》, 페레올 주교의 번역본 이외에도 기해박해와 관련한 다른 자료를 접하고 이를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에 반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다블뤼는 《순교사 비망기》를 서술하면서 앵베르의 보고서를 인용하였다. 기해박해의 초기로 볼 수 있는 1839년 1월 16일, 25일, 2월 17일, 부활절, 3월 7일, 21일, 28일, 4월 7일의 상황을 기록한 부분을 먼저 《순교사 비망기》에 인용하였다. 여기서는 앵베르 주교의 성무 활동과 더불어 신자들이 체포당하는 일들이 나와 있다.24) 이어서 4월 19일부터 21일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부분도 인용하였는데, 여기에는 남 다미아노, 박 루치아, 전 아가타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25) 그리고 김효주 아녜스와 김효임 골롬바의 이야기를 기록한 5월 3일, 9일, 12일 상황에 대한 기록도 《순교사 비망기》에 인용하였다.26) 결국 다블뤼는 《기해일기》를 인용하면서, 보충 자료로 《기해일기》의 바탕 자료라 할 수 있는 앵베르의 보고서도 중간에 삽입하였다.27)

 

이렇게 다블뤼가 기존에 접한 《기해일기》와 그 주변 자료에 대한 부분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가 기존에 접한 자료 이외에 기해박해 순교자에 대해 추가적으로 수집한 자료에 대한 실체가 상세히 드러나 있지 않다. 물론 신태보 옥중수기를 입수하여 번역한 부분을 《순교사 비망기》에 넣었으며 거기에 기해박해 순교자 이야기가 일부 나와 있다.28)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그가 추가 수집한 기해박해 관련 자료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없다. 아마도 구술 증언 자료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다블뤼가 있던 시절에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 이외에 추가로 발간된 기해박해 관련 자료가 없다는 면에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문헌 자료에 없는 부분은 다블뤼가 사목 방문을 하는 과정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증언 자료가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다블뤼가 순교자 구술 증언 자료를 중심으로 삼을 수밖에 없던 일에 대해서는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제가 보낸 약전 안에서 제가 언급한 순교자들이 신앙을 고백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글로 쓴 증언 자료는 신자들의 구술 증언을 근거 자료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다른 행동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 저는 받아들이기 덜 어려웠으며 결과적으로 동등하게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들이 보고하였으며 그들이 부정적인 부분을 보지 않았다는 점을 받아들였던 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시복 법정이 목격 증인의 공증 자료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옛 순교자들 대부분이 이런 조건에 맞출 수 없습니다. 순교자들은 대부분 글로 쓴 자료 없이 죽임을 당했으며 신자들의 기억과 마음 안에만 그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29)

 

이 서한을 통해 다블뤼는 순교자에 대한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음과 더불어 신자들의 구술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신자들이 증언한 내용에 대한 신뢰감도 표현하였다. 문헌 자료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다블뤼는 사목 방문한 지역에서 순교자에 대한 신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이를 그가 쓴 기록에 반영하였다.

 

한편 다블뤼는 자신이 직접 수집한 자료와 더불어 다른 이가 수집한 자료도 활용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수집한 자료를 인계받아 주요 자료로 활용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순교자 자료를 수집하고 서술한 과정은 기존 연구에 이미 나온 바가 있다. 여기서는 최양업이 수집한 자료들을 다블뤼 주교에게 모두 넘겨주었다는 점을 그가 쓴 서한을 통해 밝혔다. 이 중 최양업의 서한에 확실히 드러난 이들은 그의 부모인 최경환, 이성례와 친척인 최해성이라는 점도 서술하였다.30)

 

그런데 최양업이 파악한 순교자 중,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에게 보낸 서한에 나온 최경환, 이성례, 최해성의 경우를 제외하면 나머지 순교자에 대한 기록의 형태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최양업이 사목 방문을 통해 얻은 구술 증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면에서 차후 다블뤼가 수집한 자료와 같은 형태와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최양업과 다블뤼가 수집한 자료의 형태는 전국 여러 지역에 흩어진 교우촌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에게 들은 구술 증언을 글로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다블뤼가 최양업으로부터 받은 자료들과 자신이 직접 수집한 구술 증언 자료들은 남아 있지 않다. 1863년에 다블뤼 주교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로 그가 가진 자료가 담긴 큰 상자가 소실되었다. 달레의 기록에 의하면 이 상자 안에 국한문으로 쓴 순교자들의 사기의 원제목과 자세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 7, 8권의 원고와 조선 역사에 대한 연구 자료와 귀중한 조선 서적이 있었다고 한다.31) 아마도 최양업과 다블뤼가 신자들로부터 들은 구술 증언을 기록한 자료도 이 당시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다블뤼는 기해박해 관련 순교자에 대해 서술할 때 기존에 있던 자료로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기해일기》, 페레올 주교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면서 추가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를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 서술에 반영하였다. 이 중에는 최양업 신부가 앞서 수집한 자료들도 포함되었다. 물론 다블뤼가 추가로 수집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 아마도 직접 들은 구술 증언을 기록한 자료로 추정한다. 결국 신태보 옥중수기와 최양업 신부의 서한을 제외하고는 기해박해에 한해서 볼 때, 구술 증언 자료가 주요 원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3. 기해박해 서술과 《기해일기》 보완 내용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가 나온 것은 《기해일기》가 나온 지 2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다블뤼가 조선에 입국한 때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17년의 시간이 지났다. 다블뤼의 《순교자 약전》도 《순교사 비망기》와 비교해 보면 불과 3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결국 다블뤼의 기록은 《기해일기》 출간 시점을 기준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 안에 다블뤼가 들었던 증언과 수집한 자료들이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기해일기》의 내용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담았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우선 《기해일기》에 없지만 다블뤼가 자신의 기록 안에 다룬 기해박해 순교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 이야기 중에서 다블뤼가 보완한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고자 한다.

 

1) 《기해일기》에 없는 다블뤼 기록 안의 기해박해 순교자

 

기해박해 관련 자료들이 다룬 순교자 명단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가 있다. 각 자료들이 수록한 순교자들의 명단 비교를 표로 작성하여 비교하기 쉽게 만들었다.32) 그런데 다블뤼의 《순교자 약전》은 다루었지만 《순교사 비망기》는 다루지 않았다.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하면서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를 그대로 수용하였기에 달레의 책에 포함하여 언급하였다.33) 위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달레의 책에 나온 기해박해 순교자 수는 120명이다. 반면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 수는 78명에 달한다. 이는 다른 연구 성과에도 그대로 나와 있다.34)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 수가 맞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혹은 달레의 책에만 나온 기해박해 순교자가 다블뤼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면, 다블뤼가 《순교사 비망기》에 수록한 기해박해 순교자 수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를 살펴보면 달레의 책에 언급하지 않은 순교자들도 많이 나온다.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 안에는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 중 현석문의 아내 김 데레사 한 명만 제외하고 다 나왔다. 그 외에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은 기해박해 순교자로 37명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 중 김성우 안토니오는 《기해일기》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페레올의 증보 번역본에는 나왔다.35)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기해일기》와 페레올의 증보 번역본에 나오지 않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순교사 비망기》 안에 넣었다.

 

그런데 이는 앞서 다블뤼가 저술한 《순교자 약전》에 나온 순교자 수보다 더 많다. 결국 다블뤼가 《순교사 비망기》에 기록한 기해박해 순교자 수는 114명이다.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지만 《순교자 약전》에 나온 기해박해 순교자 수는 21명이다.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았지만 다블뤼의 두 기록에 나온 순교자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를 살펴보면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았지만 다블뤼의 기록에만 나온 순교자들 중 대부분이 지방에서 순교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블뤼가 각 지방에 흩어진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기해일기》가 미처 다루지 못한 지방의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 자료를 수집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들은 증언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은 순교자 이야기를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에 서술하였다.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를 비교해 보면 《순교사 비망기》에 나온 기해박해 순교자 수가 16명 정도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다블뤼는 《순교자 약전》을 1858년에, 《순교사 비망기》를 1862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발송하였다.36) 발송 시기만 본다면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 사이에 4년의 간격이 있다. 그 4년 안에 다블뤼가 새로 알게 된 순교자가 있었으며 그 순교자들이 《순교사 비망기》 안에 언급된 것이다. 그런데 추가로 언급된 순교자 자료들도 문헌 자료보다는 증언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다블뤼가 추가로 서술한 순교자 기록 중 신태보와 관련된 자료는 문헌 자료로 전해진 사례이다. 이 자료에는 신태보, 김대권, 이태권, 이일언, 정태봉이 순교한 사실이 나와 있다. 이어서 신태보의 며느리인 최조이의 순교 이야기가 간략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는 이태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자 약전》에 나온다. 더구나 이태권에 대해서도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자세한 서술은 없다. 그래서 신태보의 옥중 수기를 통해 다블뤼가 《순교사 비망기》에 추가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최해성의 경우 최양업이 남긴 기록이 있다. 최양업이 1856년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안에 최해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37) 그런데 서술 내용의 양을 살펴보면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가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38) 최양업이 편지에 담지 않았지만 다블뤼에게 넘겨준 자료에 있는 이야기를 넣었거나, 다블뤼가 새로 수집한 구술 증언 자료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결국 최해성에 대한 기록 중 다블뤼가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최양업이 수집한 기록에 한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기해일기》가 나온 이후에 다블뤼가 추가로 수집한 자료는 주로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에게 들은 구술 증언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증언 안에 《기해일기》의 저자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나왔으며, 그 이야기를 다블뤼가 《순교사 비망기》에 반영하였다. 물론 신태보의 옥중수기도 있었으며 최양업이 넘겨준 자료도 있었다. 하지만 옥중수기의 내용이 그리 많지 않으며 최양업의 자료는 대부분 구술 증언 자료였다는 점에서 다블뤼가 직접 수집한 구술 증언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1863년에 다블뤼의 집에 일어난 화재로 문서를 보관하던 상자가 불에 탔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다블뤼가 교우촌 사목 방문을 통해 《기해일기》에 없는 순교자들에 대한 구술 자료를 수집하여 문서 기록으로 남겼으나, 《순교사 비망기》를 보낸 이후 일어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순교사 비망기》에 그 내용이 들어감으로써 원천 자료는 아니더라도 2차 사료의 형태로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2) 다블뤼가 보완한 《기해일기》 수록 순교자 이야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다블뤼는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를 서술하면서 《기해일기》와 이에 대한 페레올의 증보 번역본을 주요자료로 참조하였다. 그리고 그 자료에서 언급하지 않은 순교자들에 대해서도 다수 서술하였다. 다블뤼가 전국에 흩어진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기존의 자료에서 다루지 못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이를 기록하였다. 그러면 기존의 자료에 나온 순교자들에 대한 서술에서 다블뤼가 더 추가하고 보완한 부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기해일기》 및 페레올 증보 번역본의 순교자 서술에서 다블뤼가 더 추가하고 보완한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기해일기》에 언급한 순교자에 한정해서 본다면 다블뤼는 《순교사 비망기》에 이들을 기록할 때 《기해일기》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거나 요약하였다. 《순교자 약전》을 서술할 때는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명단과 간단한 행적만을 저술하였다.39) 결국 다블뤼의 기록과 《기해일기》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블뤼가 순교자 자료 수집 과정에서 추가로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일부 덧붙여서 서술한 부분도 있다. 이는 《순교자 약전》이 아닌 《순교사 비망기》에 들어가 있다. 이러한 부분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기해일기》와 페레올 증보 번역본의 차이에 대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페레올의 《기해일기》 증보 번역본에 나온 순교자는 직접 명단에 나오지 않은 조 바르바라와 유조이 세실리아를 포함하면 모두 74명이다.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 중 최희득 필립보, 이 막달레나, 이성례 마리아, 김 데레사, 손경서 안드레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은 김성우 안토니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김성임 마르타,40) 현경련 베네딕타41)에 대한 약전을 페레올이 서술할 때, 《기해일기》보다 다소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옥사한 순교자로 나오는 김 바르바라, 김 루치아, 한 안나, 김 바르바라, 이 가타리나, 조 막달레나, 최경환 프란치스코, 정화경 안드레아, 김 데레사에 대한 서술42)도 심문기록을 제외한 간략한 기록이다.43)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에는 페레올의 증보 번역본에 나오지 않는 순교자 중 현석문의 아내 김 데레사의 이야기도 공통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순교자들은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에 나온다.

 

페레올이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은 순교자 중 기록한 김성우 안토니오에 대해서도 《순교사 비망기》에 나온다. 이제 《순교사 비망기》가 《기해일기》 및 페레올의 증보 번역본에 나온 순교자 서술 중 추가한 내용이 있는지 파악해 보고자 한다.

 

우선 남명혁 다미아노와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에 대해 추가 서술한 부분이 있다. 다블뤼가 추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나라 안에 천주교를 전하는 세 명의 유럽인이 있다는 것을 포장들은 서로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귀엣말로 나누었다. 옷가지들은 그들의 것이 매우 분명하였으나 더 이상 자세히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 소문이 재판을 통하여 사실로 판명난다면 그들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들을 붙잡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는 어린 임금과 작은 이 나라에 너무도 큰 사건이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말이었다. 그리하여 포장은 심문을 계속하지 않았다.44)

 

남명혁과 이광헌이 체포된 그 시점은 아직 프랑스 선교사들이 체포당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포도청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서양인이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는 자체가 매우 큰 사건이었으며 이러한 일을 다룬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맡기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기에 실제로 조선 관원들이 이 사건을 맡기를 꺼렸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러한 분위기가 일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남명혁과 이영덕에 대해 추가한 내용은 이들이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숨겨 주었다는 점과 이에 대한 포도청의 분위기에 대한 서술이다.

 

한편 동정 순교자인 이영덕 막달레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가 서술하였다.

 

이 막달레나는 동정을 지키기를 몹시 바랐으나, 그러려면 어떠한 방법으로 아버지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를 몰랐다. 막달레나는 부친이 자신을 외교인과 혼인시키려 하는 것을 보자,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고 언니 바르바라가 보여주었던 항구함의 모범에 힘입어 도망치는 방법을 택하였다. 막달레나는 교우인 하녀를 불러 비밀을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수도에 있는 고모 댁으로 피신해야겠는데, 가는 길을 모르니 이렇게 해 주게. 내일 이른 아침 아버지가 수도로 떠나시거든 눈치채지 않도록 멀리서 그분을 따라가게, 나 또한 멀리서 자네를 뒤따라갈 테니. 그러면 도착하겠지. 특히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네.” 이렇게 모든 일을 조치해 놓고 아침 일찍 일어나 낡은 옷을 입고 하녀와 함께 평소 입던 옷가지를 챙겨 가는 길에 있는 숲에서 기다렸다. 그곳에서 막달레나는 평소 입던 옷가지에 피를 묻힌 다음 갈기갈기 찢은 뒤 숲속 여기저기에 흩어 놓았는데, 이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고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그녀의 부친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고 하녀가 그를 뒤따라 왔으며, 막달레나도 그렇게 하여 세 사람 모두 무사히 고모인 데레사의 집에 도착하였다. 데레사는 처음에는 두려워하며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막달레나가 그녀를 안심시키며 사정을 이야기하고 몰래 숨겨달라고 부탁하였다. 달리할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날 막달레나의 아버지가 데레사의 집에 왔고, 때마침 잘 피신하여 몸을 숨겼다.45)

 

여기서는 이영덕이 동정 생활의 원의를 반대한 아버지를 피하기 위해 쓴 방법에 대한 서술이 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고 가장한 후에 고모 댁에 피신하여 동정 생활을 이어간 사연에 대해 언급하였다. 순교 사실에 대한 추가적인 서술은 없지만 동정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한 일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하였다.

 

이영덕과 마찬가지로 동정 순교자이며 궁녀인 박희순 루치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가 서술을 하였다.

 

사람들 말로는 박 루치아가 15살이 되기도 전에, 당시 16세 또는 17세였던 어린 임금 순종이 그녀의 매력에 이끌려 온갖 수단을 써서 그녀를 손에 넣고자 했다고 한다. 이 나라에서 나인들은 임금의 손 안에 있다. 임금의 욕망에 응하기를 기뻐하지 않을 나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루치아는 남다른 탁월한 덕성으로 임금의 청을 용감히 거절하고 그가 만족을 얻으려는 것을 결코 용납하려하지 않았다(이 시기의 여러 나인에게 물어보았고 모두가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다).46)

 

여기서도 이영덕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박희순이 동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화가 나와 있다. 궁녀인 박희순이 임금의 청을 거절하고 동정을 지킨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이야기를 한 후에 이것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나인들의 증언을 통해 증명된 일이라는 점을 덧붙여 서술하였다. 이러한 추가 서술은 이영덕에 대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순교 사실보다 동정 생활을 더 강조한 측면이 있다.

 

다음으로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수리산 교우촌 신자들과 자진해서 서울로 압송된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기해일기》에는 나오지 않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튿날 포도대장 임성구가 형장에 나와 겁을 주어 손쉽게 배교를 얻어 내고자 맨 처음 신문을 받는 교우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는데, 가장 먼저 받은 이가 바로 최 프란치스코였다. 이내 교우 몇 명이 배교하면서 무리 전체가 낙심하였고 많은 이들이 형벌을 받기도 전에 마음이 약해졌다. 더러는 반쯤은 배교의 말을 하여 풀려났고, 심지어 몇몇 교우는 포도대장의 애매모호한 말에 교묘하게 대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도대장은 거의 모든 교우들을 풀어주었다. 순수한 양심을 되찾은 이들도 더러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많은 이들이 석연치 않은 말을 내뱉고 다수가 그들의 믿음을 완전히 저버렸다는 사실 또한 솔직히 인정해야 하겠다. 포도대장은 이 사건에서 벗어나려 했던 그의 목적을 이루었다. 프란치스코의 아내는 매우 의연하면서도 아들을 외국에 신학생으로 보낸 사실에 깊이 연루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들과 함께 이 에메렌시아도 갇혀 있었다. 처음에는 그토록 열의가 넘쳤던 이 무리 가운데 남은 사람은 그들뿐이었다.47)

 

이 일화 안에 같이 압송당한 동료 신자들이 혹독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배교한 일에 대해 서술하였다. 신자들을 배교시키려 한 포도대장의 의도가 성공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런 가운데 신앙을 지킨 최경환과 그의 아내 이성례 마리아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를 언급하였다. 이러한 언급은 비록 표면상으로는 강하게 나오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배교하는 상황에서는 이들의 용기와 신앙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뿐만 아니라 최양업이 1851년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안에도 다음과 같이 담겨있다.

 

이처럼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40명이 모두 고문을 받았는데, 모두가 끝까지 항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편태와 곤장으로 고문을 받아 정신과 의식을 잃은 상태의 신자들에게 천주교를 안 믿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옆에 서 있던 고문자들이 을러댔습니다. 그러면 초죽음이 되어 배교의 말을 중얼거린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즉시 자유로운 몸으로 석방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야고보도 곤장 3대를 맞을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고문에 못 이겨 정신을 완전히 잃고 아무 의식이 없을 때 배교의 말이 나왔습니다. 고문자들은 야고보가 죽음에서 깨어나도록 약을 주고서 풀어주었습니다.48)

 

최양업은 이 서한을 통해 자신의 부모인 최경환과 이성례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같이 서울로 압송된 신자들이 배교한 이야기도 넣었다. 이 이야기를 넣은 의도 역시 다블뤼의 의도와 마찬가지로 최경환과 이성례의 순교 사실을 더 드러내기 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다블뤼 역시 이 이야기를 《순교사 비망기》에 반영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한편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3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순교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들의 유해를 수습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가하였다.

 

목자들의 시신은 사흘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모래톱에 매장되었다. 교우들이 이 귀중한 유해 수습을 지체한 것은 변장한 포졸들이 사방에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자들이 순교한 지 나흘이 지난 뒤 세 교우가 그들의 시신을 거두고자 매복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붙잡히면서 어쩔 수 없이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20여 일이 지난 뒤 7~8명의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시도한 끝에 마침내 세 순교자의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교우들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큰 궤에 담아 수도에서 30여 리 떨어진 노구산에 안장하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곳에 묻혀 있는데,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 더 적합한 장소로 이장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9)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한 과정에 대해서 기존 연구에 나온 바가 있다. 기해박해 순교자 9위와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수습한 상황을 표로 작성하여 정리하였다.50) 그런데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3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유해 수습에 대해서는 기해 · 병오박해 시복수속 증인으로 참석한 박순집과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3위 치명하신 후 3일 만에 교우들이 밤에 가만히 신체를 찾아 노구산에 장사하였다가 군난이 그친 후에 경향 교우가 다시 의논하고 이장하려 무덤을 파매 살은 다 썩고 뼈를 거두어 비단으로 싸서 한 관에 3위 해골을 같이 넣어 행상하여 시흥 뒤 관악산에 장사 지냈다는 말을 참예한 죄인의 부친과 삼촌과 형님과 다른 교우에게 들었으나 죄인은 친히 참예하지 못하고 이왕 참예한 중에 많이 죽고 죄인 알기는 김 프란치스코만 살았습니다.51)

 

3위 치명하신 후에 수직하는 군사들이 그 자리에다가 신체를 모래로 덮었거늘 며칠 후에 교우들이 밤에 가서 군호하며 신체를 파다가 노구산에 장사하였더니 그때 교우 말 들은즉 세 위 시체 썩기 시작하더라. 3, 4년 후에 교우들이 그대로 두면 잃을까 하여 노구산에 가 파내어 본즉 해골만 남은 것을 남대문 밖 노치명이 집에서 비단으로 다시 염하여 세 신체를 한 널[관]에 입관하고 행상하여 과천 관악산 남록에 장사 지낼 제 같이 참예하였습니다.52)

 

이 증언기록을 보면 기해박해 당시 신자들이 선교사들의 유해를 수습해서 노구산에 안장했다가 수년 후 관악산으로 이장했음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에는 노구산에 계속 안장되었다고 나와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다블뤼는 노구산 이장만 알고 관악산 이장 사실을 모르는 신자에게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의 증언을 한 박순집과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 유해를 노구산에 안장한 과정을 아는 신자들의 증언을 적극 활용한 것은 분명하다.

 

어린 나이에 순교한 유대철 베드로에 대해서 다블뤼는 《기해일기》에 나오지 않는 다음의 이야기를 추가 서술하였다.

 

포졸 하나가 구리로 된 그의 담뱃대를 구멍뚫이인양 베드로의 허벅지를 찔러대더니 살 조각 하나를 떼어냈다. “이래도 천주교인이 되겠느냐?” 어린 소년이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이것으로 저를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포졸은 이번에는 불타는 숯을 들어 그에게 입을 벌리라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입을 크게 벌리며 “자요!”라고 말하였고 포졸은 낙심하여 물러갔다. 다른 교우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스스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큰 형벌들에 견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밥공기에 견주면 밥알 하나일 뿐이지요.” 나중에 형벌을 받고 의식을 잃은 그를 데려왔을 때 다른 수인들이 허둥지둥 그에게 달려가자, 베드로가 맨 처음 입을 열어 한 말은 이러했다.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제가 이걸로 죽지는 않을 거예요.”53)

 

이 이야기 안에는 포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선 소년 유대철의 용기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를 다블뤼가 임의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를 넣은 의도는 어린 소년이 불타는 숯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졌다는 점을 부각시켜 신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함이라고 볼 수 있다.

 

최창흡 베드로와 손소벽 막달레나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기해일기》에는 없는 가족 관계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 부부가 슬하에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홉 명이 세례를 받은 뒤에 사망하였고, 최영이 바르바라와 두 살 된 딸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54) 순교자의 행적이나 순교 과정에 대한 추가 서술이 아닌 가족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한정되어 있다.

 

《기해일기》에 행적은 나오지만 순교 과정에 대해서 나오지 않은 손경서 안드레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가 서술하였다.

 

주교를 숨겨준 손 안드레아는 자수한 이후에 서울로 압송되어 규정에 따라 고문을 받았다. 살고 싶은 마음에 배교를 하였으나 포도대장이 교체되면서 삶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배교를 취소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두 차례에 걸쳐 70대의 치도곤을 맞은 후에 음력 11월 21일에 41세의 나이로 교살당하였다. 훌륭한 심성을 가졌으나 불행하게도 부유하여 돈으로 모든 상황을 정리하려 하였고 배교의 말을 여러 차례 내뱉는 데 주저함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배교 번복이 하느님 앞에 은총을 받은 것임을 희망한다고 덧붙인다.55)

 

여기서 다블뤼는 손경서가 포도청에 투옥된 이후에 순교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서술하였다. 손경서가 배교를 하였다가 번복하고 순교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기해일기》는 처음과 끝부분이 떨어져 나간 불완전본을 판각 인쇄한 것이었다.56) 그래서 끝부분에 해당하는 손경서에 순교 과정이 현존하는 《기해일기》에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블뤼 주교가 《기해일기》를 접했을 때는 손경서에 대한 기록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순교사 비망기》에 저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페레올이 프랑스어로 번역한 증보판에는 손경서에 대한 서술이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다블뤼가 원본을 접하고 번역 증보판에 빠진 내용을 보충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민극가 스테파노에 대한 다블뤼의 기록은 《순교자 약전》의 경우 매우 간략하게 나왔으며, 《순교사 비망기》에 더 자세히 나왔다. 《기해일기》에는 민극가의 출신 지역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순교사 비망기》에서 다블뤼는 그의 출신 지역이 인천임을 명시하였다. 또한 그가 옥중에서 배교자를 회개시킨 것을 언급하면서 그 배교자가 김절벽 도미니코와 이사령 고스마임을 언급하고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덧붙여 서술하였다.57) 이를 통해 다블뤼가 저술한 《순교사 비망기》에만 민극가의 출신 지역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58) 이와 더불어 순교자가 회개시킨 배교자가 나중에 순교하였음을 언급함으로써 그를 이끈 민극가의 훌륭함을 더욱 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다.

 

다블뤼가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기해일기》 순교자에 대해 보완 서술한 부분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동정 순교자들의 경우 이미 알려진 순교 과정보다는 동정을 지키고자 노력한 과정에 더 주목하였다. 또한 순교자들이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킨 강한 열의와 용기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리고 《기해일기》에 순교 사실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경우 다블뤼가 이를 밝혀내어 보완하였다. 끝으로 다블뤼는 최양업의 기록을 비롯하여 문헌 기록에 나오지 않지만 신자들에게 직접 들은 구술 증언을 반영하여 《기해일기》의 내용을 보완해 주었다.

 

물론 앵베르 주교를 포함한 3위 선교사들의 유해를 수습한 과정을 기록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다블뤼가 수집한 구술 자료들이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해일기》에 나와 있지 않거나 간략하게 서술한 부분을 보완하여 더 풍부한 기록을 전해 주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4. 맺음말

 

다블뤼 주교는 기해박해에 대한 인식을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순교사 비망기》를 통해 드러내었다. 박해가 조선 천주교회에 피해를 입히기는 했지만 신자들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순교가 교회 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블뤼는 기해박해 관련 순교자에 대해 서술할 때 기존에 있던 자료로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기해일기》, 페레올 주교의 프랑스어 증보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에 있는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면서 추가 자료들을 수집하고, 이를 《순교자 약전》과 《순교사 비망기》 서술에 반영하였다. 이 중에는 최양업 신부가 앞서 수집한 자료들도 포함되었다. 물론 다블뤼가 추가로 수집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렵다. 아마도 직접 들은 구술 증언을 기록한 자료로 추정한다.

 

다블뤼는 《순교자 약전》을 저술할 때는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에 대해 명단과 간략한 약력 소개만 하였다. 하지만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를 보면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에 대해 추가 서술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순교사 비망기》가 추가 서술한 부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동정 순교자들의 경우 이미 알려진 순교 과정보다는 동정을 지키고자 노력한 과정에 더 주목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순교자들이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킨 강한 열의와 용기에 대해 강조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기해일기》에 순교 사실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경우 다블뤼가 이를 밝혀내어 추가 서술한 특징도 있다. 끝으로 다블뤼는 신자들에게 직접 들은 구술 증언을 반영하여 《기해일기》의 내용을 보완하였다.

 

이렇듯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에 나온 기해박해 순교자 기록은 《기해일기》와 그 주변 자료에 바탕을 두었으나, 그와 최양업이 추가 수집한 구술 증언 자료의 비중도 적지 않았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순교사 비망기》는 기존에 나온 《기해일기》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담았다. 또한 다블뤼가 기존에 저술한 《순교자 약전》의 내용을 더 보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블뤼는 1862년에 《순교사 비망기》를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는데, 이는 1887년에 《순교자 약전》과 함께 전사되었다. 《순교사 비망기》는 1924년 시복 수속의 마지막 단계에서 로마의 가르니에 신부가 순교자 전기를 확인하기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있는 이 자료를 요청함에 따라 로마로 옮겨졌다.59) 이러한 과정을 통해 로마로 전달된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가 《기해일기》에 나온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블뤼의 《순교사 비망기》 중 기해박해 순교자에 대해서만 다루었다. 여기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순교사 비망기》는 기해박해 이전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차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다블뤼의 기록이 차후 순교자 시복시성 과정에서 주요 자료로 활용된 사항도 연구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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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은 다블뤼 주교가 시복청원을 목적으로 로마에 제출하기 위해 1858년에 파리에 제출한 자료이다. 1857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의 시복수속이 교황청에 접수됨에 따라 교황청 조사를 시작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그것이 조선에는 시복수속을 위해 순교자 명단을 제출하라는 것으로 잘못 전해진 것 같다. 이를 계기로 다블뤼 주교는 순교자 360명 중 보다 저명하고 보다 확실한 210명을 선택 기록하여 파리로 보냈다. 그중에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도 포함되어 있다(최석우,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122쪽).

 

2)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는 1862년에 다블뤼 주교가 파리로 발송한 순교자 기록이다. 앞서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서술 이후에 다블뤼 주교는 순교자 자료를 추가 수집하는 과정에서 1859년에 벽위편으로 추정되는 신유박해 관련 한문 자료를 발견하였으며, 이에 대한 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자료를 비롯하여 그가 수집한 여러 자료들을 번역하고 편집하여 발간한 책이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이다(최석우,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122~123쪽).

 

3) 최석우,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4) 홍연주, 〈기해교난 관련 자료 연구〉, 《교회사연구》 2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5) 방상근, 〈기해일기에 대한 기초적 연구〉, 《한국사학사보》 12, 한국사학사학회, 2005.

 

6) 《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170쪽

 

7)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37~38;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47년 10월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8, 69~70쪽.

 

8) 《전교회연보》는 1825년 계간지로 창간되었다. 이 정기간행물은 선교후원단체인 전교회(L'Œvre de la Propagation de la Foi)의 기관지로서 ‘전교지의 일기를 대중에게’ 제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전교회 운영회의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출판용 편지를 선정하였다. 1850년부터는 외국어 번역본도 발행하였다(김은영, 〈서양인이 읽은 조선〉, 《서양사론》 99, 한국서양사학회, 2008, 220쪽).

 

9) A-MEP, Vol. 577, ff. 831~960 ;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가 수집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회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439-491쪽 ; 수원교회사연구소(편), 《페레올 주교 서한》, 수원교구 역사총서 3, 천주교 수원교구, 2012, 656~903쪽.

 

10) A-MEP, Vol. 577, ff. 961~972 ; 〈페레올 주교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6년 11월 3일자 서한〉,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92~507쪽 ; 《페레올 주교 서한》, 388~449쪽.

 

11) 김규성,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 기록 연구〉,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43~44쪽.

 

12) A-MEP, Vol. 577, f. 971 ; 〈페레올 주교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6년 11월 3일 자 서한〉,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92~507쪽 ; 《페레올 주교 서한》, 442~445쪽.

 

13) Annales de la Propagation et Foi n° 115[1847], pp. 433~454 ; 《Annales de la Propagation et Foi : Articles sur la Corée》 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08, 235~246쪽.

 

14)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496~497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2, 478쪽.

 

15)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173 ;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테레즈 수녀에게 보낸 1857년 10월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261쪽.

 

16)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f. 176~177 ;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57년 10월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270쪽.

 

17) 김규성,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 기록 연구〉, 70~71쪽.

 

18) A-MEP, Mgr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71 ; 《조선 순교자 약전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2, 71쪽 ; 유소연(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112쪽.

 

19) 홍연주, 〈기해교난 관련 자료 연구〉, 《교회사연구》 2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87쪽.

 

20) A-MEP,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f. 181 ; 유소연(역),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1858년 10월 편지〉, 《다블뤼 주교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279쪽.

 

21) 〈다블뤼 주교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1월 7일 자 편지〉, A-MEP, Mgr Daveluy Vol. 6 Lettres à des membres de la Ste des ME, f. 6~0037.

 

22) A-MEP, Mgr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71 ; 《조선 순교자 약전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2, 71쪽 ; 유소연(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112쪽.

 

23) 홍연주, 〈기해교난 관련 자료 연구〉, 86쪽.

 

24)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361~365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353~356쪽 ;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 《앵베르 주교 서한》, 496~511쪽.

 

25)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377~381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366-369쪽 ; 수원교회사연구소(편),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 《앵베르 주교 서한》, 수원교구 역사총서 2, 천주교 수원교구, 2011, 522~525쪽.

 

26)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381~385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370~373쪽 ;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 《앵베르 주교 서한》, 532~541쪽.

 

27) 김규성,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 기록 연구〉, 70쪽.

 

28)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398~399. ff. 470~471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2, 383~384쪽, 449~451쪽 ; 유소연(역), 《신태보 옥중수기》, 흐름, 2016, 122~126쪽.

 

29) 〈다블뤼 주교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1월 7일 자 편지〉, A-MEP, Mgr Daveluy Vol. 6 Lettres à des membres de la Ste des ME, f. 6~0038.

 

30) 김수태,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 《교회사학》 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 94~95쪽.

 

31)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2, Librairie Victor Palme, 1874, p. 455(Ch. Dallet, 안응렬 · 최석우(역), 《한국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301쪽).

 

32) 홍연주, 〈기해교난 관련 자료 연구〉, 96~99쪽.

 

33) 앞의 글, 88쪽

 

34) 방상근, 〈기해일기에 대한 기초적 연구〉, 《한국사학사보》 12, 한국사학사학회, 2005, 99~100쪽 ; 최석우, 〈기해일기의 몇 가지 문제점〉,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266쪽.

 

35) A-MEP, Vol. 577, f. 960 ;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가 수집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91쪽 ; 《페레올 주교 서한》, 900~903쪽.

 

36) 최석우,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122~123쪽.

 

37) 배티 사적지(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6년 9월 13일 자 서한〉,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6, 208~213쪽.

 

38)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395-397, ff. 438~442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385쪽, 420~423쪽.

 

39) 기존 연구에서는 페레올 주교가 기해일기를 증보 번역하여 보낸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 자료에 내용이 있는 사람들은 다블뤼 주교가 순교자 약전에 상세히 서술하지 않고 명단만 작성하였을 것이라고 파악하였다(홍연주, 〈기해교난 관련 자료 연구〉, 86~87쪽).

 

40) A-MEP, Vol. 577, f. 885 ;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가 수집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62쪽 ; 《페레올 주교 서한》, 758~761쪽 ; 《긔일긔》, 34~35쪽 ; 《기해일기》, 64~66쪽.

 

41) A-MEP, Vol. 577, ff. 931~933 ;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가 수집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80-481쪽 ; 《페레올 주교 서한》, 844~847쪽 ; 《긔일긔》, 71~74쪽 ; 《기해일기》, 113~116쪽.

 

42) A-MEP, Vol. 577, ff. 956~959 ; 〈현 가롤로와 이 토마스가 수집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89~490쪽 ; 《페레올 주교 서한》, 890~899쪽.

 

43) 김규성,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 기록 연구〉, 42~43쪽.

 

44)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367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358쪽 ; 연숙진(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31, 《교회와 역사》 49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7쪽.

 

45)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369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359쪽 ; 연숙진(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31, 《교회와 역사》 49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10쪽.

 

46)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374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364쪽 ; 연숙진(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33, 《교회와 역사》 49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5쪽.

 

47)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406~407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392쪽 ; 연숙진(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39, 《교회와 역사》 500, 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11쪽.

 

48) 배티 사적지(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1년 10월 15일 자 서한〉, 《최양업 신부의 서한》, 166~167쪽.

 

49)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429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10쪽 ; 연숙진(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45, 《교회와 역사》 506, 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8쪽.

 

50) 백병근, 〈한국교회의 성인 유해 발굴에 대한 고찰〉, 《부산교회사보》 64,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31쪽.

 

51) 〈박순집 베드로의 첫 번째 증언(85회차)〉,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수원교구 역사총서 5, 천주교수원교구, 2012, 556~557쪽.

 

52) 〈김 프란치스코의 네 번째 증언(76회차)〉,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422~425쪽.

 

53)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453-454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10쪽 ; 연숙진(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51, 《교회와 역사》 51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11쪽.

 

54)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480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60쪽.

 

55)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489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70쪽.

 

56) 홍연주, 〈기해교난 관련 자료 연구〉, 83쪽.

 

57)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491-492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472~473쪽.

 

58) 김규성, 〈인천교구 관할지역 관련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 연구〉, 《누리와 말씀》 34,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3, 210쪽.

 

59) 최석우, 〈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 《한국교회사의 탐구》 Ⅲ,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16~117쪽.

 

 

참고문헌

 

1. 기초자료

 

A-MEP,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2.

 

———, Mgr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조선 순교자 약전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2.

 

———, Mgr Daveluy Vol. 6 Lettres à des membres de la Ste des ME, 내포

교회사연구소.

 

———, Mgr Daveluy Vol. 8 Lettres à sa famille après son entrée en Corée, 내포교회사연구소.

 

《A-MEP, Vol. 577 Corée 1797-1860 필사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Annales de la Propagation et Foi : Articles sur la Corée》 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08.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2, Librairie Victor Palme, 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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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및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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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레올 주교 서한》, 수원교구 역사총서 3, 천주교 수원교구, 2013.

 

——————————,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재판록》 2, 수원교구 역사총서 5, 천주교 수원교구, 2012.

 

배티 사적지(편),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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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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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33, 《교회와 역사》 49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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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45, 《교회와 역사》 506, 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51, 《교회와 역사》 51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3. 논문

 

김규성, 〈인천교구 관할지역 관련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사료 연구〉, 《누리와 말씀》 34,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3.

 

———,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 기록 연구〉,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논문, 2016.

 

김수태,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사학》 1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3.

 

김은영, 〈서양인이 읽은 조선〉, 《서양사론》 99, 한국서양사학회, 2008.

 

방상근, 〈기해일기에 대한 기초적 연구〉, 《한국사학사보》 12, 한국사학사학회, 2005.

 

백병근, 〈한국교회의 성인 유해 발굴에 대한 고찰〉, 《부산교회사보》 64, 부산교회사연구소, 2009.

 

최석우,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 〈기해일기의 몇 가지 문제점〉,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다블뤼 주교의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에 대한 검토〉, 《한국교회사의 탐구》 Ⅲ,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홍연주, 〈기해교난 관련 자료 연구〉, 《교회사연구》 2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교회사 연구 제53집, 201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규성(인천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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