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자료실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홍) 2025년 10월 17일 (금)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신학자료

sub_menu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3) 시국 보도로 회수 조치, 가톨릭시보의 시련

1905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10-08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3) '시국 보도로 회수 조치' 가톨릭시보의 시련


언론 틀어막은 정권… 정의 실현 외친 한국교회 가시밭길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나라와 민족의 고난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폭압적 통치를 강화하는 정권과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발로가 1968년 강화 심도직물 사건이었습니다.

 

공의회 후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시국 문제에 대해 자기 입장을 표명한 이 사건 이후, 교회는 독재와 부정부패, 불의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개혁을 향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갔습니다. 정부가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불만을 표시하고 정책적 억압을 강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의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 보도와 메시지 전문이 실렸던 가톨릭시보 1972년 8월 13일자 지면. 안타깝게도 이 신문은 정부 당국의 강제로 독자들에게 배포되지 못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뜬금없는 ‘예수 수난기’

 

급기야 교회와 정부의 대립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사태가 1972년 8월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가톨릭시보가 있었습니다. 독자들이 받아 본 가톨릭시보 8월 13일자 1면은 얼핏 뜬금없는 예수 수난기가 실렸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처형되다”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는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로 시작됐습니다.

 

이 수난기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친 뒤 고통스럽게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기까지 모습을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난기 형식의 톱기사 옆에는 “김추기경 시국관 밝혀”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광복절을 기해 지난 9일 오전 9시40분 CCK서 기자회견을 갖고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에 따른 교회 입장을 밝히는 6000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주교회의, 비상사태와 보위법 철회 요구

 

예수 수난기가 실린 8월 13일자 가톨릭시보는 시국 현안을 다루지 못하게 한 정부 당국의 강압적 조치 때문에 다시 인쇄한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시보 편집진은 당초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메시지 발표 소식을 상세하게 전하고, 아예 메시지 전문을 모두 1면에 게재한 신문을 이미 발행했습니다. 그래서 8월 13일자 신문은 두 가지가 발행된 셈입니다. 처음 발행된 신문은 김 추기경의 메시지와 기자회견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9일 오전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에 관한 교회 입장을 밝히는 ‘현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오전 9시40분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CCK)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김 추기경은 천주교회는 국제 정세와 이에 따라 소용돌이치는 국내 정세를 직시하면서, 우리나라는 어디에 서 있으며, 우리 겨레의 진운은 어디로 향하여 나가고 있는지 심각한 우려를 표명치 않을 수 없다고 전제, ‘지난 연말 비상사태 선포와 변칙 통과한 보위법을 비롯하여 최근 예측 불능의 상태에서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 등에 접하여 정부는 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나라가 민주 사회인지 통제 사회인지 분간키 어려운 것이 솔직한 인상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또 7·4 남북공동성명이 집권 세력의 정권 유지 차원이 아니라 참된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초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한편, 정부의 통일 논의 독점을 반대했습니다. 아울러 8·3 긴급재정명령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격화시키는 졸속한 경제정책이 될 독소가 많다”고 단언했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의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가 보도된 지면이 정부 당국에 의해 배포 금지된 뒤, ‘예수 수난기’를 1면 톱기사로 게재한 가톨릭시보 1972년 8월 13일자 두 번째 신문 1면 지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시국 현안 다룬 가톨릭시보 모두 회수

 

정부에 대한 천주교회의 비판적 기조로 인해, 당시 교회 관련 정보와 소식의 집결지였던 가톨릭시보사에는 정보기관 요원이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김 추기경의 메시지 내용을 파악한 정부 기관은 가톨릭시보에 이 메시지와 관련된 기사를 게재하지 말 것을 종용했습니다.

 

당시 가톨릭시보 주간 김경환(토마스) 신부는 교회신문의 예언자적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이 메시지를 상세하게 보도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1면 전체를 메시지의 내용으로 꽉 채웠습니다. 다만 이후 사태를 예상하면서 모든 직원을 먼저 퇴근시키고, 자신이 직접 인쇄된 신문을 차에 실어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통상 인쇄 후 철도편으로 전국 각지로 발송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신부가 신문 발송을 마치고 숙소인 주교관으로 돌아온 뒤, 정부 기관원들은 당시 대구대교구장 서정길(요한 세례자) 대주교를 앞세워 찾아왔습니다. 서 대주교는 조용한 목소리로 신문 회수를 명령했고, 김 신부는 신문을 회수하기 위해 다시 역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이미 전국으로 발송된 신문은 모두 도착역에서 되돌아오고 있었고, 다음날 우편발송도 원천 봉쇄됐습니다. 결국 독자들은 김 추기경의 메시지가 게재된 신문을 받아볼 수 없었습니다.

 

 

박해받는 현실, 수난기로 암시

 

신문을 모두 회수한 김 신부는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인쇄된 신문을 모두 회수했으나, 어떻게든 교회가 현 시국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는 사실, 그 입장은 현 정부의 나라 통치와 정책 방향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라는 점, 그로 인해 교회와 가톨릭시보가 정부로부터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1면만 백지상태로 발행해야 할지, 혹은 해당 날짜의 신문을 발행하지 않을지, 고민 끝에 그는 1면을 다시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그는 예수 수난기를 싣기로 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불의한 사회 현실에 저항해야 할 예언자적 소명과 연결 짓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1면 중앙에 김 추기경이 시국과 관련한 메시지를 발표했다는 한 문장으로 된 간략한 기사를, 내용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게재함으로써 독자들이 뜬금없는 예수 수난기의 의미를 짐작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메시지, 그 소식을 전하고자 했던 가톨릭시보의 시련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한, 민주화 운동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천주교회의 참여와 연대, 고난과 희생의 서막이었습니다. 암울했던 독재시대를 뚫고 나와 정치적 민주화를 이끈 천주교회의 모습은 가히 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려 했던, 예언자로서의 교회 모습이었습니다. 그 길고 지루했던 여정의 시발점에 원주교구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있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10월 5일, 박영호 기자]


0 14 0

추천  0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