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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7일 (토)부활 제4주간 토요일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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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신부님, 나와 내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을 왜 용서해야 하나요?

161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8-12-14

[박찬호 신부의 질문하는 신앙인] “신부님, 나와 내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을  왜 용서해야 하나요?”

 

 

저는 영화를 즐겨 보는 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본 영화가 꽤 많은데,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2007년 개봉된 ‘밀양’이라는 영화입니다. 소설 『벌레 이야기』를 각색하여 만든 이 영화로 배우 전도연 씨가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이 영화가 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유는 한 장면 때문입니다. 바로 유괴범에 의해 아들을 잃은 엄마 신애가 신앙의 힘으로 아픔을 이겨내고 자기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가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면회실에 평화로운 얼굴로 나와서 자신은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어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의 말을 듣고 신애는 충격을 받아 신앙을 갖기 전보다 더 큰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되지요. 원작소설에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겨버린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소설의 제목인 ‘벌레 이야기’는 이 표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참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 곧 우리에게 부당한 손해를 입히거나 정신적, 물리적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 힘들어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고해소에 앉아 신자 분들의 죄 고백을 듣다 보면 주일미사를 궐했다는 것 다음으로 많은 것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더군요. 그만큼 용서가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는 왜 이리도 힘들까요?

 

엄밀한 의미에서 용서는 절대자인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저질러진 불의를 제거하고 다시 본래의 의로움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청한다는 것은 죄인을 더 이상 죄인이 아니게끔 해달라는 요청인데, 이는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밀양’에서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나서 하느님에게만 용서를 청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용서가 된 걸까요? 아니지요. 아무리 하느님이라도 이미 명백히 일어난 죄행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선 자체이면서 동시에 진리 자체이기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는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타임머신처럼 시간을 되돌려 있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손상된 그 사람의 인격을 이전의 상태, 곧 본래의 자유로운 상태로 재창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재창조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특히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완성을 위해서는 피해에 대한 보상이나 물질적인 원상복구보다 죄로 인해 일그러진 관계의 회복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피해를 일으킨 사람이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청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으로 언급되는 이들, 예컨대 “성령을 모독하는 자”(마르 3,29)나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도 …떨어져 나간 사람들”(히브 6,4-6)은 개별적인 죄행을 저지른 사람이 아닌 삐뚤어진 행동양식에 물들어 있는 사람, 곧 용서를 청하지 않는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요구하는 단 하나의 조건인 ‘회개하고 용서를 청함’을 채울 마음이 없기에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용서를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용서를 청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는 옳게 회개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우리에게 용서받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용서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아무리 용서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러므로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서 작용할 때 용서하는 마음의 싹이 돋게 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용서가 이 세상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세상을 돌보고 가꾸도록 재창조의 중대한 사명을 주신 것과 같이, 용서의 시작과 완성은 하느님께서 하시지만, 그것을 이 세상에서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용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우선 상대방의 범죄로 인해 초래된 정신적, 물질적 피해로 고통을 받고, 또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관계가 지속되어 평화롭지 못한 삶으로 고통을 받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고통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죄를 지은 이뿐만 아니라, 그 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결국 회개와 용서는 불의를 저지른 사람에게나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에게나 죄로 인해 위축된 자유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부자유의 상황에서 벗어나 다시금 자유로워지기 위한 치유의 행위인 것입니다. 용서는 이 세상에 만연한 죄의 세력을 극복하는 가장 큰 무기이며, 용서를 통해 체험되는 하느님의 사랑은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모두를 영적으로 한층 성숙시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 박찬호 - 수원교구 소속 사제로 수원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교수이며 수원가톨릭대 부설 하상신학원 원장으로 있다.

 

[생활성서, 2018년 12월호, 박찬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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