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11)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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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0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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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11) “모순(矛盾)”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矛盾)’ 투성이 입니다. 우리 마음이 향하는 곳과 현실에서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어쩌면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모든 것이 모순입니다. 두 개의 양극단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죽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하고, 얻으려면 내어놓고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여정은 언제나 갈림길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알면서도 행하고,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길을 걸어갑니다. 또한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주 미약한 한 줄기의 빛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작은 말 한마디에 위로를 느낍니다. 그렇게 모순의 삶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의 여정에서도 그런 모순의 삶과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은 모순이라는 삶을 통해서 새로움을 깨닫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시작도 ‘죽음이라는 절망 안에서 부활이라는 희망으로’ 나아갑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사도들(사도 1,12-14 참조)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이유는 ‘절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로 떠나가셨습니다(사도 1,6-11 참조). 유다인들은 혈안이 되어 그들을 찾아 죽이려고 합니다.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해야 할지 그들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실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하신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참조)라는 말씀을 까맣게 잊고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절망’을 루카 복음사가는 ‘침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들에게 내리자 이들은 그 절망에서 용기와 희망을 찾습니다. 완전히 변화되고 새로워져 ‘절망의 침묵’은 ‘희망의 선포’로 바뀝니다. 이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새로운 그리스도 공동체가 탄생하게 됩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 두려움과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사랑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 용기와 생명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 교회를 이룹니다.
성령께서는 순례하는 교회의 삶 안에 항구히 현존하심으로써 희망의 빛으로 믿는 모든 이를 밝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우리 삶을 지탱하고 활력을 주는 그 희망의 불이 타오르도록 지켜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여기에서 우리는, 이 희망이 시련 가운데에서도 꺾이지 않는 이유를 봅니다. 곧, 믿음에 토대를 두고 애덕으로 길러지는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3항>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삶,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삶
‘우리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매일 체험하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일생에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인가요? 아니면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의 은사를 통해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특별한 시기나 장소에서, 특정한 행위와 전례에 참석해야만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일을 시작하면서 바치는 기도’는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시작할 때 언제나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 언제나 잘 되고 성공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낯섦, 자신에게 닥쳐올 어려움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실패와 좌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행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언제나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기를, 그리고 나의 능력과 더불어 성령께서 보호(보호자 성령, 파라클레토스)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흘려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위로받기도 하고, 지루했던 신부님의 강론에서 삶의 해답을 찾기도 합니다. 드라마의 한 대사에 우리는 눈물 흘리고 같이 아파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무심히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또다시 걸어갈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몸에 밴 악습과 잊고 있던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매일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시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매일 수 없이 긋는 성호경을 통해서, 때론 습관적으로 참례하는 미사 전례를 통해서, 의무감에서 읽어가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하고, 다시 걷게 하는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성령을 느끼고 바라보고, 그 은총과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모순이 가득한 삶에서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선택도, 반대 방향에서 돌아서는 용기도, 언제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순간임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성모님의 군단, 2025년 11월호, 최종훈 토마스 신부(가톨릭목포성지 담당, 광주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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