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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교부들의 신앙: 니사의 그레고리오 - 선행

59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0-09-19

[교부들의 신앙 – 니사의 그레고리오] 선행

 

 

현대 사회 종교의 위상

 

‘종교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라는 오래된 물음을 제기한 어느 종교학자의 칼럼을 얼마 전 읽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드러난,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가진 부정적인 단면을 알려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것이 글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코로나19의 확산에 종교(신천지)가 숙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극우 개신교 단체의 집회와 현장 예배 강행은 사회의 위기를 자조하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종교의 위상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칭송받는 이스라엘의 유발 하라리 교수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실험실의 괴짜 몇 명이면 된다. 과거에 죽음이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일이었다면 지금은 공학자들이 그 권한을 인수받았다.”(「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김영사, 2017, 42쪽)라며, ‘신이 된 인간’(Homo Deus, 106쪽 참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기성 종교에 대한 무용론과 더불어 본체론적 위기를 맞은 것이 오늘날 종교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과연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은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온 천지에 ‘빨간 십자가’와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도배된 준(准)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밖에 없다.’는 독일의 현대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년, 「안티크리스트」 참조)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천과 행동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이 사회에 다시금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선행 - 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1권(De beneficentia - Vulgo de pauperibus amandis, I, 이하 「선행」 표기)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에 놓인 이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레고리오가 촉구한 실천

 

그리스도인들은 철학과 사색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악의 유혹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공연하게 악습에 빠진 채 술과 고기만을 멀리하고 물과 야채를 먹는 시늉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언컨대 겉으로 드러난 여러분의 금욕적인 행위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겉과 속은 같아야 합니다.

 

집도 없이 헐벗은 채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근래에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대부분 전쟁의 희생자입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입니다. 곳곳에서 손을 내밀며 구걸하는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하늘을 지붕 삼아 주랑과 골목과 모퉁이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올빼미처럼 벽의 틈새에 숨어 지내며, 형편없는 누더기를 걸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연민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식사라고는 사람들이 던져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마시는 샘이 그들의 식수원입니다.

 

잔은 그들의 손바닥이며, 그들의 창고는 아무것도 넣을 수 없는 찢어진 주머니가 전부입니다. 무릎이 그들의 식탁이며, 태양은 식탁을 밝혀 주는 전등입니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대자연의 산물인 강과 연못이 그들의 공중목욕탕입니다. 이 잔인하고 방랑하는 그들의 삶은 날 때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과 시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불행한 여러분의 형제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단식을 통해 아낀 것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여러분과 그들 사이에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의 배부름과 형제의 굶주림이라는 내적 갈등을 스스로 이겨 냄으로써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만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놓인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과 선행을 통해 그들에게 빛과 식탁을 마련하고 포근한 쉼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애정 어린 말로 위로하고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한 선행은 결국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줄 것입니다. 선행은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부자들의 스승이요, 좋은 간호사이자, 노인 요양 보호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들의 보물이며, 불행한 사람들의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선행은 아품을 지닌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와 선행을 원하십니다. 자비와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선하고 거룩하게 되고, 모든 지성을 뛰어넘어 한처음의 순결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신성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행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구구절절 우리에게 창조주이시자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닮도록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기쁨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차지하고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쾌락을 누리는 데에 돈을 쓰고,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 부를 축적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과 어려운 이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지금까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천상의 진리를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지성과 이성을 지닌 여러분은 선행을 통해서, 현세적인 데 현혹되지 말고, 썩어 없어질 허망한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절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쓰는 대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선행」 참조).

 

 

사랑의 선행으로 전하는 복음

 

코로나19와 경제적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말씀을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옵니다. 비록 종교에 대한 회의와 무용론이 대두되는 지금이지만,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는 예수님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만큼은 먼저 나서는 선행으로써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영생을 얻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 곧 복음 선포일 것입니다.

 

※ 「선행」의 현대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Susan R. Holman, The Hungry Are Dying : Beggars and Bishops in Roman Cappadocia, Oxford, 2001, 193-199쪽(영어); Piero Gribaudi, Servire I poveri gioiosamente, Torino, 1971, 109-124쪽(이탈리아어).

 

* 김현 안셀모 – 부산교구 신부로 언양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교 아우구스티노 교부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사목 단상을 담은 수필집 「나그네 생각」을 썼으며, 역서로 「그리스도교 신앙 원천 5, 브라가의 마르티누스」가 있다.

 

[경향잡지, 2020년 8월호, 김현 안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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