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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2) 5·18 광주 민주화운동 (상)

196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1-05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2) 5·18 광주 민주화운동 (상)


국민 향해 마구 휘두른 비상계엄의 칼날… 그날의 진실은 묻혔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의 억압적 통치가 이어지면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1980년에 접어들어 다시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계엄 철폐’와 ‘전두환 퇴진’의 목소리가 거리를 휩쓸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1980년 5월 6일부터 9일까지 춘계 주교회의를 열고 시국 담화문을 발표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하루속히 민주정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신군부는 민주화의 요구를 국가 안보를 해치고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짓밟힌 일상과 시민군

 

1980년의 봄은 잔인했습니다. 5월 18일 아침, 광주의 거리는 아비규환으로 변했습니다. 공수부대가 국민을 향해 곤봉과 대검을 휘둘렀습니다. 자식과 이웃이 짐승처럼 사냥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광주 시민들의 가슴속에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교구청 창문을 통해 이를 지켜보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공포에 떨며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진압이 아니다. 사냥이다. 인간 사냥이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들에게 저토록 잔인한 마음을 주셨나이까.”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계엄군은 조준 사격을 가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광주 시내 본당의 신부들은 거리에 나뒹구는 시신을 수습하며 군인들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쏘지 마시오! 제발 쏘지 마시오! 이들은 당신들의 형제요, 누이입니다!” 총성은 멈추지 않았고,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무기고를 열어 ‘시민군’이 되었습니다.

 

 

고립된 섬, 사제들의 '죽음의 행진'

 

광주는 고립된 섬이 되었으나, 주먹밥과 헌혈로 서로를 살리는 ‘절대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23일 오후 2시, 남동성당에 민주인사들이 모여 수습위원회를 꾸리고 계엄사령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했습니다. 답은 없었습니다.

 

26일 새벽, 계엄군의 전차가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와 조철현(비오) 신부 등은 수습대책위원회, 수백 명의 시민들과 함께 전차 앞으로 ‘죽음의 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시민을 살상했기 때문이오. 무력 진압을 멈추고 사죄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광주는 피바다가 될 것이오.” 다행스럽게도 전차가 물러났습니다.

 

그날 밤, 다시 전차 진입이 임박하자 도청에 남은 시민군과 학생들은 사제들을 억지로 내보냈습니다. “신부님, 저희는 여기서 죽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들은 살아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가 폭도가 아니었다고, 끝까지 광주를 지켰다고 증언해 주십시오.”(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가 사제들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

 

 

광주의 진실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던 젊은 영혼들은 차가운 바닥에서 산화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침묵의 시간…. 6월 2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첫 번째 공식 성명서 <광주 사태에 대한 진상과 우리의 견해>를 발표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언합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무력을 남용한 당국에 있으며,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던 의로운 시민들이었습니다.”(1980년 6월 2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성명서 발췌) 이 성명서는 복사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광주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진실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진실이 가려진 보도

 

광주 시민들이 민족의 십자가를 져야 했던 비극의 시대, 당시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이 교회는 광주와 광주대교구의 참담한 비극에 예언자적 발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신문 역시,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신문(1980년 4월 1일자부터 ‘가톨릭시보’에서 ‘가톨릭신문’으로 제호 변경)에 광주의 비극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6월 1일자부터였습니다.

 

그날 가톨릭신문 1면에 ‘광주 사태’에 관한 기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여기에서는 5월 23일 긴급 소집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거쳐 발표된 특별기도 요청 서한을 ‘형제적 화해(和解) 기반 마련해야’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로 전했습니다.

 

“한 핏줄 한 형제, 유혈 충돌만은 말아야 - 광주사태와 관련, CCK 회의실에서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인간적 충돌은 저지돼야 한다’고 천명,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자’고 촉구했다.”(가톨릭신문 1980년 6월 1일자 1면)

 

- 가톨릭신문 1980년 6월 1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강요된 침묵, 구호와 모금 활동만 전해져

 

같은 날 신문에는 ‘광주 성직·수도자 전원 무사’, ‘김재덕 김남수 주교 광주 방문 실패’, ‘전주 사제단 광주 희생자 위로 미사’, ‘전국 각 교구장 각 본당에 신자들 기도 당부 서한 보내’, ‘서정길 대주교 담화문 발표, 구호금품 모집 등 호소’ 등이 보도돼 행간에 숨은 긴박함을 엿보게 했습니다.

 

주교회의 상임위는 23일 서한 발표 후, 27일 긴급회의를 열고 6월 1일 주일에 광주 지역 복구를 위한 모금 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각 본당에서는 25일 주일 미사 때 서한문을 낭독하고 기도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어 대구대교구 이문희(바울로) 주교, 안동교구장 두봉(레나도)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아우구스티노) 주교와 성 베네딕도회 수련장 진 토마스 신부 등이 29일과 30일 광주대교구청을 방문했습니다.

 

전국에서는 헌혈 운동, 성금 모금 등을 전개하고 유족들에게 성금을 전달했습니다. 이후 가톨릭신문은 지속적으로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구호금품 모집과 전달, 오태순(토마스)·장덕필(니콜라오) 신부 등 7명이 광주 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계엄사령부에 연행된 사실 등과 관련한 후속 기사를 보도했고 6월 8일자에는 사설 ‘광주민에 마음의 구호를’을 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주의 본질에 대한 평가나 정확한 사실 보도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광주에 대한 소식은 언론 보도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7월 6일자 가톨릭신문에 보도된,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아 발표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담화문 기사에서도 사태의 본질에 대해서는 관련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광주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강요된 침묵과 절망으로 묻혀갔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듬해인 1981년 3월 3일 취임식을 가졌습니다. 온 나라가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특히 불의하게 가려진 진실은 하느님과 역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었습니다. 그 예언자적 소명을 한국교회는 길고 지루하지만, 끊임없이 이어갔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1월 4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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