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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공소 이야기: 전주교구 동막공소를 가다

1173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08-11

[공소 이야기] 열 번째(끝) - 전주교구 동막공소를 가다


병인박해… 한국전쟁… 고난은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었다

 

 

동막공소 신자들이 8월 1일 공소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지금도 군데군데 산자락에 숯가마가 눈길을 끄는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의 한 산기슭. 산 깊고 먹고 살기 험했던 이곳에 동막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전주교구 칠보본당 관할인 동막공소는 병인박해 때 인근 산으로 박해를 피해 숨어 들었던 교우들과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했던 교우들이 박해 후에 산에서 내려와 정착했던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이야 넉넉한 살림에 따뜻한 정이 오가는 산골마을이 됐지만, 박해와 전쟁의 와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서 수없이 죽어나갔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오늘은 잔치날

 

폭염을 뚫고 찾아간 동막마을, 약간 비스듬한 언덕을 거슬러 오르니 한눈에 보기에도 단박 공소임을 알 수 있는 소박하지만 정갈한 공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자리잡은 동막경로당 앞에는 공소 교우분들이 벌써 십여 명이 넘게 모여 있었다. 게다가 그 불볕 더위에 장작을 때며 무언가를 삶고 있었다. 마침 멧돼지 한 마리가 올무에 잡혀 마을 잔치를 하고 있었다. 이웃 마을의 친구와 친지도 여럿 불러둔 상태였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공소회장 이중호(요한 크리소스토모·78) 어르신이 “아, 기자 양반 오시니 돼지 한 마리 잡았지!” 하시며 농을 했다. 허언이라 해도 고마운 말이지만, 낯선 이를 그리 진심으로 한껏 반기는 모습을 보니 농담만도 아닌 듯했다. 어쨌든 여유와 시간이 허락되면 흥겨운 마을 잔치가 종종 마련되기는 하는 듯했다. 

 

부엌에서 능숙한 칼질로 돼지 수육을 나누던 최귀임(골롬바·73)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한 가족이니, 먹을 것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나누는 자리가 많다”며 취재는 뒷전으로 배 채우기를 채근한다. 넉넉한 시골 인심을 감사하며 공소의 역사를 억지로 캐물었다. 

 

이중호 공소회장(상단 맨 왼쪽)과 교우들이 8월 1일 불볕더위에도 장작을 때며 마을 잔치 준비를 하고 있다.

 

 

동막공소의 역사

 

동막의 역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몸을 피했던 교우들이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한 뒤,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형성하면서 시작됐다. 처음 신자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이 1886년경이다. 이후 꾸준하게 교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원래 당시 사람들이 자리잡았던 곳은 지금 공소 위치에서 약 1.5㎞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던 중 1897년 동막공소가 설립됐고, 이후 매년 봄, 가을에 본당 신부가 공소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하지만 현 위치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였고 마을 전체가 교우들로 구성된 신앙촌을 크게 이루게 됐다. 현재 공소에는 25가구가 살고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만 해도 45가구에 달할 정도로 마을 규모가 지금보다도 더 컸다. 이미 그 전부터 교우들은 별로 먹을 것도 없던 산 속에서 칡뿌리를 찧어 쑥과 풀잎 등을 섞어 개떡을 만들어 먹었다. 서숙이나 수수, 옥수수, 담배 농사를 주로 했고, 산전을 개간해 다락논을 만들어 짜투리 땅도 알뜰하게 썼다. 

 

지금이야 웃으며 하는 옛날 이야기들이지만 박해, 그 모진 서슬을 피해 달아난 뒤 만난 굶주림, 간신히 먹고 살만하니 당해야 했던 전란…. 그 난리통에 친지와 가족들이 엄청 상했다.

 

 

한 형제 한 가족

 

수육 한 점을 입에 넣던 이중호 공소회장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낀다. “참 애 많이 쓰셨겠어요!”라며 교우촌 당시 상황을 묻는 기자 질문에 답하던 순간이었다. 이 회장은 “많이 죽었지요. 굶어 죽었고, 더워서 죽고 추워서 죽고….”라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 회장은 나이 어린 9살. 어린 마음에도 마을 사람들의 고생과 고통이 생생했다. “여기가 노령산맥 자락이고 산세가 깊고 험해요. 전쟁 후에도 빨치산들이 들고 나면서 먹을 것을 약탈해 가곤 했어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그 고난 속에서 교우들 간의 형제애는 한없이 깊어졌다. 원래 일가친척들이 대부분이기도 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 생과 사의 갈림길을 함께했기에 동막공소 신앙 공동체는 말 그대로 한 형제요 한 가족이다. 출애굽의 이스라엘처럼, 고난과 고통은 오히려 이들을 주님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만을 따르도록 이끌었다. 

 

1897년 공소 설립은 됐지만 공소 건물이 없어 신자들 집을 교대로 돌며 공소예절을 했다. 그러던 중 1957년 당시 부회장이었던 김재열(안토니오)씨가 백미 1가마를 주고 대지 50평을 매입, 공소 건물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 목수였던 교우들이 발벗고 나서 수 개월 후인 6월에 누추하나마 공소 건물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1986년 흙집이었던 건물을 헐고 모든 교우들이 합심해 기금을 모아 벽돌집을 다시 세웠다.

 

1986년 5월 2일 거행된 동막공소 봉헌식. 흙집이던 공소 건물을 헐고 벽돌로 새로 공소 건물을 지었다.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기도, 뜨겁고 뿌리깊은 신앙

 

새 집을 지은 다음해,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2개팀이 창단됐다. 동막공소는 마을 전체가 빠짐없이 교우들이었기에 전교 활동은 애당초 별 의미가 없었다. 레지오 활동은 전교보다는 기도를 통해서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친교와 봉사, 희생 정신을 더욱 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막공소에는 성체가 모셔져 있다. 다른 한 분과 함께 매일 교대로 한 시간씩 2시간 성체조배를 한다는 최귀임 할머니는 “나이 먹어서 기도밖에 더 하겠어요?”라며 웃는다. 할머니를 따라 공소 안으로 들어가니 성체가 모셔진 감실 앞에 꽃무늬 방석이 있고, 성경과 초가 얌전히 놓여져 있다. 

 

꽤 젊은 축에 끼는 김용(베드로·64)씨는 “어르신들 기도가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라며 혀를 내두른다. 매일 성체조배를 하는 두 분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공소 신자들이 틈나고 짬나면 공소를 찾아와 기도를 한다. 특별히 맘 먹고 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그게 그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거의 연중으로 9일기도가 이어지는데,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도 9일 기도를 바치고 또 바친다. 

 

대부분 공소들이 고령화돼 향후 10년 사이에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지만, 동막공소는 그런 걱정에서 꽤 비켜나 있는 듯하다. 현재 살고 있는 25가구 중 10여 가구의 연령대가 40대와 50대에 속한다. 물론 경제적으로 다소간 안정돼 있는 점이 외지로 나간 후손들을 다시 끌어들이는 이유도 된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뿌리깊은 신앙, 그리고 그 신앙에 바탕을 둔 삶의 방식, 서로를 뜨겁게 이어주는 형제애와 공동체 정신이 가장 큰 이유인 듯했다. 

 

먹을거리와 옷차림, 하루의 일상들이 옛날과는 달라 보이지만 형제애와 깊은 신앙심으로 형성된 공소 공동체의 원형이 동막공소에는 옛날처럼 지금도 한치도 다름없이 살아 있는 듯했다.

 

[가톨릭신문, 2019년 8월 11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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