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7)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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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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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7)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인간 기본권 지키기 위해... 깊은 침묵 떨치고 사회정의 외치다
1974년 7월 6일,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전격적으로 연행·구속된 사건은, 역설적으로 한국교회가 본격적인 사회 참여에 나서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로 이어지는 민주화와 사회정의 구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바야흐로 교회가 세상 한복판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 주교의 구속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교회 내 움직임이 ‘정의구현사제단’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 지학순 주교 구속 후 결성된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후 한국교회의 민주화 운동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1991년 8월 16일 임진각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91통일염원미사」를 봉헌하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공의회가 가르친 사회참여
한국교회가 이처럼 민족적 고통에 참여하고 교회 쇄신과 사회 참여에 몸담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에 크게 기인합니다. 시대의 징표에 민감할 것을 요청한 공의회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촉구하며 사회교리에 근거한 체계적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인간 기본권의 보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우리 사회의 시대적 아픔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많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발단이 된 것이 1968년 초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었습니다. 노사 분규에 관여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자, 주교단은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해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했습니다. 이후 교회의 사목적 관심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고도성장 위주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초래된 사회 문제 해결에 집중됐습니다. 이에 따라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이 강화됐고, 1966년에는 가톨릭농민회가 조직됐으며, 1970년에는 주교회의 산하 공식 기구로 정의평화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지학순 주교 구속, 민주화 운동 촉발
한국교회는 1960년대 말부터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 깊은 우려와 관심을 보여왔는데, 교회가 본격적으로 불의한 정치 구조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바로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입니다. 고위 성직자의 구속에 대한 범 교회적 대응은, 그 과정에서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과 사회정의 구현의 요구로 발전했습니다.
지 주교는 일단 석방됐지만 7월 23일, 비상군법회의 소환을 거부하고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다시 연행된 지 주교는 결국 8월 12일 재판에서 징역 1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지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국 기도회가 연이어 열렸습니다. 초유의 사태 앞에서 기도회 때마다 대책을 숙의하던 사제들은 8월 26일, 인천교구 사제단 주최로 답동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기도하는 전국 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첫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사제들은 성명에서 지 주교의 양심선언을 지지하고, 민주주의와 인간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기도회를 계속할 것을 천명했습니다.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 34명은 8월 29일 명동성당 사제관에서 열린 회합에서 주교단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예언자적 소명에 따라 현실 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사제들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9월 11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이름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인간 기본권 회복 염원 - 조국과 정의와 민주회복, 옥중의 지 주교와 고통 받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회가 11일 오후 7시 명동대성당에서 열렸다. 200여 명의 신부들과 500여 명의 수도자를 비롯, 15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여한 이날 기도회는 예기치 못했던 지학순 주교의 옥중 메시지 공표와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의문 발표로 그 절정에 달했다.”(가톨릭시보 1974년 9월 22일자 1면)
전국 각 교구에서 참석한 사제 300여 명은 9월 23일 원주에서 회합을 갖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을 결의했습니다. 당시 한국인 사제가 639명, 외국인 사제가 285명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사제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제가 뜻을 함께했던 셈입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순교자 찬미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뒤 사제 40여 명과 수도자 300여 명, 평신도 200여 명이 가두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날 시위는 사제들이 주도한 최초의 가두 시위였으며, 훗날 ‘촛불 집회’로 이어질 평화적 시위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날 사제들은 제1차 시국 선언을 발표,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하고 수호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때부터 정의구현사제단은 지속적으로 시국 기도회를 열어 우리 사회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정의 실현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의 이러한 사회적 실천은 독재 정권과의 긴장과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 ‘인간 기본권 회복 염원’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가톨릭시보 1974년 9월 22일자 1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사제들의 시국선언
사제단은 11월 6일에는 제2차 시국 선언을 발표, “정부는 시민의 개인적 자유와 공공적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부정부패로 공동선을 위하기는커녕 소수 특권층의 사리만을 위해서 공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11월 20일에는 제3차 시국 선언 ‘사회정의 실천선언’을 발표, 종교인이 사회 참여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사제단은 선언에서 “인간에게 희망과 이상을 제시한 하느님의 나라는 다가올 내세만이 아니고 인간화되고 그 구조와 면모가 일신된 현세까지를 포함한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와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행동으로 선포할 때 그것이 정치적 여파를 몰고 오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일 뿐 아니라 행동이 복음에 입각한 것임을 입증한다. …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구실로 가난을 제거하고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자기모순이며 배신임을 확신한다.”(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3차 시국 선언 ‘사회정의 실천선언’, 1974년 11월 20일)
지학순 주교의 구속과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은 한국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을 자신의 선교정책 안으로 통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는 곧 일제의 부역이라는 부끄러운 혐의를 받아온 교회가 인간의 기본권 수호라는 시대적 요청을 간파하고, 깊은 고뇌 속에서 민족과 민중의 고통 속으로 과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커다란 전환점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긴장과 갈등도 없지 않았습니다. ‘정교분리’라는 해묵은 이념 속에서, 교회 구성원의 사회 참여를 종교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습니다. 그리고 그 오랜 논쟁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11월 16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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