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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24: 분노하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974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2-16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24) 분노하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올바른 이성이 내린 정의로운 판단 따르는 분노는 ‘선’하다

 

 

요즘 뉴스에서는 ‘분노’로 인한 이해하기 힘든 범죄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분노에 차 흉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칼부림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이웃에 대한 분노가 살인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사태들을 보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거나, ‘분노는 하나의 결점이기 때문에 덕스러운 삶에 기여할 수 없다’는 일부 윤리학자들의 판단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크게 주목받았던 드라마 <글로리>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찾아가 하나씩 복수할 때 많은 이가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분노는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것인가, 아니면 행복을 위해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언제나 선한가, 아니면 때때로 선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에 관한 이론은 이런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어느 정도로 분노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발견된다.

 

-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정화할 때 분노하셨다.(마태 21,12-13 참조) 이런 분노는 상처받은 감정에서가 아니라, 정의와 경건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러나 복수 그 자체를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많은 악습과 죄를 낳는다. 엘 그레코 <성전을 정화하시는 그리스도>

 

 

선과 악을 모두 지향하는 분노의 원인

 

토마스는 분노를 ‘복수에 대한 욕구(ira est appetitus vindictae)’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분노는 사소한 일보다는 ‘중차대한 것’에서, 곧 어렵고 심각한 악을 경험할 때 일어난다. 분노는 자신이 겪은 상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이며, 그 안에는 욕망하고 희망하고 향유했던 선을 옹호하려 하고, 동시에 공격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그 악이 갚아 지기를 바라는 이중의 목표가 함께 들어 있다.(I-II,46,2) 그래서 토마스는 “분노는 겪은 고통에서 생겨나고 복수에 이르며 즐김으로 끝난다”(I,81,2)고 말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분노의 원인은 언제나 ‘분노하는 사람을 거슬러 행해진 어떤 악’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거슬러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다면, 또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특히 ‘마땅히 있어야 할 존중의 결핍’, 즉 경멸(parvipensio)이 분노를 크게 자극한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이 모멸감을 더 크게 느끼고, 반대로 아주 낮은 사람에게서 모욕을 당할 때 분노가 더욱 격렬해지기도 한다.(I-II,47,4) 예컨대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감정이 크게 폭발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도 ‘부당한 모멸감’을 당할 때, 얼마든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다.

 

 

분노와 이성 - 동반과 방해

 

흔히 분노를 ‘이성을 잃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토마스의 관점은 더 세밀하다. 제대로 보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정이 폭발하기보다 당한 악과 겪게 될 벌을 저울질하는 정확한 비교와 추론이 전제돼야 한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분노는 언제나 이성을 동반한다”고 말한다.(I-II,46,4)

 

그러나 분노가 이성을 동반한다고 해서, 분노가 항상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토마스는 “분노는 다른 정념들보다 더 명백하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한다”(I-II,48,3)고 말한다. 분노는 각자의 기질에 따라 다양하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몸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에, 불(火)에 비교할 수 있다. 분노가 심해지면 피가 끓어오르고, 심장이 빨라지며, 심지어 혀의 움직임까지 방해해서 말을 더듬게 하거나 말문을 막히게 만들 수 있다.(I-II,48,2) 이런 신체적·정신적 동요 때문에 분노는 깊은 사유와 관상, 차분한 판단을 크게 어렵게 만든다.

 

 

정당한 분노와 죄가 되는 분노

 

그런데 토마스는 분노를 무조건 죄로 보지 않는다. 분노는 정의로울 수도 있고 불의할 수도 있다. 오히려 어떤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원하기 때문에, 분노는 불의(iniustitia)보다는 정의(iustitia)에 더 가까운 셈이다.(I-II,46,7) 분노가 이성의 적절한 통제 하에서 일어나 ‘정당한 복수’일 경우, 그것은 정의라는 덕의 발로로 여겨진다.

 

반대로, 분노가 무질서한 복수를 지향할 때 - 법적 질서를 벗어나 사적인 방식으로 응징하려 하거나, 죄를 없애기보다 죄인 자체를 파괴하고 절멸시키려 할 때 - 그것은 죄가 된다. 이런 문제 때문에 토마스는 분노를 칠죄종(七罪宗, 추요죄) 가운데 하나로 보면서, 분노에서 말다툼, 고성, 저주, 폭력 등 여러 악습이 흘러나온다고 분석한다. 분노는 정당하게 다루어질 때 정의를 위해 타오르는 불이 되지만, 방치될 때는 많은 죄악을 낳는 ‘악습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불의를 보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도 하나의 악습으로 본다. 그는 정당한 원인에 대해서 그 느낌에 상응하는 움직임의 부재, 곧 처벌하려는 의지의 결핍을 분노의 결핍이라는 악습으로 설명한다. 즉 분노해야 할 자리에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 불의 앞에서 무감각한 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토마스는 증오(odium)가 분노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한다. 증오는 악을 그 자체로서 원하지만, 분노는 ‘정당한 복수라는 선’으로 악을 원하기 때문이다.(I-II,46,6) 분노하는 사람은 적어도 정의의 이름을 내세우고, 그에게 내리는 벌이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선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반면 증오는 상대에게 그 어떤 선도 바라지 않고 악을 그 자체로 원하므로, 분노보다 훨씬 사악한 정념이다.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는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분노’를 인정한다. 이성에 앞서 선행하여 이성을 어지럽히는 분노는 악하지만, 이성이 내린 정의로운 판단을 따른 후속하는 분노는 선하며 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노는 교회의 선익, 사회 정의, 약자의 보호를 위한 투쟁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정화할 때 분노하셨다.(마태 21,12-13 참조) 이런 분노는 상처받은 감정에서가 아니라, 정의와 경건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정의와 사랑을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덕의 도우미가 된다. 그러나 복수 그 자체를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칠죄종으로서 많은 악습과 죄를 낳는다. 신앙인은 분노를 부정하거나 억누르기만 하기보다 자기 안의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정의 감각과 어떤 상처에서 나오는지 살피면서, 그것을 정의와 사랑을 위한 힘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가톨릭신문, 2025년 12월 14일,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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