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 교회사에도 나오는 거 알고 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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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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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쉼터] 커피, 교회사에도 나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신앙 선조도 못 끊은 '악마의 음료'... 검은 향기로 교감해 볼까요
한국인은 한 해 평균 416잔의 커피를 마신다. 이는 세계 평균 150잔의 약 2.8배에 달하는 수치다(2024년 유로모니터 기준). 이처럼 커피는 한국인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이 커피에도 교회와 얽힌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교회사 속 커피 이야기를 만나 보자.
‘악마의 음료’, 축복을 받다?
커피라고 하면 이탈리아, 프랑스처럼 그리스도교 문화가 깊이 자리 잡은 나라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16세기 무렵, 유럽의 신자들 사이에서 커피는 ‘악마의 음료’로 불릴 만큼 거부감을 주는 음료였다.
당시 커피를 즐기던 이들은 중동의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이었다.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유럽과 지중해로 진출해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까지 침공하는 등 잦은 전쟁을 벌였다. 유럽인들에게 커피는 이교도이자 적국의 음료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 ‘악마의 음료’가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 바로 클레멘스 8세 교황(1535~1605)이다. 당시 신자들은 교황에게 커피를 금지해 달라고 청원했고, 교황은 커피가 유해한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마셔보았다. 그는 커피를 맛본 뒤 금지는커녕 오히려 그 풍미를 극찬하며, 커피에 축복을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커피는 교황의 손을 거쳐 악마의 음료가 아닌 축복받은 음료가 되었다.
교회와 커피에 관한 이야기에서 카푸친 작은형제회 복자 마르코 아비아노(Marco d’Aviano, 1631~1699)도 빼놓을 수 없다. 이탈리아 북부 아비아노 출신인 그는 오히려 오스트리아 빈에서 더 크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1693년 오스만제국이 두 달 동안 빈을 포위했을 때, 빈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그가 해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내분과 경쟁으로 연합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복자는 설득과 설교로 그들을 하나로 모아 ‘신성 연맹’을 결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설교와 기도는 연합군의 사기를 높였고, 결국 오스만제국군을 물리치며 빈을 지켜낼 수 있었다.
당시 전장에서 오스만군이 남기고 간 진한 커피에 복자가 따뜻한 우유와 꿀을 섞어 마셨고, 이것이 오늘날 ‘카푸치노’의 기원이 됐다고 전해진다. 카푸치노라는 이름은 그가 속한 수도회 카푸친에서 비롯됐다.
물론 이는 역사라기보다는 전승이나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러나 중동에서 유입된 커피에 처음엔 거부감을 가졌던 교회가 점차 커피와 가까워지게 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이기도 하다.
‘복음은 커피를 타고’
커피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전해졌을 뿐 아니라, 이후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의 여정에도 함께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오늘날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콜롬비아 커피다.
콜롬비아 커피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18세기 예수회 소속 호세 구미야 신부가 남긴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선교지의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생계를 고려하며 커피 재배를 시험했고, 이 작물이 현지에서 잘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본격적인 커피 재배도 교회의 복음화와 함께 확산되었다. 특히 19세기, 살라사르 데 라스 팔마스본당에서 사목하던 로메로 신부는 ‘커피나무 심기’를 고해성사 보속으로 줄 정도로 재배를 적극 권장했다. 이후 커피는 곧 신자들의 생계를 돕는 중요한 작물이 되었고, 이 지역은 콜롬비아 커피 재배의 요람이 됐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전래된 가장 이른 기록 또한 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1860년 3월 6일, 성 베르뇌 주교는 리브와 신부에게 선교에 필요한 물품 목록을 요청하며 그중 하나로 커피 40리브르(약 18.14kg)를 포함시켰다. 이듬해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를 통해 커피를 전달받은 그는, 편지를 통해 “커피 덕분에 여름을 예전보다 훨씬 잘 보낼 수 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베르뇌 주교는 이후에도 1861년, 1863년, 1865년에 걸쳐 커피를 지속적으로 청했고, 누적량은 약 130kg에 달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데 약 4g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총 3만2500잔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커피의 희소성으로 인해 두세 번씩 우려 마셨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결코 혼자 마시기는 어려운 양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면, 베르뇌 주교가 커피를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선교의 일환으로 활용했을 가능성도 짐작해볼 수 있다. 신자들과 둘러앉아 커피향을 음미하는 목자의 모습도 결코 허황된 상상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고종 황제가 커피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약 30년 뒤다. 조선교회 신자들은 이미 그 이전에 베르뇌 주교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보다 전,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교육을 받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 역시 커피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혹독한 박해 속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 선교 현장에도, 은은한 커피 향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6년 2월 8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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